빌 게이츠의 기부가 세상을 바꿨을까? (L.맥고이/ 아르케/ 1판 1쇄/ 2017.08.31)
- 이 세상에 공짜 선물은 없다 -
2018년이다. 당시 대외활동을 했는데, 한 강의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빌 게이츠가 죽어서 어떤 이름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아세요?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 아니요. 필란트로피스트. 자선을 베푼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 합니다."
진위는 알 수 없다. 자신이 죽어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는 빌 게이츠 자신만이 안다. 하지만 그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물러난 뒤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으로 자리를 옮기고, 말라리아나 에이즈를 위해 싸우는 모습은 강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강한 근거다. 하지만 따져봐야 한다. 그가 베푼 필란트로피, 즉 자선이 과연 실제 효과가 있었는지, 빌 게이츠가 주목했던 문제를 해결했는지를 말이다.
책, <빌 게이츠의 기부가 세상을 바꿨을까?>는 빌 게이츠와 같은 자선 기업가들의 자선이 과연 문제를 해결했는지를 의문을 제기한다. 책의 부제는 이렇다. '이 세상에 공짜 선물은 없다' 부제가 모든 걸 말해준다.
자선은 대가 없이 무언가를 주는 것이다. 자선가는 대가 없이 무언가를 줄 수 있다. 하지만 자선 '사업가'는 다르다. 이들의 자선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 대가는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 더욱 견고해진다는 것이다. 정말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을 제거하고 해결해야 한다. 그것이 설령 자신에게 이익을 깎아야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자선 사업가들은 그렇지 않다. 표면에 드러난 문제는 조금 해결했을지 몰라도, 그 원인은 그대로 둔다. 마치 절대 침입해서는 안 되는 성역이자, 절대 말해서는 안 되는 볼드모트처럼 말이다.
현대 자선 사업가들의 자선 사업은 오히려 권력자들의 힘을 더욱 견고하게 한다. 가령 이런 것이다. 기부를 함으로써 세금 감면 혜택을 받는다. 이때 이를 비판할 수 있을까? 기부를 해서 세금 감면 혜택을 받았다는 걸 비판할 수 있을까? 그런 비판을 하는 순간 기부한 사람에게 도리어 돌을 던진다며 비난받을 것이다. 또한 자선 사업가들은 세상 그 누구보다 개인으로서 기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다. 이들을 욕하려면 최소 이들만큼의 기부를 해야 할 것이다. 책에서 대표되는 빌 게이츠는 10년 이상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보다 더 많은 돈을 기부한 사람은 아직 없을 것이다. 또 실제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실제 말라리아 치료제 개발과 에이즈 치료에 힘쓴 게 사실이다. 이 사실을 반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반박할 수 없음이 이들의 목소리와 힘을 더욱 키운다.
개인적으로 난 자선 사업보다는 자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선이 사업이 되면, 성과가 나와야 하고 당장 눈에 띄는 성과를 원하는 사업의 특성상 눈에 보이고 커 보이는 문제에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며, 이 원인의 제거는 눈에 띄지도 않고 빠르게 되지도 않는다. 또 이일을 하는데 돈이 많이 드는 게 사실이다. 때문에 나는 돈을 가진 사람들, 자본의 힘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자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존재들이 필요하다. 그들이 없이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자선 사업이 무조건 옳다, 맞다고 말할 순 없다. 그들은 자선을 베푼 것이 아니고, 그저 자선을 붙여 사업을 했다.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문제의 해결이 아닌, 자신들의 이익이었다. 나는 이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또한 계속해서 그렇게만 가는 자선 사업은 멈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정말 필란트로피스트로 기억되고 싶다면, 자신들이 가진 힘과 자신들이 추구한 이익이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임을 알고, 그 손을 풀어 그 힘을 나누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의 이름 앞에 필란트로피스트라는 이름이 붙을 수 있을 거라고, 또 그랬으면 좋겠다고 바란다.
