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작인가...?
오늘 다룰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 17>입니다.
영화 줄거리 관련 스포가 포함되어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일단 흥행 성적을 볼까요?
글을 쓰고 있는 오늘 4월 5일 기준, 국내 누적 관람객 수는 2,983,458명...
3백만 명이 채 안됩니다. 내는 작품마다 오백만, 천만을 거뜬히 넘기는 봉준호 감독의 작품인 것을 감안하면 조촐하죠.
전 세계 시장을 봤을 땐 어떨까요? 총수입 기준 1.2억 달러를 조금 넘긴 수준입니다. 북미 박스 오피스에서는 2주간 1위를 기록했죠. 그 외에도 개봉 첫 주에는 많은 기대와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여러 국가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다만 이러한 추세가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한 듯합니다.
전작 <기생충>의 경우 어땠을까요? 관객 수 천만을 넘긴 것은 물론 전 세계 수익 또한 3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봉준호를 본격적으로 해외 관객들에게 알리기 시작한 작품인 <설국열차>는 어땠을까요? 전 세계 기준 총수익 원화 기준 약 922억을 기록했습니다. 요즘의 미친 환율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6,400만 달러를 조금 넘는 수준인데 당시 제작비, 봉준호 감독의 인지도 등을 고려하면 절대 나쁜 성적이 아닙니다.
즉,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미키 17>은 고전하고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실제 관람객들의 평 또한 극명하게 나뉘지요. 생각보다 혹평이 많습니다.
온라인 의견들을 살펴보면 해외 관객의 경우 봉준호의 영화를 <기생충>으로 처음 접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렇다 보니 유사한 느낌의 영화를 기대했었고, <기생충> 이전의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모르는 상황에서 봐서 재미가 없을 뿐이지 사실 <미키 17> 또한 매우 봉준호스러운 작품이고 괜찮다는 의견도 비교적 많았습니다.
좀 늦은 감이 있긴 했지만 극장으로 달려가 직접 봤습니다.
상영관이 그새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어쨌든 상영관은 거의 가득 차 있더군요.
'정말 망작일까?'라는 궁금증을 안은 채 유심히 봤습니다. 왜 상대적으로 혹평이 많은 작품일까 궁금했습니다.
제 결론은 이렇습니다. '망작'까지는 아니지만 봉준호 감독임을 감안했을 때 개인적으로 실망스럽긴 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지극히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제게는 왜 실망스러웠는지 설명해 보겠습니다.
라디오 프로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매주 진행되는 코너 중 '김세윤의 영화음악'이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김세윤 영화평론가를 모셔서 최근 개봉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해당 영화에 등장하는 음악을 들어보는 코너인데 상당히 재밌게 즐겨 듣는 코너입니다. 김세윤 영화평론가님의 통찰력 또한 뛰어나지요. <미키 17>을 다루기도 했었는데 김세윤 영화 평론가는 <기생충>과는 다른 면이 있고 오히려 <설국열차>와 <옥자> 그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 영화다라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매우 정확한 평가였습니다.
다만, 이 두 작품보다는 못 한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한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눠서 얘기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목적의식이 명확하지 않고 약하다.
봉준호 감독의 거의 모든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핵심 주제는 <미키 17>에서도 동일하게 다루어집니다. 계급 간의 충돌, 계급사회의 부조리,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현대사회, 노동계급에 대한 소모품화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인공 미키가 이러한 주제의식을 내포하고 있죠. 빚에 허덕이는 최하층민 출신이 현실 탈피를 위해 Expendable (말 그대로 소모품, 소모되는) 프로그램에 가입을 하게 되고 인류가 새로운 행성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온갖 위험한 상황에 실험 대상으로 먼저 노출되는 캐릭터입니다. '인간 프린팅' 기술이 개발되어 미키가 죽더라도 바로 다시 인쇄해 계속해서 미키를 '소모'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 과정을 거듭하며 어느덧 17번째 미키가 인쇄되었고 이 17번째 미키가 영화의 주인공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근데 미키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확히 뭐를 이루고자 하는지, 뭐를 지켜내고자 하는지, 목적의식이 흐릿하고 뒤엉켜 있습니다.
가령 <설국열차>를 보자면 기본적인 전제의 틀은 <미키 17>과 비슷한데 (계급 간의 충돌과 부조리) 몰입도가 더 높았던 이유는 주인공이 꼬리칸에서 머리칸까지 이동해야 한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었습니다.
