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 Jul 13. 2020

폭력과 방관의 악순환

기시감에 기대어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

증국상 감독이 돌아왔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로 섬세하게 소녀시절에서 성인기에 이르는 여성들의 우정을 그려낸 그가 이번에는 학교폭력을 소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홍콩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었다는 소식보다도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를 만들었던 감독이 돌아왔다는 점과 주연이었던 주동우가 다시금 주연을 맡았다는 소식에 <소년시절의 너>를 보았다. 영화의 말미에 괴롭힘 방지법이 개정되었다는 자막이 있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가가 궁금해져 검색해 보았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말은 있지만 어디까지 참고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소년시절의 너>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이유는 플롯이 상당히 상투적이기 때문이다. 괴롭힘당하는 여자아이를 구해주는 (잘생기고 종종 부잣집 아들인) 양아치 소년의 이야기는 굳이 기존 영화작품이나 소설까지 가지 않아도 수많은 인터넷 소설에서도 상당히 흔한 소재다. 학교폭력이라는 사회적인 의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상투성 탓에 <소년시절의 너>는 플롯 전체가 기시감을 안고 불리한 지점에 선다. 실제 영화의 모티프가 된 사건이나 실화가 어디까지 영화에 반영되었는지 관객은 알 수 없지만, 캐릭터 설정부터 전형적이기에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살펴보자면 공부를 잘 하는 첸니엔(주동우 분)은 편부모 가정이고 어머니는 다단계로 추정되는 일을 하느라 빚쟁이에게 시달린다. 솔직히 첸니엔 설정만 보면 <꽃보다 남자> 속 츠쿠시가 떠오른다. 부잣집 딸인 라오 웨이는 괴롭히던 후 샤오디에가 자살하자 첸니엔을 괴롭히기 시작하고 출신을 알 수 없는 길거리 양아치 샤오 베이(이양천새 분)가 등장하여 첸니엔을 돕는다. 본 영화의 다른 점이 학교 폭력이라는 의제라고 이야기했지만, <꽃보다 남자>도 국내판 방영 당시에 주인공 금잔디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묘사 정도가 지나치다고 논의된 적이 있기는 하다.



영화가 중반부에 접어들기 전까지는 사실 이러한 기시감이 잘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후 샤오디에의 자살로 이야기가 시작하기 때문이다. 후 샤오디에와 첸니엔의 사이가 어땠는지 영화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첸니엔은 후 샤오디에의 시체에 자신의 겉옷을 덮어준 후 교무실로 불려간다. 경찰이 와서 수사를 시작하고 후 샤오디에를 괴롭혔던 라오 웨이와 그 일당은 첸니엔이 경찰에 자신들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이라 추측하고 이제 그 폭력의 고리를 첸니엔에게로 옮겨간다. 이는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이 그 대상이 사라진다고 해서 폭력성도 함께 해소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첸니엔은 이들로부터 도망치다 못해 맞서기 위해 새로운 폭력으로 자신을 무장한다. 첸니엔의 캐릭터는 깡마르고 체구가 작은 주동우와 만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여자아이로 그려지는데 사실 첸니엔은 끊임없이 후 샤오디에의 죽음에 대해 자책하는 인물인 동시에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자 하는 입체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이는 후 샤오디에에게 가해지던 학교폭력을 방관했던 첸니엔에게 그 폭력의 순환이 도달했기 때문인데 마찬가지로 방관의 고리 또한 옮겨간다. 후 샤오디에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던 첸니엔은 거리에서 샤오 베이가 맞는 것을 보고 경찰에 신고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샤오 베이와 강제로 입맞춤을 하고서야 현장을 벗어난다. 방관자의 각성은 방관의 고리를 끊는 대신 방관자가 폭력의 대상이 되도록 하기에 폭력과 방관의 연쇄고리는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후 샤오디에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는 대신 첸니엔은 폭력으로 폭력에 맞서려 시도하고 결국 샤오 베이를 보호자로 고용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여기까지 이르는 부분도 폭력으로 짙게 물들어 있다. 학교에서 처음으로 폭행을 당하고 샤오 베이의 오토바이에 올라탄 첸니엔은 샤오 베이의 집에서 샤오 베이에게 물리적으로 제압당한다. 샤오 베이가 맞는 모습을 보고 보호자로서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던 첸니엔은 자신이 폭력을 당하고서야 능력치가 낮은 보호자라도 필요하다는 것과 그 약한 자에게조차 자신이 약자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는 샤오 베이가 경찰서에 끌려간 사이 첸니엔이 당한 강도 높은 폭행 장면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옷을 벗기는 동영상까지 찍힌 첸니엔은 아파트 주민이 신고하겠다고 소극적인 개입을 하고서야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고 머리칼까지 잘린 첸니엔을 본 샤오 베이는 복수를 다짐하지만 첸니엔은 그를 말린다. 첸니엔은 폭력을 폭력으로 대처하는 것이 새로운 폭력을 낳을 뿐이라는 것을 뒤늦게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첸니엔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유지하던 정 형사조차 공권력을 가지고도 첸니엔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지만 첸니엔은 이제 이 악순환에서 새로운 가해자가 될 생각이 없다. 그저 대학에 가서 고리 바깥으로 빠져나가기만을 소원할 뿐이다.