밑줄
-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내는 것. 다양한 표현 방식이 있겠지만 의미는 모두 같다. 신세대 자선가들은 과거의 선배들보다 더 결과 지향적이고 효율적임을 자부한다. 그들은 무한 경쟁과 이윤 지향으로 대변되는 금융자본주의의 영향이 아직 미치지 않은 마지막 영역, 바로 자선 기부의 영역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 싶어 한다. 관료주의의 수렁에 빠지지 않고 목표한 대로 이루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다.(p.22)
- 박애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새로운' 자선은 과거의 접근 방식과 어떻게 다른가? 비숍과 그린은 박애 자본주의를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한다. 첫째, 미시적 관점의 정의다. 박애 자본주의는 자선을 실천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세예에서 기업을 경영하는 것과 같이 이를 자선 분야에 응용한 것이다. 둘째, 거시적 관점에서 본 박애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자체를 의한다. 즉, 새로운 제품, 나은 품질, 저렴한 가격을 실현할 수 있도록 혁신을 주도하면 결국에 가서는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간다는 논리다.(p.22)
- 자선활동 증가가 어떻게 불평등과 빈곤의 심화에 기여할 수 있는지 몇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우선, 자선적 기부로 부의 재분배를 위한 복지정책에 쓸 세수 기반이 줄어든다. 둘째, 기부금 대부분은 소득이 낮은 개인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p.28)
- 우려는 자선활동이 증세 요구를 잠재움으로써, 결과적으로 부를 재분배하기보다는 부자들의 자산을 보호하고 확대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이다. 소비자들에 대한 접근 수단을 확보하고자 게이츠 재단 등과 손을 잡은 미국과 유럽 기반의 다국적 기업에 자선활동은 새로운 시장의 문을 열어준다. 더 많이 베푸는 것이 더 많이 얻기 위한 지름길이다. 세계 보건 기구나 유엔 식량농업기구 등 국제기구의 정책 수립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핵심 실세의 울타리는 점점 좁아지고, 그 안으로 부는 더욱 집중되고 있다.(p.28~29)
- "(…) 반면 사회 전체가 변화할 때까지 결코 멈추지 못하는 사람은 기업가뿐이다." 스콜과 드레이턴의 발언은 둘 다 말도 안 되는 궤변이다. "사회 전체를 변화시킬 때까지 결코 멈추지 못하는 이들은 기업가뿐"이라는 그들의 말은 더 나은 노동조건을 쟁취하고자 홈스테드와 러드로에서 목숨을 잃을 때까지 싸웠던 노동자들의 유지를 욕보이는 것이다. 그 노동자들도 사회를 바꾸고 싶어 했다. 그 노동자들도 선도적인 자선가가 고용한 총잡이의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p.90)
- 애초에 사회적 기업이 그런 이익에 이바지하긴 하는 걸까? '새로운 균형 상태'가 목표 집단에 사회적 이익을 제공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하물며 사회 전반에 대한 효과를 측정하는 것은, 실제로 어떤 사회를 의미하는지 모르겠지만, 더 어렵다. 매출 상승, 풍족한 배당, 높은 주식가치 등 일반적인 기업 성과지표는 사회적 기업이 생각하는 만큼 사회적 이익을 제대로 평가하기 적합하지 않다. 대부분의 사회적 기업가는 자신의 사업이나 사회 활동이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결과, 소위 테드 헤드의 세계에서 SROI(사회적 투자수익률)라고 부르는 성과를 달성했음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앞선 세대처럼 그들도 결국에는 사회과학 분야의 오랜 과제에 직면한다. 바로 인과관계를 증명하는 것이다. 특정한 후원금이나 후원 활동이 보건, 교육, 사회복지에 직접적으로 측정 가능한 성과를 가져왔는지 파악하기란 매우 어렵다. 국내 총생산의 증가, 물가변동, 금리변동 등 여러 변수가 결과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난관에 직면한 많은 자선기관이나 사회적 기업은 자신들의 효율성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용 지표를 사용한다. 그중 하나가 레버리지, 즉 다른 자선가, 정부, 또는 시장의 큰 손을 자신의 자선 목적에 동참시키는 능력이다.(p.91~92)
- 사회적 기업가는 전통적인 기업가보다 서비스와 제품을 통한 사회적 가치 창출을 기업의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심지어 재무 성과보다 사회적 가치를 우위에 두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한다. 사회적 가치에 연연함을 드러내는 문구들은 '공유 가치', 혼합 가치', 삼중 평가 기준(트리플 바텀 라인)' 등 다양하다. 일견, 기업이 환경 및 사회적 영향력에 신경을 쓰는 것이 바람직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사회적 기업의 주된 목표이며 최정 결과라는 마틴과 오스버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는 매우 한정된다. 중소기업 지원에서 소액대출 붐이나 '임팩트 투자'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기업이 주도하는 사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떠들썩한 홍보에 비해 실제 효과, 적어도 전 세계 빈곤층에 대한 지원 효과는 미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p.99)