반면 <미키 17>에서의 미키는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영화 내내 무력한 상태로 여러 상황에 노출되다가 연속적인 우연을 거듭하다 보면 영화는 어느덧 해피엔딩에 와 있습니다. 개운하지 못한 전개인 거죠. 얼떨결에 본인이 아직 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쇄되어 버린 미키 18번을 제거한다는 것이라던가, 여자친구를 지켜내는 것이라던가, 아니면 빌런인 마샬 부부를 제거하는 것이라던가 이런 목적이 없습니다. 그저 놓인 상황 속에서 미키는 이리저리 떠내려 가다가 결말에 다다른다는 느낌일 뿐. 이 또한 사실은 봉준호 감독이 의도한 것일 수도 있겠죠. 무력하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최하층 계급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두 번째 이유, 스토리의 이음새가 엉성하고 그로 인해 등장인물에 대한 몰입도가 낮다.
뚜렷한 목적의식의 부재와도 연결되는 부분인데 목적이 뚜렷하지 않다 보니 스토리의 전개도 엉성하고 허무합니다. 미키 17과 18 간의 갈등이 고조되는 듯하더니 갑자기 둘이 팀워크를 발휘하고, 그러는가 싶더니 18번이 갑자기 자살폭탄 작전으로 다소 허무하게 빌런과 함께 죽음을 택합니다. 봉준호 감독이라면 아마 촬영해 놓은 장면이 훨씬 많았을 테고 그 장면들이 영화에도 담겼더라면 이러한 문제를 해소할 수 있었을 텐데 러닝타임을 고려하여 제작사인 워너브라더스의 개입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을 해봅니다. 스토리 전개상 잘려나간 부분이 상당히 많아 보였고 그렇다 보니 등장인물의 서사에도 몰입이 되지 않고 공감이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주인공 미키가 충분히 불쌍한 것은 알겠는데 그가 어쩌다가 소모품이 되는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서사가 부족하기도 했었고, 미키 17과 18간의 성향과 성격이 매우 다른데 이것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도 없으며, 빌런 부부인 마셜과 이파에 괴기한 행동패턴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정보가 부재하다 보니 몰입이 되지를 않습니다. 나샤와 카이 같은 미키의 주면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미키 17과 18을 중심으로 하여 나샤와 카입을 동원한 막장 치정극 비슷하게 갔더라면 전개가 자연스럽고 몰입도도 높고 이도저도 아니면 봉준호 감독 특유의 익살스러움으로 이 스토리를 전개시켰더라면 웃음 포인트라도 제고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기대했던 스티븐 연의 활약 또한 빛을 발하지 못한 게 영화 내내 스티븐 연이 맡은 티모라는 캐릭터 또한 겉돌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연기 디렉팅과 방향성 측면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배우들이 연기를 못했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각 배우의 연기는 훌륭합니다. 다만, 뭔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런웨이를 활보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전체 등장인물의 밸런스 측면에서 먼저 보겠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많이 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상당한 익살스러움을 추구하는 감독입니다. 대사량도 많은 편이고 배우들이 주고받는 티키타카가 완성될 때 비로소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완성되는 느낌이죠.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과 비슷...)
이전 작품들을 한 번 떠올려 보시죠. <기생충>, <괴물>, <JSA>, <살인의 추억> 등등...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오래 회자되는 명대사들이 정말 많이 등장했습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등장인물들 간의 소통 템포가 빠른 편이고, 이와 더불어 톤(tone)과 피치(pitch)가 높은 편입니다. 송강호 배우가 봉준호 감독의 페르소나인 이유가 여기 있지요. 목소리 톤부터가 익살스럽고 재밌습니다. 다른 배우들과 치고받고 하는 연기 또한 월드클래스 급이죠.
그리고 송강호 배우가 봉준호 감독의 작품에서 유난히 더 빛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제가 생각했을 때는 송강호 배우의 tone을 중화시켜 주는 상대 배우가 항상 있었기 때문입니다. <JSA> 이병헌, <괴물> 박해일과 배두나, <기생충> 이선균, <살인의 추억> 김상경 등... Tone과 pitch의 대비 속에서 배우들 간의 상호작용이 폭발하는 듯한 느낌이죠.
<미키 17>에서는 이러한 밸런스가 부족합니다. 미키를 연기한 로버트 패틴슨은 그동안 출연한 영화와 맡아온 배역 때문에 많이들 간과하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바로 미국 배우가 아니라 영국 배우라는 점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로버트 패틴슨의 작품 중 거의 유일하게 본인 본연의 영국 발음으로 연기를 했던 작품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테넷>이었습니다.
