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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팔청춘 Oct 10. 2022

재활용품 수집인의 삶

책, <가난의 문법>


가난의 문법
(소준철/ 푸른숲/ 첫판 6쇄/ 2021.05.10)

- 재활용품 수집인의 삶 -


예전에 국내 한 공기업이 진행한 사업 아이디어 공모전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공모전 내용은 공기업에서 진행할 수 있는 공익사업 아이디어 제안이었다. 내가 제안한 건, 폐지 줍는 노인에게 파지를 수집하고 사용하자는 거였다. 폐지 줍는 노인에 삶에 주목한 거였다. 당시 폐지 값이 많이 줄어 폐지 줍는 어르신의 삶이 어려워졌다는 기사를 접했었고, 기업들은 자원순환을 하고자 하니 이 두 니즈를 합치면 기업은 기업대로 공익을 실천하고, 노인은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당시 나는 폐지 줍는 어르신들이 폐지를 줍는 게 아니라, 자원을 수집하는 거라고 명명하고 기업이 이들의 자원을 수거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아이디어 제안서를 썼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는데, 결과는 탈락이었다. 꽤 열심히 준비하고 잘 썼다고 생각해서 나름 탈락이 충격적이었다.


탈락 이유가 뭘까 고민하다 답을 찾지 못했었다. 결국 이 분야에 경험 많은 분께 아이디어 제안서를 보여드리고, 자문을 구했다. 몇 가지 조언을 들었는데, 그중 하나는 '내가 제안한 사업이 그들의 경제적 여건은 조금 나아지게 할 수 있겠지만, 정말 그들을 위험에서 구제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이었다. 그 이유를 듣고, 조금 더 자료를 찾아보니 내 아이디어가 떨어진 이유가 보였다. 내 아이디어는 그들이 겪는 어려움 중 일부를 개선할 수는 있지만, 본질은 건들지 못했었다. 또 해당 공기업이 이걸 하기에는 품이 너무 많이 들었다. 기업적으로 말하면 사용자 경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쓴 것이다. 즉, 어르신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


책, <가난의 문법>은 소위 폐지 줍는 노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왜 그런 삶을 살게 됐는지를 보여준다. 저자가 말하는 핵심은 단순하다. 폐지를 줍는, 아니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노인들이 결코 원해서 그 일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들이 하는 일은 재활용을 위한 자원순환이고,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일이지만 사회제도 밖에 내몰려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고령사회다. 전체 인구 중 15%가 노인이다. 지하철을 타면 청년보다 노년이 더 많은 걸 가끔 본다. 지하철을 일찍 타면 더욱 그렇다. 우리나라가 고령사회임을 실감하게 된다. 또한 우리나라는 노인 빈곤율이 높다. 그러한 노인과 빈곤의 교집합에 있는 사람들이 '재활용품을 수집(또는 수거)하는 노인'들이 아닐까 싶다.(물론 전부는 아닐 것이다. 취미로, 운동삼아, 손주들 용돈 벌이로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들의 삶을 보는 게 우리나라 정책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되지 않나 싶다.


책에서 묘사된 재활용 수집 노인의 삶은 경쟁적이다. 남이 폐지를 줍기 전에 내가 먼저 주워야 하고, 인터넷이든 전화든 소통 수단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더 많이 가져가는 식이다. 일도 고되다. 꽉 채우면 200kg이 넘는 리어카를 끌고 싶수 km를 이동해야 한다. 한국인 하루 평균 걸음 수가 6,000~7,000보 정도라고 하고, 1만 보 걷기 챌린지가 유행인 상황에서 신체적으로 기능이 저하된 노인들이 재활용품을 수집할 때 얼마나 힘이 들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버는 돈은 하루에 1만 원 정도다. 30일을 꼬박 쉬지 않고 일해도 30만 원을 번다.


물론 이들을 위한 지원책이 없는 건 아니다.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노령연금이 지급되고 있고, 요즘 노인복지관에 가면 노인일자리사업을 안 하는 곳이 없다. 책에서도 언급된 노인일자리 사업은 한 달에 20시간 정도를 일하고 급여를 받아가는 사업이다. 예전에 노인종합복지관에서 노인일자리사업 봉사활동을 1년 정도 했었는데, 당시 참여자만 수백 명이었다. 


봉사 당시 노인일자리사업이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20시간 정도만 일하면 되기에, 업무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지 않고 돈 쓸 곳이 그렇게 많지 않을 노인들에겐 급여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문제는 해당 일의 질이다.


