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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Feb 14. 2023

빈곤에 연대하는 사람들

책,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 왔는가>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 왔는가
(조문영/ 21세기 북스/ 1판 1쇄/ 2019.06.10)

- 빈곤에 연대하는 사람들 -



'빈곤'은 어떤 모습일까? 어떤 모양일까? 여러 모습이 떠오른다. 배고픔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모습, 지하철 어디에선가 노숙을 하는 모습, 판자촌에서 사는 모습, 쓰레기통을 뒤지며 고물상에 팔 수 있는 모습 등이다. 지금 당장 내 눈앞에는 없지만,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을 듯한 모습이다. 실제로 이들은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다.


한편, 저 모습들에서 한 가지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바로 혼자라는 점이다. 배고픔과 굶주림을 나누는 사람은 없다. 지하철에서 이불과 베개를 공유하며 함께 노숙하는 사람은 없다. 쓰레기통을 함께 뒤지며 고물을 나누는 사람은 없다. 이들 모두 개별적으로 가난 속에 살고 있다. 이런 모습은 가난과 빈곤이 그들 '개인'의 문제로 보이게 한다. 개인 문제는 개인이 해결해야 한다. 개인의 문제에 내가 나설 필요는 없다. 나서서도 안 된다. 빈곤과 가난을 위한 연대가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


책,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 왔는가>는 빈곤은 개인이 아닌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에 연대해야 한다고 말하고, 실제로 연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연대하는 방법과 사람들은 다양하다. 철거민, 장애인, 소상공인, 홈리스 등이다. 저마다의 문제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연대하고, 해결하고 있다. 성과도 있다.


각자의 문제가 다르고, 연대 방식이 다르지만 이들이 연대하는 이유는 같다. 이 문제가 오로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이고, 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공통적으로 말하는 건, 이들을 직접 보지 않고 보이는 대로만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각자의 어려움은 사실 각자의 어려움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책 속에 적혀 있는 인터뷰를 보면, 어떤 구조적 문제가 있는지, 왜 이들이 연대할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누군가의 빈곤을 볼 때, 그 사람 개인만 보는 게 아니라 그들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는 없었는지 파악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그 구조를 따라가다 보면, 왜 그들이 연대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세상에 어느 혼자서 만들어 낸 문제란 없는 것 같다. 특히 사회문제는 더욱 그렇다. 문제가 사회적인 게 되는 순간 그 문제는 어느 개인의 문제도 아니게 되고,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게 된다. 많은 사람의 문제이고,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다. 빈곤이 그렇고, 그렇기 때문에 연대가 필요하다.


밑줄

- "이 세계에서 의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는 점에서, '의존'은 '자립'의 반대말이 아니라 서로의 자리와 역할을 챙겨주는 과정이다. (p.13)


-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 뭐 대여섯 명 죽은 것보다 단군 이래 최대의 개발 사업이 무너진 게 더 참사인 거죠. 그들에게는…….(p.33)


- 이들이 처한 문제가 결국은 나의 문제와 어떻게 만나고 연결이 되는지, 이런 지점을 고민하고 그런 요구들을 해나가는 게 제가 생각하는 연대인 것 같아요.(p.41)


- 단순히 세입자라는 이름으로 외친 연대란 이들을 하나로 엮기에 역부족이었다. 상가 세입자와 주거 세입자가 강제 철거에 대한 저항의식 하나로 뭉쳤다 해도, 그 저항의 단면에는 각각의 이해관계가 개입되기 때문이다.(p.46)


- 1999년 제정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기존의 생활보호제도에서 진일보한 것으로, '모든 가난한 국민에게 최저 생계를 보장한다'는 것을 법의 이념으로 삼고 있다.(p.57)


- 약자성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이 사람이 가진 개인적인 특질을 집단 전체로 덮어씌울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 자체가 약자에 대한 사회의 태도예요. 예를 들어 서울역에서 다양한 노숙인들이 있지만 그중 한 명만 술에 취해 있어도 "역시 노숙인들은 다 술을 먹는다."라고 하거나, 한 명만 싸워도 "저 사람들 저래서 안 돼."라고 이야기하죠. (중략) 사실 가난한 사람들의 현재 모습만을 보고 그 사람 전체를 알 수는 없어요. 이 사람이 지금까지 어떤 일들을 겪어왔는지, 어떤 실패와 성공을 경험했는지, 무엇이 이 사람의 장점이고 욕구인지 이런 것들을 알 수가 없잖아요.(p.68)


