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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Sep 17. 2022

진정성이 뭔지는 모르지만

책,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앤드류 포터/ 마티/ 초판 3쇄/ 2017.01.20)

-  진정성이 뭔지는 모르지만 -



한때 기자를 목표한 적이 있었다. 세상에 여러 문제를 찾아 취재하고, 문제를 지적하는 기사를 쓰고 싶었다. 그렇게 기사를 쓰면, 문제가 바뀐다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문제를 일으키는 건 기업이었다. 그래서 기업 경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점을 말하는 기자가 되고 싶었다. 내가 쓰는 기사 몇 개로 기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귀엽고, 순진했다.


사회문제는 다양하고,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과 구조도 복잡하다. 그리고 거칠다. 하나의 문제가 억세고, 날카롭다. 하물며 그런 문제가 아마존 생태계처럼 엉키고 설켜있는 구조에서 발생하는데, 단순 기사 몇 개로 매끄럽게 풀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기자가 되고 싶었던 건 그런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개인적 차원에서 최소 겉으로는 노력하는 기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업들은 자신들의 활동이 "진성성 있는 경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기업들의 '진정성 있는 경영'으로 인해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게 됐다.


책,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은 진정성이 사용되는 다양한 맥락을 살펴보고, 진정성을 추구하는 것을 멈출 때에야 비로소 진정성을 추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책의 부제가 흥미롭다. '진정성'의 정확한 실체는 모르지만 '진정성 없는 것'이 무엇인지는 직관적으로 알고 있으며 '진정성'이 뭐든 간에 사람들은 그것을 원한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추가하고 싶다. 내 진정성을 말하지 말라고.


내가 생각하는 진정성은 이성보다는 감성의 영역이었다. 진정성 있는 사과 또는 사죄, 진정성 있는 마음가짐 등 맥락에서 이해하고 사용했다. 문제는 진정성이 실체가 없다는 점이다. 겉 표현과 속마음이 같을지 다를지 알 수 없다. 기업 경영도 마찬가지다. 진정성 있는 지속가능 경영을 한다고 하는데, 실제 행하는 걸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왕왕 있다. 알 수 없는 감성 영역보다, 눈에 바로 보이는 태도를 보는 게 기업을 판단하기도, 비판하기도 쉬웠다. 선입견도 생겼다. 진정성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현재로선 거의 진정성 없다고 생각한다. 말하는 순간 없어지는 게 진정성이다. 말해야 아는 게 아니라, 느껴지는 것이다.


최근 기업 ESG 경영, 지속가능성, 사회문제 해결, 사회적 가치 추구 등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로 인식된 비영리와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 중간에 있는 사회적 기업, 소셜벤처가 많아지고 있고, 이들을 지원하는 조직도 많아지고 있다. 또한 비영리와는 전혀 반대편에 있던 영리 기업들 마저도 이제는 사회문제 해결을 지원하고,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겠다고 말한다. 또한 창출한 사회적 가치를 측정하는 시도도 한다.


이러한 시도는 어찌 되었건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기업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해도, 최소 줄일 수는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진정성을 100% 신뢰하진 못하겠다. 믿었다가 데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들의 진정성이 진정, 진정성 있게 느껴지기 위해선 그 말을 뒷받침할 행동과 시스템이 동반되어야 한다.


최근 기업 CSO(최고 지속가능성 책임자)들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강연자로 참여한 한 소셜벤처의 CSO가 '시스템적 진정성'이라는 표현을 썼다. 어떤 기업이 진정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기 위해선 시스템적 진정성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 내부에 시스템적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문제가 발생하면 해결하고, 아예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나아가는 시스템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동의한다. 기업이 진정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며 사회적 가치를 만들기 위해선 기업 내부에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최근 화두인 ESG로 말하면 G(거버넌스) 영역이 잘 갖춰져야 되는 게 아닐까 싶다.