<미키 17>에서도 로버트 패틴슨은 미국 발음을 고수하죠. 그냥 미국 발음도 아니고 흔히 'hilly billiy'라고 칭하기도 하는, 미국 남부 촌뜨기를 연상시키는 억양과 매우 가늘고 음역대가 높은 high tone으로 연기를 합니다. 약간은 송강호 배우의 톤을 연상시킬 정도죠. 문제는 밸런스를 잡아 주는 상대 배우가 없습니다. 모든 배우들이 하이톤, 하이텐션, 하이피치로 영화 내내 소리를 지르다 끝나는 느낌을 줍니다.
이건 <설국열차>에서도 느꼈던 부분이기도 한데 뭔가 한국의 정서를 서양 배우들에게 그대로 복붙 하다 보니 약간은 부자연스러워지는 부작용이 드러나는 현상이죠. 그나마 <설국열차>에서는 크리스 에반스가 워낙 묵직했고, 틸다 스윈튼의 연기도 훌륭했으며 그 외 선천적으로 묵직함이 묻어 나는 배우들이 많았었기에 영화가 방방 뜨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미키 17>은 너무 방방 떠 있습니다. 배우들이 분명 영어로 대사를 하는데 톤은 술 취해서 지하철 1호선에서 고성방가 하는 한국인 아저씨 톤입니다. 영화 내내 모든 배우들이 이렇게 텐션과 톤이 높으면 귀가 지치죠. 류승완 감독의 <밀수>를 보고도 비슷한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김혜수, 염정아 배우들을 중심으로 한 high tone, high tension 대사가 2시간 내내 이어지고 조인성 배우가 이를 중화시키기에는 목소리 자체가 워낙 미성인지라 영화는 너무 재밌고 훌륭했는데 정말 '시끄럽다'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나중에는 조금 힘들었습니다.
빌런 마샬과 이파 부부 또한 우스꽝스러운 사이비 교주 부부를 연상시키는데 그 정서가 너무나도 한국스럽습니다. 전광훈, 정명석, 신천지, 그 외 최근 계엄사태로 인해 드러난 극우 사이비들의 언행을 많이 벤치마킹한 듯합니다. 이들 또한 전반적으로 방방 뜨죠. 모든 게 오버스럽고... 그 정서 자체가 잘못 됐다는 것은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그 또한 한국의 '문화'인 셈이지요... 문제는 이거를 서양인에게 그대로 응용해 버리니 다소 부자연스럽고, 우스꽝스럽기만 하고 별로 무섭지가 않습니다. 무슨 말과 행동을 하던 위협스럽게 다가오지를 않습니다. 최근 본 작품 중에 '서양식' 사이비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한 작품은 Apple TV 시리즈인 <세브란스>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좀 더 묵직하고, 비밀스럽고, 공포스럽고, 소름까지 끼치는 느낌을 주는데 그런 정서를 <미키 17>의 빌런들에게 장착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차라리 로버트 패틴슨에게도 그냥 영국 발음으로, 본인의 원래 톤으로 연기를 디렉팅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거기에 좀 더 투박한 억양과 표현들만 더한다면 충분히 하층 계급을 효과적으로 표현해 냈을 텐데 말입니다. (예를 들면 Netflix 시리즈 Peaky Blinders나 The Gentlmen에 등장하는 버밍엄 또는 남부 런던 억양을 장착시키는...)
번외로 최근 우연히 마크 러팔로가 Jimmy Fallon 토크쇼에 출연하여 <미키 17>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을 보았는데 3년 전 마샬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할 당시 '세상에 뭐 이런 돌아이 캐릭터가 다 있지? 너무 비현실적인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영화가 개봉을 할 때가 되니 이미 현실 속에 그러한 캐릭터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직접적으로 언급은 안 했지만 누가 봐도 트럼프 대통령을 빗댄 듯한 인터뷰를 했는데 상당히 웃겼습니다. ㅋㅋㅋㅋ 그러고 보니 두 빌런 부부를 보고 있자면 우리나라에도 있는 윤 모씨와 김 모씨 부부를 연상시키기도 하죠. 3년 전이면 이미 두 사람이 충분히 언론에 노출되고 나대던 시기인지라 봉준호 감독도 이들을 벤치마킹 하여 연기 디렉팅을 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정리를 해보자면 <미키 17>, 저는 상당히 아쉬웠습니다.
봉준호 감독만의 잘못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모든 작품이 명작일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래도 저는 여전히 봉준호 감독의 차기작을 기대하며 기다릴 것입니다.
비교적 타율이 낮은 <미키 17> 조차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입니다.
주차난으로 인해 영화 첫 10분가량을 놓쳤는데 또 모르죠, 그 10분을 놓치지 않고 봤더라면 제가 아쉽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일정 부분 해소 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럼 오늘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Till next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