내가 노인일자리사업 봉사를 할 당시에 기억하는 일자리 종류는, 주차관리인, 청소 등이었다. 이것만 보면 나쁘지 않은 일이다. 주차는 오는 차만 안내해주면 되고, 청소는 쓰레기만 분리수거하고 쓸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신체적 상태다. 한여름 기온이 40도 가까이 올라가는 상황에서 주차관리를 하게 되면 땡볕에서 일하게 된다. 이는 곧 열사병으로 이어질 수 있고, 노인의 경우 사망에 까지 이를 수 있다. 또한 청소도 마찬가지다. 배정되는 구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약한 노인의 몸으론 청소조차 힘들 수 있다. 예전에 한 변호사가 산재 관련 소송을 하면서, 노인의 몸으로 청소를 하는 게 심박수가 얼마나 올라가고 고된지 몸소 증명해 증거로 제출한 사례를 본 적이 있다. 젊은 남성 변호사가 해도 힘이드는데, 노인이 하면 어떨까. 그렇게 힘든 일이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살 수 있는 게 노인의 삶이다. 누구보다 노력하는 삶이다. 주차관리 요원도, 청소부도, 재활용품 수집 노인도 모두 각자의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떨까. 나 역시도 마찬가지지만 그저 가난한 사람이라는 시각이 있다. 가난하니까 도와줘야 하는 사람, 집에서 버리는 책이 나오면 모아뒀다가 줘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불쌍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최소 도움을 줘야 하는 건 맞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생각으로 버리는 책을 모아서 드리기도 했었고, 공모전에 참가했었다. 내 아이디어가 실제 사업으로 이어지면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었다. 책을 다 읽고 보니, 과연 내가 도움을 줬다고 혹은 준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과연 그들 입장에서도 도움으로 다가왔을까? 생각하게 된다.


기업에서 제품을 만들 때도 그렇고, 사업 아이디어를 구상할 때도 마찬가지다. 실제 해당 솔루션을 만들었을 때 대상 당사자들의 경험과 필요에서 나와야 한다. 유니버셜디자인을 한다고 했을 때, 해당 디자인 제품을 사용하는 장애인이 직접 사용해 보아야 하고, 노인들을 위한 솔루션을 만든다고 했을 때 실제 그들이 잘 사용할 수 있는지 생각하지 못한 문제는 없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해결책을 만들면,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해결책이 되고 만다. 그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보고, 문제점을 도출해서 만들어야 한다.


재활용품 수집 노인들의 삶이 더 안타깝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들의 일이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친환경이 대두되고, 자원 재활용이 나날이 높아지고, 또 코로나로 인한 펜대믹으로 비대면과 택배, 배달이 증가했던 지난 몇 년 간 이들의 역할이 단순 폐지 줍기에서 재활용 자원 수거라는 시각으로 변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중요해진 것인데, 아직도 제도 밖에서 있어서 인도를 올라가지 못하고 위험천만한 차도에서 수백 킬로그램의 리어카를 끌어야 하는 상황이다. 


이들을 위한 정책이 조금 더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고, 이들의 삶을 기반으로 하지 못하고 나의 판단대로 아이디어를 구상했던 나를 조금 반성한다. 향후 새로운 아이디어를 작성하게 된다면, 이 부분을 더욱 고려해서 아이디어를 만들어야겠다. 재활용품 수집인을 거리에서 본다면, 그때는 내가 그들이 조금은 다르게 보일 것 같다.


밑줄

- 독자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단순하다.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노인들이 그런 일과 생활을 하게 된 원인이 개인의 잘못만은 아니다라는 것이다.(p.13)


- 그/녀들은 폐지만을 줍는 게 아니며, 재활용이 가능한 폐품을 줍는다. 다시 말하자면, 그/녀들은 국가와 산업이 산정한 재활용 체계의 말단에서 '재활용' 가능한 폐품을 수집하여 판매하는데, 이는 폐품을 재활용 체계로 밀어 넣는 비공식적인 현상이다. 단순히 '폐지 줍는'이라고 표현할 때, 이 현상의 문제를 은폐하고 개인의 문제로 따지게 만드는 상황이 발생한다. 게다가 그/녀들은 폐품을 줍고, 또 판매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그렇기에 사실 '재활용품 수집인'이라 불러야 마땅하겠다. 그래야 '수집'의 문제뿐만 아니라 '판매'에서 발생하는 문제까지도 아우를 수 있다.(p.15)