- 실제로 제도가 빈민의 상황을 가려요. 기초생활수급자 내에서 근로능력 유무를 갈라 근로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수급자에게는 주어진 일자리에 참여해야 급여를 주겠다고 하죠. 일자리를 주고 난 뒤에도, 이 일에 의존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서 3년 이상은 참여하지 못하게 해요. 그런데 수급자 개인들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현재 그 일을 하기 적당한 상황이 아닌데 특정 일자리르 강요받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그 일을 계속하고 싶은데 '이 특정 일자리에만 의존하고 있으니 문제라며 무조건 (제도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통보받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면서 전자는 일을 하기 싫어한다, 후자는 주어진 일에만 의존한다는 혐의를 받는 거예요. 그러니 사람들의 인식 때문만이 아니라 제도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적극적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에요. 부양의무자 기준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들은 가족을 얼마나 책임질 수 있나요? 부양의무자가 자기 소득의 30퍼센트 수준의 부양을 책임져야 한다고 법으로 강제하고 있는데 이건 말이 안 되죠. 평균임금을 받는 노동자나 중산층 다수도 이렇게 할 수 없잖아요. 이 역시 '빈곤층은 사회에 의존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거예요. 이런 제도를 변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해요.(p.68~69)


- 예를 들어 전장연에서 탈시설을 계속 얘기히고 있지만, 탈시설화된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에 대해 확실하게 말을 하긴 어렵잖아요. 지금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완벽하게 설명하긴 어려운 거예요. '빈곤 없는 세상'도 비슷해요. 빈곤이 철폐된 세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긍정형으로 문장을 만들어 이야기하기는 너무 어렵고, "그것을 향해서 계속 나아간다."라고 이야기하면서 과정을 통해 다가가는 거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최소한 사람들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죽음을 결심하는 사회는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최근 건강 관련 설문조사에서 암이 발생했을 때 어떤 점이 가장 걱정되냐고 물어보면, '죽을까 봐 걱정된다.'는 대답보다 '가족들이 가난에 빠질까 봐 걱정된다.'는 대답이 더 높게 나온다고 해요. 적어도 그런 상황은 잘못되었다고 봐요.(p.74)


- TV에 등장하는 기구한 사연의 약자는 불쌍하지만, 구조적 불평등을 비판하며 자신의 권리를 외치는 사회적 약자들은 '생떼'를 쓰는 존재다. 그들이 경험한 삶의 맥락과 조건은 중요하지 않다. 내 삶의 고단함에 대한 분노는 약자에게 향한다.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신자유주의보다 소수자의 의존성을 무임승차라 일컬으며 분노한다.(p.77)


- "'의존'은 일종의 속박, 굴레의 형태로 여겨지며, 자유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라는 제임스 퍼거슨의 지적은 이러한 현실을 간파한 것이다. 의존하고 연대하는 공동체의 부재가 당연한 사회에서는 차별과 고통은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된다. 어떻게든 적응하고 노력하는 것만이 능사인 것이다.(p.77)


- 타인의 '무음승차'를 노여워하며 빗장을 걸어 잠그는 오늘날 우리의 '사회'를 돌아보았다. '사회'라는 낱말은 난무하지만 한편에서는 '사회 바깥'의 존재들에게 연일 참상이 닥쳐온다. 열악한 작업장에서 목숨을 잃은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 생존권을 부르짖으며 분신한 택시 기사, 고시원에서 발생한 화재로 참혹한 죽음을 맞은 일용직 노동자……. 우리가 그들의 삶과 관계를 맺지 않는 한, 우리의 사회 안에 그들이 발붙일 자리는 없다. 우리가 같은 사회에 속해 있다는 전제조차 없다면, 과연 사회적 보호란 무슨 의미일까?(p.115)


- 헌법에 명시된, 현대사회의 자유로운 시민들은 모두가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권리의 언어는 모두 다르고 다양한 방식으로 발현된다. 전북 익산에서 단체로 버스를 타고 올라와 쌀값투쟁 시위를 하는 농민들의 이야기도, 서울 강서구에서 특수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는 주민들의 이야기도 모두 권리의 언어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그것이 미치는 사회적 파급력이나 실제 해결되는 정도를 살펴보면 우리는 모두 권리의 언어가 동등한 무게를 가지고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더욱이 평등한 테이블은 명분적 평등을 만듦으로써 내재된 불평등을 더욱 비가시화할 수 있다는 염려 또한 존재한다.(p.146~147)


- 각기 다른 위치에 발 딛고 서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연대란 완전히 일치와 공감이라기보다는 타인과 나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차이를 함께 마주하며 공감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p.174)


-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 많은 조건들 중에서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부의 상실은 곧 인간관계의 상실로 연결된다.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초적인 경제적 자본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면 그동안 쌓아왔던 직업적 지위들과, 그것이 떠받치고 있던 많은 사회적 관계들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때로 생존의 위협을 의미한다.(p.197)