기업 내부 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철학이 명확하고, 그 철학 아래 의사결정 체계를 확립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하고, 그 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구조를 만들어 놓고, 그 구조를 계속해서 개선해나가는 모습이 진정 지속가능 경영을 잘하는 기업이 아닐까 싶다. 그런 차원에서 지속가능 경영을 진짜 잘하는 기업은 몇 없는 것 같다. 이제는 지겨울 정도로 많이 들은 파타고니아 정도일까.


파타고니아는 기업의 출발부터 문제에서 출발했고, 지금도 꾸준히 문제를 해결해가고 있다. 그런 모습 속에서 파타고니아가 진짜 진정성 있는 기업이라고 느꼈다. 최근 파타고니아 창업자 이본 쉬나드가 자신의 파타고니아 지분을 모조리 비영리에 기부한 게 큰 화두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 이 사람, 이 기업은 진짜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한편으론, 이제는 정말 가짜들이 따라갈 수 없는 영역으로 넘어간 것 같기도 했다. 


가짜들은 돈을 위해 지속 가능성을 때때로 포기할 것이고, 진짜 들은 지속 가능성을 위해 때때로 돈을 포기할 것이다. 어떤 기업이 정말 진정성 있느냐 없느냐는 이런 태도에서 결정 나는 게 아닐까 싶다. 진정성이 뭔지는 모르지만, 진정성 있는 기업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부디 말이 아닌 행동과 태도로 그 진정성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밑줄

- 노동이 만족감과 성취감을 준다는 보장은 아무 데도 없다. 그러니까 일을 일이라 부르는 것이고, 고되니까 고용주가 당신에게 일한 대가를 지급하는 것이다.(p.58)


- 루소에게 자부심은 인간 타락 이전의 일이 아니라 자부심 그 자체가 타락이었다. 자부심은 나를 남과 비교하는 데서 비롯됐고, 새로운 동기부여, 새로운 형태의 자기애를 탄생시켰다. 루소는 이를 '아무르 프로프르(amour-propre)'라고 부른다. … 아무르 프로프르가 인간관계를 지배하면, 사람들은 일제히 누가 가장 가무에 능하고, 누가 제일 잘생겼고, 누가 가장 힘세고 우며 있고 달변인지를 따지며 겉모습에 집착하게 된다. 이제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은 오로지 지위뿐이다.(p.73)


- 자산 축적 행위가 안락과 여가를 즐기는 정도를 넘어 사회적 지위와 지배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면 부의 추구는 타자에게 특권을 행사하는 수단으로 변한다. 여기서 상거래의 문제점은 그것이 부의 증식만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상거래는 서로 존중하는 직접적이고 자연스러운 관계를 물건이 매개하는 관계로 대체하므로 본질적으로 소외를 일으키는 사회적 상호작용이다. 또한 전적으로 사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 기인하 활동이기 때문에 인간관계는 철저하게 도구화된다. 우리는 타자를 목적이 아니라 내 자신의 이기적 목표를 위한 도구로 취급한다. 인간관계가 타자를 착취할 구실로 전락하면 사람들은 순식간에 서로로부터 소외된다.(p.73)


- 그럴듯한 위작은 완벽한 복제의 문제로 이어진다. 원본과 복제본이 있는데 복제본이 너무도 교묘해 아무도 원본과 구별하지 못한다면 둘 중 어느 것이 갤러리에 걸려 있어도 우리에게 상관없지 않을까?(p.103)


- 진정성 게임에 참여하는 것은 이제 마케팅에서 기본이고 필수이며, 모든 브랜드 전략의 판단기준이다. 소비자는 더 똑똑해지고 세련됐다. 이들은 끊임없는 광고의 홍수를 경계하는 한편, 독창성, 진실성, 가치를 약속하(고 안겨주)는 브랜드 상품을 기꺼이 구매할 의사를 보인다. 그러나 진정하다고 말한다 해서 그 물건이 진정해지는 건 아니다. 무엇이 진정한가, 어째서 진정한가 하는 물음은 지금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절실한 문제다.(p.125)