- 과거 넝마주이의 일이 넝마주이와 고물상과 폐품 매입업자 사이의 단수한 거래 관계였다면, 지금 재활용품 수집 노인은 이보다 더 고도화된 '관계'에 갇혀 있다. 이제 노인들이 재활용품을 수집하고 판매하는 행위는 폐기물 처리 과정에서의 자원순환 정책과 재활용 산업에 매개되어 있다. 그렇지만 제도와 산업, 그 어디에서도 인정받지도 보호받지도 못하는 위험한 일에 불과하다.(p.31)


- 가난한 사람의 삶을 귀 기울여 본 적이 있는가? 내가 이러다 가난해졌다고, 그 순간의 선택을 후회하는 모습 너머, 그 사람의 젊은 시절의 일과 지금의 하루하루를 들어 본 적이 있나? 한국사회에서 가난한 사람, 특히 가난한 노인에 대한 이야기는 '통계'나 '가난한 장면'을 통해 이루어지는 폭로와 경고의 형태가 많다. 더구나 '재활용품 수집 노인'이란 가난의 표상으로 쓰이곤 한다. 노인의 동년배들은 연민을 표하고, 이보다 젊은 세대는 반면교사로 삼고 있는 실패의 전형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사회적 대처는 미미하다. 국가와 사회의 시도는 통계 내에서 어떤 숫자는 낮추고 어떤 숫자는 높이는 데에 맞춰져 있다. 정작 필요한 건, 노인의 생활을 개선할 실질적인 방편이다.(p.50)


- 재활용품 수집 노인들은 제도 바깥의 영역에 존재한다. 다세대주택 밀집 지역에서 노인들이 재활용품 수거차가 오기 전에 쓰레기를 선점해 수집하는 경우를 불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 상점가에서 상점 주인이 자신의 가게에서 나온 재활용품 처리를 노인에게 맡기는 것 역시 불법적인 일이 아니다. 도시가 늘 '공식적'인 방식으로 움직이는 건 아니기에, 이러한 상황을 두고 무조건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런 일로 노인들이 일시적인 금전을 취할 수는 있겠으나, 그들의 생활 자체가 개선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청소원으로 '불법 고용'하는 사례를 보더라도 악용될 소지가 크다.(p.76~77)


- 노인들의 재활용품 수집은 비공식적인 노동이며, 도시가 온전히 공식적으로만 작동할 수 없으며 비공식적으로도 작동한다는 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사례다. 그렇지만 허가와 신고를 거치지 않고, 일종의 사각지대로서 암묵적인 용인 아래 유지되는 상황이다. 더구나 재활용품 수집 노인들의 수집과 판매 행위는 제도의 바깥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책임 주체가 명확하지 않다는 허점이 있다.(p.77)


-  재활용품 수집 생태계에서의 경쟁은 속도에서 생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재활용품 수집 노인들은 재활용품 수거 체계를 비롯한 자원순환 정책의 미지한 수거 제도와 (수집한 재활용품을 재자원화하는) 재활용 산업 사이의 빈틈을 메우고 있다. 더구나 이 일을 하는 노인은 대개 동료가 없다. 그렇잖아도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여성 노인들은 이 속도 경쟁에서도 뒤로 밀린다. 즉, 여성 노인들은 대개 자신의 편 없이, 자신보다 신체적 능력이나 나은 모두와 경쟁한다. 주인 없는 재활용품을 둘러싼 외로운 노인들 간의 경쟁은 계속해서 심화되는 중이다.(p.90)


- 이 생태계를 유지하게 하는 건, 노인들의 일과 그 안의 경쟁뿐만은 아니다. 이 생태계는 보다 젊은 세대들 혹은 보다 부유한 계층의 책임을, 더 나아가 제품을 제조하는 업체의 의무를 대신하는 역할을 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노인은 젊은 세대와 부유한 계층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는 셈이다. 착취하는 세대와 계층은 재활용품 수집에 나선 노인들을 보면 그 이유를 두고 골목에 상자가 널려있기 때문이며, 노인들은 가난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한다.(p.90~91)