폭력의 고리와 마찬가지로 방관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는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 방관자 위치를 벗어나는 순간 폭력의 고리에 끼어들어 그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폭력의 대상이 유지되는 한 방관자는 안전하게 있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첸니엔을 돕는 샤오 베이가 방관자 위치에 머무르지 않고 첸니엔의 곁에 남았던 이유는 폭력과 방관의 고리가 이어지는 주된 공간인 학교 바깥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샤오 베이가 저지르는 폭행의 결과는 샤오 베이 본인이 아닌 첸니엔에게로 향한다. 후 샤오디에의 자리는 본인이 죽고서야 새로운 대상으로 대체되었고 첸니엔의 자리 또한 마찬가지이기에 첸니엔이 이 순환을 살아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고리 자체를 떠나는 것이다. 형사들이 개입하고도 고리가 끊어지지 않는 이유 또한 형사들이 교내가 아닌 경찰서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 고리를 끊으려 들었던 첸니엔의 담임은 결국 사직하고 일시적으로 순환이 멈추기에만 기여할 뿐이다. 결국 악순환을 멈추고 새로운 순환이 시작되지 않도록 하려면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하다. 형사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은 라오 웨이를 고소할 수 없다. 첸니엔은 정 형사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 형사가 지켜야 하는 제도와 규칙을 믿지 못한다. 첸니엔은 라오 웨이가 죽고 경찰서로 불려가서도 임신한 형사에게 이런 세상에 정말 아이를 낳고 싶냐고 묻는다.


라오 웨이의 악순환은 라오 웨이가 죽고서야 끝이 났지만 그 여파는 남는다. 첸니엔은 대학 시험을 보는 도중에 경찰서에 참고인으로 불려가고 샤오 베이는 끊임없이 범인으로 지목된다. 서로를 보호하려는 첸니엔과 샤오 베이는 결국 탈출하지 못하고 불타오른 악순환의 고리가 재가 될 때까지 댓가를 치른다. 시작할 때는 방관자였던 첸니엔은 방관의 댓가를 치렀지만 너무나 가혹했고 첸니엔을 제외한 방관자들은 아무도 그 댓가를 치르지 않았기에 불공평하다. 그저 그 곳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던 첸니엔은 단순히 그 노력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끊임없이 의심받는다. 용의자이기 이전에 피해자인 첸니엔은 어째서 무결성을 주장해야 하는 것일까?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이 죽었는데 감정이 동요하지 않고 태연하게 시험을 치렀다는 것이 과연 피해자성에 상반되는 증거인가? 첸니엔은 악순환에서 힘들게 벗어났지만 발목이 잡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상업적인 선택일지는 알 수 없으나 등장인물에게 캐릭터의 상투성을 부여하여 로맨스 서사를 (그리고 종종 손발 오그라드는 대사도 함께) 추가하여 학교폭력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 증국상 감독의 의도는 아쉽기는 하지만 꽤나 성공적이다. 영화 자체의 작품성을 떠나서 중국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다만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에서 여자 아이들의 미묘한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냈던 것에 비하면 첸니엔을 제외한 여성 캐릭터들이 지나치게 평면적이다. 첸니엔조차도 새로운 폭력의 고리를 끊고자 하는 마지막 장면에서까지 샤오 베이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운 캐릭터다. 학교 폭력에서 벗어난 첸니엔이 사회에서도 폭력의 순환에서 자유로울지는 의문이다. 이 영화가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는 첸니엔이 샤오 베이와 함께 할 지언정 사회의 폭력으로부터 둘이 아직도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첸니엔은 샤오 베이와 함께하는 곳이 아니라 샤오 베이가 없어도 안전한 세상에서 해피엔딩을 맞이할 것이다.


제도적인 보완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이 세상은 많은 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에서 폭력을 다룰 때조차 폭력적이라면 폭력이 미화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소년시절의 너>는 <목소리의 형태>가 어째서 수작이었는지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증국상 감독의 다음 영화가 기다려진다.

작가의 이전글 정치는 어떻게 개인의 삶을 망치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