- '위장된 진정성'이라 할 때 글렌이 지칭하는 것은 단순한 가짜가 아닌, 좀 더 불길한 것을 뜻한다. 그 둘을 좀 더 명확히 구별하면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어떤 것이 단순히 가짜일 때는, 거기에 대비되는 진자에 상당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 그와 대조적으로 위장된 진정성이란 진짜가 따로 있고 가짜는 그것의 단순한 복제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위장된 진정성이 의도하는 목표는 진짜/가짜를 구분하는 기존의 게임을 더 이상 소용없거나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p.134~135)


- 진정성은 권위나 카리스마와 같아서, 남에게 자랑하는 순간 곧 사라진다. 둘째, 진정성은 시장경제와 불편한 관계를 맺는다. 사람들은 진정성이란 즉흥적이고 자연스럽고 순수하고 왜곡되지 않아야 하며, 돈벌이와 무관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런데 시장은 계획적이고 진실하지 않고 계산적이고 광고된다. 따라서 진정성을 시장에서 팔면 앞서와 같이 다시 자의식 자멸에 이르게 된다.(p.137)


- 자본가들을 욕하기란 손쉽고도 만족스럽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간단치 않다. 사실 진정성이 지닌 문제점은, 진정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대기업이 청바지나 맥주나 이국적인 여행상품을 팔려고 고안해낸 광고문구일 뿐이라거나 하는 데 있지 않다. 진정성이 겨누면 달아나는 움직이는 타깃인 것은 맞다. 하지만 진정성 추구의 그와 같은 근변성은 그 밑에 깔린 경쟁구조가 중요한 원인이다. 즉, 진정성을 판매하는 자가 아니라 구매하는 자를 비난해야 한다는 뜻이다.(p.137~138)


- 과시용 진정성은 진정함 찾기에 극도의 엄숙함을 부여하는 강수를 둔다. 그것은 내게 뜻있는 삶을 제공할 뿐 아니라, 사회, 환경, 심지어 전 지구에 좋은 일이 된다. 개인에게 이익이고 도덕적으로도 가상한 일거양득 상황은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의 핵심적인 속임수다. 공사일치의 욕망은 왜 진정성 있는 생활방식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하나같이 박애주의의 이미지로 장식되는지 설명해준다. 그러나 지위 지향적 행위는 결국 언제나 정체가 드러난다. 유기농작물의 흥망성쇠는 이를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다.(p.149)


- 자주 인용되는 한 연구에 따르면, 만약 전 세계의 일반농법이 유기농법으로 바뀌어 현재 일반농법에서 사용되는 공중질소를 소똥으로 대체해야 한다면, 추가로 소 780만 마리의 배설물이 필요하다. 그렇게 많은 소에게 먹일 사료를 마련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농지가 필요하다.(p.150)


- 로컬푸드의 친환경성은 사실 과장된 부분이 있다. 선박이나 열차로 식품을 운송하는 것은 매우 효율적이고, 농산물의 경작, 포장, 조리에 드는 비용을 전체적으로 고려하면, 운송에 소비되는 에너지는 총 에너지 소비량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비중을 차지한다. 오히려 소량의 로컬 농산물을 자동차나 트럭에 싣고 생산자 직거래 장터나 작은 가게 십여 군데로 실어 나르는 것이, 수천 톤의 바나나를 컨테이너선으로 나르는 것보다 단위당 에너지 낭비가 더 심하다.(p.153)


- 정치에서 우리가 원하지만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진정성이다. 그 진정성은 곧 정치인과의 결속감이다. 즉, 매게 되지 않고, 홍보되지 않고, 추적 여론조차 같은 데 영향을 주려고 고안된 메시지 따위에 좌우되지 ㅇ낳는 결속감 말이다.(p.204)


- "내 말은 진실이고 남의 말은 진실일 수 없다. 진실감은 내가 진실이라고 '느끼는 것'인 동시에 '내가' 진싱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거기에는 감정적 속성뿐 아니라 이기적 속성이 존재한다."(p.204)