- 종이상자의 생산량, 배출량이 늘어나는 현상은 노인을 착취하는 일을 심화시키고 있다. 배달과 온라인 쇼핑이 활성화되면서 종이상자의 사용량이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다. 집과 가게마다 다 쓴 종이박스의 배출량도 늘어났다. 그렇지만 젊고 부유한 소비자들은 폐품의 배출과 처리에 대한 책임을 느끼진 않는다. 그들은 종류에 따라 '분리수거'를 하면 자신의 책임을 완수했다고 여긴다. 게다가 종이박스가 늘어나면, 노인들이 수집할 것도 생기니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소비자가 노인들에게 돈을 더 벌 기회를 준 게 아니다!) 무엇보다 종이박스가 골목에 쌓여 있는 데 대한 책임은 대개 정부와 위탁 청소업자에게 있다고 여긴다.(p.91~92)


- 사실 착취의 문제는 최초로 상품을 생산한 제조업자에게서 시작된다. 즉, 상품과 함께 포장재를 생산한 제조업자와 소비자에게 포장재를 처리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데, 이를 노인들이 전용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노인들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틈을 타 재활용품을 낚아채는 것이다. 즉, "기술저 진보와 기업 조직의 변화, (소비자의) 한 번 쓰고 버리는 물건을 사용하는 습관, (불완전한) 도시 당국의 쓰레기 수거 시스템, 그리고 생산자가 생산품의 처리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상황이 재활용품 수집 노인들을 존재하게 한다.(p.92)


- 폐지 가격은 "중국의 경제상황, 국제 유가, 국제 원자재 가격, 국내 경젱상황" 등을 변수로 결정되며, 제지업체의 매입 가격에서 중간업체들이 자신의 이윤을 계산하고, 최종적으로 고물상이 자신들의 이윤을 측정해 매임 가격을 결정한다. 이 과정 어디에서도 노인들의 노동 시간과 노동 강도가 고려되지 않으며, 노인들은 가장 낮은 이윤을 취하는 고물상을 찾아야 그나마 나은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구조다.(p.106~107)


- 재활용품 수집 과정에서 주요한 지점인 고물상을 이용한 지원 방안도 제기된다. 고물상은 재활용품 수집 노인을 대면할 수 있는 장소로, 실태를 조사하거나 지원할 때 주요한 포인트다. 무엇보다 노인의 수입을 보전하려는 목적에서 고안된 '최저 매입 가격의 설정'과 같은 아이디어를 현실화할 때, 고물상의 역할은 적지 않다. 그러나 고물상을 통한 '지원'은 사실상 어렵다. 고물상의 불안정한 혹은 불법적 처지 때문이다.(p.110)


- 고물상은 영업상 신고 의무가 없기에 현황을 알 수가 없다. 이 점 때문에 흔히 주장되듯 최저 매입 가격을 통해 오인들로부터 '재활용품을 구매'하는 일은 요원하다. 폐지를 비롯한 재활용품의 가격 산정 과정은 '시장 논리'라는 수사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으며, 더욱이 재활용품 수집 노인들의 노동 조건과 환경이 비제도적이기 때문인지 자세히 파악된 바가 없다. 그저 재활용품 수집은 불로소득이거나 간헐적인 취미 혹은 운동 거리가 아닌, 소득이 있는 비공식적인 노동이며, 이 일은 제도와 재활용 산업의 먹이사슬 끝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위험한 직업이라는 점이 확인될 뿐이다.(p.111~112)


- 지금의 젊은 사람들은 가난한 노인들에 대해 '열심히 살지 않은 젊은 날의 결과'라거나 '부양해줄 자녀와의 어떤 문제'가 있어 저렇게 사는 사람이라고 단언하고 만다. "역시 가난한 노이들은 가난한 이유가 있어."라며 혀를 차기도 한다. 그렇지만 노인들의 삶이 순전히 개인의 잘못 때문에 생겨나는 걸까? 가난하고 싶어 가난해진 사람은 없다.(p.126~127)


- 노인들은 이제 노화로 인해 청년과 중장년층에 비해 제한적으로밖에 활동할 수 없는 신체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가족 간의 문제, 개인적인 실책 등으로 돌이킬 수 없는 재정난에 처한 사람도 있다. 이들이 죽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 아니 살아남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치열하게 '끝없는 노오력'을 해야 한다.(p.131)