-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물질적인 후원은 되갚을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강자에 대해 존경심을 갖도록, 혹은 복종을 하도록 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마치 모두가 그러한 베풂에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후원의 자비로운 측면만 강조되는 일방적인 도움은 약자가 목소리를 내고 싶은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하게 만들고, 외부의 정해진 틀 속에서 제약이 가해지는 것을 비가시화한다. (p.202)


- 당시 지하철 9호선 건설이 한창이었는데 거기에 홈리스 당사자를 보내면서 다른 색깔의 모자를 쓰게 했어요. 현장에서는 "어이, 노숙자 아저씨." 이렇게 되는 거죠. 또 누구나 건설 일용직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체력이나 경험, 과거 경력 등 여러 문제가 고려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보니 이탈률이 굉장히 높았어요. 적성이나 체력에 맞지 않는 데다 차별이 만연한 건데, 결국엔 그게 또 '아, 쟤네들은 안 된다', '결국 못 버틴다' 이렇게 화살이 거꾸로 돌아오는 거죠. 빨리빨리 사회 복귀, 자립, 자활시켜서 되돌려 보내려고 하는 그런 성급함은 홈리스에 대한 불안정으로부터 출발한 조급증 아니었나 생각해요.(p.227)


-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사실상 자본주의를 온전하게 거부하는 중증 장애인의 신체라고 하는 건, 가난이라는 것과 가장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p.257)


- 각자도생 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노동할 수 없는 신체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가난의 필연적인 조건이 된다. 소비자, 노동자, 자본가 등으로 지금의 사회 체계에 참여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장애 신체는 사회 밖으로 점점 밀려난다. 장애 신체의 소외 현상에 관한 한연구는 신자유주의 시대, 인간의 가치는 국제적 소비자 문화 안에서의 상대적인 효용성으로 측정된다고 분석한다. 특정 신체들만 입장할 수 있는 자본주의 시장이 구축된다는 것이다.(p.267)


- 노동하는 신체와 노동할 수 없는 신체, 돌봄을 베푸는 자와 돌봄을 받는 자 사이의 간극은 어떻게 해소되어야 할까? 한 명의 활동가는 이 이분된 존재 사이의 간극은 세상이 비장애인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임을 강조한다. 세상은 재설계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휠체어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은 키가 작은 어린아이도 지나갈 수 있고, 무릎이 아픈 노인도 지나갈 수 있고, 유모차도 지나갈 수 있다. 한국 장애운동의 큰 쾌거 중 하나는 모든 지하철에 승강기를 설치한 것이다.(p.269)


- 공동체의 붕괴라고 생각해요. 사실 빈곤을 정의 내리기는 쉽지 않죠. 상대적 빈곤, 절대적 빈곤, 사회적 빈곤, 다양한 개념이 있지만 단지 낮은 소득만이 문제는 아니에요. 그전에는 그랬는데, 요즘의 빈곤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아요. 사람들이 심리적으로도 고립되고 사회가 붕괴가 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해요. 빈곤은 이제 정서적, 문화적 현상으로까지 번져가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분사의 김천마을처럼 빈곤을 상품화하는 세상이 되었죠. 자본이 침투하지 않는 데가 없어요. 여하튼 빈곤은 아프지만 드러내야 해요. 그래야 진단과 치료가 가능해요. (p.290)


- "역설적이지만, 철거민과 노점상은 누군가 죽어야만 사회적으로 관심을 받게 된다. 그 관심이란 것도 대부분 '동정'에 가려져 좀 더 구조적인 문제는 비정한 사회 탓으로 돌려지거나, 신파적 결론을 끝으로 대중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왜 결국 누군가 희생을 당하고서야 뒤늦게 수습하려 드는가? '다 필요 없다'는 유가족의 절규가 귓가에 쟁쟁하다.(p.295)


- 한숨을 푹 쉬시면서 "너 이런 거 반대하는 활동 하는 이유 다 안다. 그런데 네가 진짜 이런 제도를 바꾸고 싶으면 (공부해서 나중에) 이런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시는 거예요. 그 순간엔 그 말에 너무 공감했어요. 그래서 후기를 인터넷에 올리면서 선생님 이야기에 공감했고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섰더니, 한 친구가 이런 내용으로 답글을 달았어요. "선생님 이야기처럼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바꿔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바꾸려고 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 당사자이기 때문에 그걸 바꿀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 있다. 꼭 높은 사람이 되어야지만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그걸 보고 또 깨우친 거예요. 아, 이 말이 더 맞다. 누가 바꿔주길 기대하는 것보다 내가 조금이라도 뭔가 하는 게 맞는 거구나. 선생님이 나한테 거짓말했구나 생각했어요.(p.316)


- 잠깐 빌리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건물의 가치를 올리는 사람은 결국 임차인이잖아요. 건물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열심히 그 상권을 이루고 그 가게를 일궈나가는 사람의 권리가 중요하고 그 권리를 인정받도록 하는 활동을 하는 거죠.(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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