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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Jul 06. 2020

정치는 어떻게 개인의 삶을 망치는가

브래드 피트의 근육 너머로 보아야 할 것

2004년작 <트로이>는 개봉 당시 화려한 출연진으로 주목받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최전성기를 달리던 브래드 피트와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레골라스 역으로 상상초월의 인기를 끌었던 올랜도 블룸의 캐스팅은 그 자체만으로도 화제였다. 최근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으로 재개봉했지만 2004년 당시에는 전쟁신의 수위를 다소 낮추고 15세 관람가 등급으로 개봉했던 터라 레골라스를 다시 볼 수 있다는 10대 소녀팬들의 팬심을 적절히 자극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화려한 전쟁신과 배우들의 수려한 외모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플롯 내의 정치질이 어떻게 등장인물들의 삶을 앗아갔는지가 다시 보니 보이기 시작했다. 아킬레스(브래드 피트 분)는 정말 목숨을 잃더라도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었을까? 프리아모스 왕(피터 오툴 분)은 아킬레스의 말대로 아가멤논(브라이언 콕스 분)보다 나은 왕이었을까, 아니면 이성적인 아들 헥토르(에릭 바나 분)의 말을 듣는 대신 제사장의 말을 더 신뢰하는 우매한 정치가였을까? 브리세이스(로즈 번 분)가 선택한 사제의 삶은 정녕 자신의 선택이었을까?


영화 <트로이>를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생각보다 많다. 가장 대표적으로 트로이 목마를 아무런 의심도 없이 성 내부로 들이는 장면은 보안이 철저한 회사를 다니는 회사원의 눈에는 환장할 만한 장면이다. 하지만 트로이 목마를 들이는 장면을 자세히 보면 (디렉터스 컷에서 추가된 것인지 원래 있었던 장면인지는 불분명하다) 파리스 왕자(올랜도 블룸 분)는 목마를 들이는 것을 반대하고 태워버리자고 하고 있다. 하지만 프리아모스 왕은 헥토르 왕자의 말을 듣지 않고 제사장의 말만 믿었다가 새벽에 그리스 적진을 공격한 이후 벌어진 사건을 잊어버렸는지 다시금 제사장의 말을 믿고 트로이 목마를 트로이 성 내부로 들이고 만다. 현대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정말 신화가 되어버렸고 각종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이 장면이 상당히 허황된 것처럼 보이지만 현대 사회에도 종교는 존재하며 사이비 종교의 교주 말에 현혹되는 사람도 아직 많다. 트로이 목마를 들이는 결정을 내린 프리아모스 왕의 잘못이 더 클까, 왕에게 잘못된 조언을 한 제사장의 잘못이 더 클까. 제사장이 영화 내내 말도 안되는 얘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제사장은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일 뿐이며 결정권자는 프리아모스 왕이다. 하지만 이미 한번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도 다시 제사장의 말을 신임하는 프리아모스 왕을 믿고 따르는 왕자들과 신하들도 잘못이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영화의 트로이 전쟁이 벌어지게 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적어도 영화 상에서는) 파리스 왕자의 헬레네(다이앤 크루거 분) 납치다.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브랜단 글리슨 분)는 트로이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했지만 명분이 없었고 그 명분을 제공해준 고마운 이(..)가 파리스다. 전쟁의 단초를 제공하고도 막상 책임을 지겠다며 아가멤논과 1:1 결투를 진행하는 와중 목숨이 위험해지자 결국 형인 헥토르에게 비겁하게 도망가는 장면 때문에 파리스가 트로이 멸망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것처럼 보여질 여지가 있다. 하지만 파리스가 아니었더라도 아가멤논은 언젠가 어떤 구실을 대고라도 트로이에 침략했을 것이다. 헬레네를 데려간 파리스는 최소한 헬레네를 진정으로 사랑했지만 아가멤논에게 헬레네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헬레네를 가(질 정도의 힘을 가)진 남자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트로피에 불과하다. 이는 아가멤논이 보고 있는 헬레네를 두고도 다른 여인들과 아무렇지 않게 몸을 섞는 파티 장면이나, 헬레네가 도망친 이후 메넬라오스에게 헬레네가 돌아오면 노예로 부려버리고 말겠다는 대사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사실 헬레네 이외에도 브리세이스 또한 주체적인 역할보다는 남성 캐릭터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트로피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16년전 영화라는 점이 고스란히 드러나 지금 시각에서는 아쉽다. 이 부분은 차치하고 트로이 전쟁은 언젠가 메넬라오스와 아가멤논 형제의 야욕으로 벌어질 전쟁이었지만 트로이의 젊은이들과 아킬레스를 비롯한 아가멤논 본인도 희생된다는 점에서 허무함만을 남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안타까운 죽음은 헥토르와 아킬레스의 죽음이다. 이들의 죽음은 정치에 의한 죽음이기도 하지만 서로 혹은 서로의 혈육에 의해 죽으면서도 모두가 그 책임을 통감하고 있지만 실제 이들이 죽게 만든 위정자들에게는 그 책임감이 보이지 않기에 더욱 안타깝다. 시작은 전쟁을 이미 수없이 겪어 전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헥토르 왕자의 말을 듣는 대신 제사장을 더욱 신뢰하는 프리아모스 왕이다. 얌전히 그리스군이 돌아가도록 했으면 됐을 것을 프리아모스 왕은 제사장의 말만 듣고 새벽에 공격을 감행한다. 이 공격에서 헥토르는 아킬레스로 착각한 아킬레스의 사촌 패트로클레스를 죽이고 아킬레스의 분노를 산다. 아킬레스는 헥토르가 실수로 패트로클레스를 죽인 것이며 원래 전쟁이란 그런 것임을 알고도 헥토르를 찾아가 개인적인 복수를 감행한다. 사실 이조차도 아킬레스가 아가멤논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으로 전장에서 물러나지만 않았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그렇기에 트로이 성벽에서 홀로 헥토르를 무섭게 부르는 아킬레스의 분노는 아가멤논과 헥토르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향한 것처럼 보인다. 결국 헥토르를 쓰러트린 아킬레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끌고 막사로 돌아가지만 프리아모스 왕이 새벽에 찾아와 시신을 돌려줄 것을 부탁하자 무너진다. 그리고 헥토르의 시신을 천으로 싸며 지옥에서 곧 만나자고 중얼거린다. 아킬레스는 이 모든 것이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의 야욕 때문에 벌어진 일이고 브리세이스의 말대로 헥토르가 좋은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으며, 결국 이로 인해 트로이 전쟁이 벌어질 것도 알고 있었지만 사적인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다. 이 사건은 아킬레스와 아가멤논의 불화로 사기가 저하되었던 그리스군을 결집시키는 힘이 되었는데 이는 아킬레스가 패트로클레스의 시신을 화장하는 것을 지켜보며 중얼거리는 메넬라오스의 대사("저 아이(패트로클레스)가 우리를 살려주는군")에서 드러난다. 한편 프리아모스 왕의 슬픔은 단순히 아들을 잃은 데서 온 것일 뿐 자신의 무능함이나 무지로 인한 책임감을 통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아가멤논의 야욕에 질린 아킬레스는 프리아모스 왕에게 당신이 아가멤논보다 나은 왕이라고 말한다.