- 거리에서, 골목에서 만난 노인들은 이외에도 말 못 할 사연들을 숨기며 일을 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기초생활수급자로, 또 다른 이는 공적 연금을 받으면서, 또 누군가는 아무 지원을 받지 못하면서. 그렇지만 급격한 변화에서 낙후된 존재가 되어버린 그녀들이 그대로 '일'을 접으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한국사회에서 '낡고' '오래된' 산업과 그 종사자들에 대한 태도는 늘 냉혹하다. 노인들은 사회적 쓸모가 없는 존재이기만 한 걸까?(p.135)


- 노인들은 재활용품을 수집하고 있지만, 이들은 '청소부'가 아니다. 버려진 것들을 주워 돈을 벌지만, 그 돈은 쓰레기를 버린 이들이 주는 게 아니다. 노인들의 행위는 같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청소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게 아니라, 재활용 산업에서 발생하는 돈 일부를 스스로 취하고 있을 뿐이다.(p.207)


- 우리는 누군가의 가난을 보며 사회 체제의 불안정함과 미비함을 깨닫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깨달음은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이 아니라 스스로의 상대적 안정감을 확신하고 불안정에 대한 두려움을 상기하는 것으로 이어질 따름이다. (중략)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데 머물지 말고 '사회'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이 담겨 있는 듯도 하다.(p.209)


- 노인들이 일하는 모습을 살펴보면, 주민센터에서 안전조끼와 같은 형식적인 안정용구를 제공하긴 했지만, 달리는 차량이라는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거나, 뙤약볕 아래서 마땅히 해를 가릴 것도 없이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만약 정부에서 이 사업들을 마땅한 '일자리'라 여긴다면, (노동자의 자격 조건을 논하기 전에)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을 갖춰야 하는 건 아닐까?(p.228)


-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노인들은 (정부의 지원을 최소한으로 받으며 혹은 받지 않으며) 스스로 살아나갈 길을 찾고 있다고, 자립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까? 노인들이 취로사업과 노인일자리사업과 재활용품 수집 일을 하고 있으니 '자립' 했다며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될 상태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일은 노인들 대부분의 신체적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며, 노인들은 어떤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보호받을 방법이 없다. 게다가 이 일은 경쟁을 기반으로 작동하며, 노인들의 노력이 아니라 산업의 이윤에 따라 노인이 버는 돈의 액수가 바뀐다. 이런 상태를 '자립'이라 말할 수 있을까? 게다가 재활용품 수집 노인 중 상당수는 가난으로 고립되어 있다. 여기에는 국가와 이웃들이 접근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노인들과 지역사회가 상호 의존하는 계기들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근근이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자립보다, 함께 모여 서로에 게 의존하는 자립이 필요하다.(p.228~229)


 -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업사이클링 거점을 통해 폐플라스틱의 수거율을 높이는 방식은 재활용품 수집 노인의 대책에 시사점을 준다. 지역에 거점을 마련해 수집인이자 이용자로 노인과 관계를 맺는 건 어떨까? 지역의 업사이클링 거점이 노인들에게 일정한 거래처가 되며, 거점에서 노인들에게 노동량을 적정 수준으로 제한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재활용품 가격 산정에 있어, 지역사회가 업사이클링을 하며 그 가치에 따라 새로운 매입 가격을 매길 필요 역시 존재한다. 게다가 노인들의 고용 형태 역시 전일제 고용과 같은 형태보다 느슨한 형태의 노동으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p.237~238)


- 노인들은 제멋대로인 불청객이기만 할까? 아니다, 노인들은 법을 어기지 않았다. 왜냐면 노인들은 법에 따라 차도서 리어카를 끌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로교통법>은 리어카를 사람의 힘으로 운전되는 차('차마')로 보았고, 이에 따라 리어카가 인도 위를 통행하는 일은 불법으로 간주한다. 이런 사정을 이해한다면, 노인들을 탓할 게 아니라 노인이 차도 위로 걷게 하는 법을 시정하자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p.265)


- 한 강의에서 만난 노인들은 말했다. 자신들의 "삶은 끝없이 변하는 세상에 적응해왔고, 죽는다는 게 행복한 일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마지막으로 세상에 적응하는 일이 아니겠냐."라고.(p.267)


- 그녀는 늘 열심히 살았다. 풍족했던 젊은 시절엔 자녀들을 잘 키워보겠다며, 나이 든 지금엔 자신을 스스로 건사해보겠다며 말이다. 그녀의 노력은 언제 끝나게 되는 걸까, 이 질문 앞에 설 때마다 아득한 기분이 든다.(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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