- 정치적∙인종적으로 미국인들은 조상에 흑인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흑인으로 간주하는 '한 방울 규칙(one-drop rule)'을 따른다. 원래 이 규칙은 20세기 초 백인 인종주의자들이 혼혈아 출산을 방지(하여 백인 순혈주의를 유지)하는 법을 통과시키려고 고안한 것이지만, 이후 흑인 운동가들이 이를 역이용해 흑인 공동체의 구성원을 늘리고 정치적∙문화적 영향력을 키우는 데 활용했다.(p.209)


- 버락 오바마의 경우는 피가 얼마나 검으냐보다도 그 피의 원산지가 문제였다. 미국에서 인종문제는 노예제도와 떼어놓고 논할 수 없다. 백인 노예상들이 미국으로 끌고 온 노예의 대부분은 세네갈에서 라이베리아를 지나 멀리 남쪽 앙골라에 이르는 서아프리카 해안 출신들이다. 미국 흑인들, 특히 흑인민권운동이 절정을 이루던 시기에 젊은 시절을 보낸 현재 나이 든 세대의 시각으로는, 서아프리카 출신 노예의 후에라야 진정한 미국 흑인이었다. 그런데 오바마의 아버지는 동부 해안에 있는 케냐에서 출생했다. "단지 피부 색깔이 같다고 우리와 한 부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민권운동가 앨 샤프턴 목사의 말이다.(p.209)


- 밀에게 다양성이 중요한 이유는 어떤 삶을 살지 결정하는 데 필요한 선택의 여지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단순하다. 각각 다른 물리적 환경에서 다른 동식물이 번성하듯이 인간도 다양한 도덕 환경, 문화환경 속에서 다양하게 번성한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약인 것이 다른 이에겐 독이 될 수 있듯, "각자의 삶의 양식에 맞는 다양성이 없으면, 합당한 몫의 행복도 못 누리고, 본성에 잠재된 정신적∙도덕적∙미적 능력에도 도달할 수 없다."(p.244)


- 전통이 더 이상 확고하고 합리적인 가치의 원천이 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진정성 추구를 시도한다. … 세계에는 고유한 가치가 있으며 그 안에서 각자 목적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느낌이 우리 삶에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방식으로 진정성을 추구한다.(p.308)


- 거대한 진성성 허구 앞에서 세부사항을 논하는 건 소용없는 일이다. 존재한 적 없는 과거에 대한 몽롱한 향수, 근대에 대한 균형감 잃은 회의심, 개인적으로 의미 있고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척하지만 실은 정체된 수구정치, 이런 진정성 허구의 중심에는 나한테 좋은 것이 사회에도 좋고 지구에도 좋을 것이라는 전제가 담겨 있다. 영적으로 충만감을 주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칭송할 만하며, 전자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면 후자는 자동으로 따라올 것이라고 가정한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의미 있다고 여기는 일이 종종 사회적으로도 유익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둘 사이에 필연적 관계가 있는 건 아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진정성 추구는 사회 퇴행적인 군비경쟁처럼 돌변해 원래 벗어나고자 했던 경쟁을 더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p.314)


- 진정성 허구를 꿰뚫어 보기 위해서는 근대와 화해하고 지난 250년이 비극적 실수가 아니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얻은 것도 있고 잃은 것도 있지만 적어도 총제적으로 봤을 때 근대를 끝장내고 후진해 향수 젖은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잘못임을 인정해야 한다.(p.314)
 

- 요즘 '진보'라는 용어는 주로 진지한 척하거나 아니면 빈정대려는 사람들이 쓰는 고색창연한 용어가 됐다. 그러나 어쩌면 진보 개념을 재활시킬 때가 온 건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무조건 좋아진다는 눈먼 신념이 아니라, 인류가 장애물을 만나도 이성과 창의력과 선의로 해결할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 말이다. 진보에 대한 믿음은 바로 인류에 대한 믿음이다.(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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