- 빈곤퇴치 효과가 있다고 널리 알려진 또 다른 예가 임팩트 투자다. 임팩트 투자는 개인이 환경 및 사회적 효과를 목적으로 하는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시장 수준의 경제적 이익을 얻는다는 발상이다. 2010년 투자자를 위한 대략적인 잠재 수익률 평가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JP모건, 록펠러재단, 글로벌 임팩트 투자 네트워크는 임팩트 투자로 인한 수익이 1,830억에서 6,670억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을 발표했다. 투자가들이 몰려들었다. 그때부터, 임팩트 투자에 대한 실적 평가가 이루어졌다. 투자에 대한 재무적, 사회적 성과를 모두 가져다주는 종목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재무 수익은 높은 반면 직접적인 사회적 성과는 없었다. 반대의 경우, 즉 사회적 성과의 가능성을 보이는 종목은 많았지만 투자자를 끌어모으기에는 수익 전망이 형편없이 낮았다.(p.103)
- 새로운 기업 운동이 세계 빈곤퇴치에 혁신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별다른 근거도 없이 끈질기게 주장하는 것은 확실히 사회적 기업이 가진 특이점이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유행했던 기업의 사회적 책임론은 속죄의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사회적 이익을 지향하는 자선이 기업의 잘못된 경영관행을 보상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전제가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사회 투자가들은 기업의 성공이야말로 사회적 가치에 기여하는 증거라고 믿는다. 과거의 기업 관행에 대한 속죄나 보상의 분이기는 더는 찾아볼 수 없다. 그들에게는 개발되지 않은 분야를 상업적으로 충분히 활용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죄악이다.(p.107)
- 최근 수년간 후원금을 받은 단체가 후원 재단에서 제시한 특정분야에 한해서만 후원금을 사용하도록 제한하는 '지정기부'가 '비지정 기부'보다 많이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이런 경향에 따라 지원대상기관은 후원자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압박으로 인해, 단체 본연의 장기 계획을 포기하고 단기 목표에 매달리게 된다.(p.119)
- 재단은 또한 비영리단체나 학술기관의 임의적인 후원금을 신청을 거부하고, '초청 한정'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기부의 효과를 '증명'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재단은 점점 신뢰할 수 있는 단체만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대상자 선정에 귀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은 있겠지만, 재단과 아무 연이 닿지 않는 소규모 비영리단체는 접근조차 해볼 수 없게 되었다.(p.119)
- 젠킨스의 연구가 시사하듯, 서로 긴밀한 관계로 뭉친 후원자 집단은 누가 후원금을 신청할 자격이 되는지, 어떤 종류의 후원금을 검토할 것인지, 후원금을 받은 단체는 어떤 정책을 추진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결정권을 행사하고 있다. 후원금이 사용될 복지 프로그램에 대해 누구보다도 깊이 알고 있는 것은 후원금을 받는 기관이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가 남미의 경제개발 프로젝트에 대해 날카롭게 꼬집었던 "숫자가 사람보다 대접받는" 기부 환경 때문이다.(p.127)
- 물론 돈줄을 쥔 사람이 정해진 이상, 후원자와 지원대상자와의 관계에서 후원자는 늘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입장이었다. "돈 낸 사람 마음대로"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신세대 후원자가 이전과 다른 점은 자신이 누리는 지배력을 자랑스러워하며, 앞으로 더 큰 지배력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데 있다. 젠킨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후원자들이 점점 "더 독단적인 태도를 보이며, 재단 위주의 문제 해결 모델을 내세워 복지 기관과 그들이 봉사하는 지역사회의 목소리를 약화시키는" 동안 후원자와 지원대상자 간의 불평등 관계는 점점 더 악화되어 왔다.(p.127)
- 자선활동이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해서 자선재단이 그 존재를 위협받지는 않는다. 오히려, 효과가 없음으로 해서 자선은 더욱 번창한다.(p.170)
- 최고의 기부는 가능한 무심함의 미덕을 발휘하는 것이다. 무심함은 말 그대로 개입하지 않고 주는 것이다. 정말로 선물을 주고자 했다면, 선물을 주는 이가 앞으로도 그 선물에 대한 권리르 주장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내주고자 했다면, 선물을 준 이는 개입할 권리가 없다. 선물을 받은 사람도 홀로 일어설 자격이 있다. 동정은 그들에게 가당치 않다. 동정은 받는 사람과 잘못된 관계로 엮이게 하기도 하고, 받는 이로 하여금 베푼 이의 선의의 무게에 짓눌리게 한다. 그들을 측은하게 여길 필요도 없다. 측은히 여기는 것은 권한을 부여하는 만큼이나 그들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타인을 종속과 의무로 계속 옭아매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진정한 선물은 스스로 뭔가 할 수 있도록 여유와 시간을 주는 것이다.(p.269)
- 오늘날의 엘리트들은 절대 경솔하지 않다. 그들은 신중한 사람들이다. 고된 일과를 마치고 조심스럽게 배지를 챙기는 성실한 보이스카우트 단원처럼, 그들도 국제회의에 참석도 하면서 바쁘게 산다. 하지만 그들이 국내외 지배구조와 규칙을 결정할 힘을 갖는 한, 그들이 아닌 다른 이들, 즉 자신의 것을 선뜻 내놓는 본분에 충실한 전 세계 수많은 노동자 계급 자선가들은 영원히 그들이 저질러 놓은 쓰레기를 치워야 한다.(p.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