결국 욕심 넘치는 위정자(메넬라오스와 아가멤논)와 무능한 위정자(프리아모스 왕)에 의해 희생되는 것은 역량이 뛰어난 개인(헥토르와 아킬레스)이라는 점에서 <트로이>는 현대 정치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이는 동성애를 배척하는 정치인들로 인해 희생된 천재 동성애자 수학자 앨런 튜링의 삶으로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드러난 적이 있고 <굿 윌 헌팅>에서 자신이 정부에서 좋은 일을 해봤자 제3세계 어린이의 삶을 빼앗는 결과로 이어질 뿐이라는 윌 헌팅의 대사로도 표현된 바 있다. <트로이>는 수려한 외모의 배우들을 앞세운 액션영화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능하고 욕심많은 정치인들을 비꼬는 정치 영화일지도 모른다. 아가멤논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킬레스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출정했다고 하지만 정작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자 사랑했던 여인 브리세이스를 찾아나선다. 그리고 결국 브리세이스를 구하다가 아킬레스 건에 화살을 맞고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다. 어머니 테티스(줄리 크리스티 분)의 말대로 아킬레스가 트로이 전쟁에 출정하지 않았다면 아킬레스는 이름을 역사에 남기는 대신 가족을 꾸리고 삶을 가꾸어 평화롭게 살았을 것이다. 아킬레스는 역사에 기록된 위대한 전사이지만 동시에 정치가들의 욕심에 희생된 개인이기도 하다.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숀 빈 분)는 영화 초반 아킬레스를 설득하러 가면서 이타카는 약소국이기에 그리스의 출정에 따라나설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오디세우스는 전쟁에 나서기 전까지 왕인지도 모를 만큼 소박하게 강아지를 키우는 삶을 꾸리고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오디세우스 또한 전쟁에서 아킬레스라는 친구를 잃은 또 하나의 개인임을 의미한다.


이제 시선을 돌려 여성 캐릭터로 가보면 전쟁을 일으킨 여인이라는 오명 아닌 오명을 쓴 헬레네가 있고 아킬레스의 마음을 뒤흔든 브리세이스가 있다. 헬레네는 뛰어난 외모로 인해 자신의 삶을 왕가에 저당잡힌 기구한 여인이다. 왕족도 아니었고 미모가 아니었다면 헬레네 또한 평범한 삶을 살다가 죽었을 것이다. 트로이까지 소문이 날만큼 아름다운 외모는 결국 헬레네의 삶이 겨우 16세에 아가멤논에게 팔려가게 했고, 자신의 삶을 위해 사랑을 보고 트로이로 도망치자 전쟁을 일으킨 여인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만다. 하지만 영화상에서 헬레네는 자신의 잘못을 돌이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파리스가 아가멤논과 결투를 하겠다고 하자 헬레네는 결국 돌아가겠다고 하지만 헥토르는 이 전쟁이 헬레네 때문이 아닌 아가멤논의 야욕 때문임을 알았기에 헬레네를 만류한다. 브리세이스 또한 존재하지 않는 신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사제의 삶을 선택했는데 국교라서일 뿐 사실 사이비 종교에 삶을 저당잡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브리세이스가 사제가 되면서 과연 출신배경인 왕족이라는 점이 참작되지 않았을까? 아킬레스에 대한 브리세이스의 사랑은 브리세이스 또한 평범한 삶을 갈망했음을 짐작케 한다. 



화려한 액션영화 <트로이>는 볼거리로 무장한 텐트폴 무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안에 정치라는 명목으로 포장된, 욕심많은 개인들이 어떻게 다수의 삶을 희생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하지만 동시에 개인들도 자신이 이용되는 줄 알면서도 사적인 감정을 누르지 못해 결국 파국을 이끌어 낼 수 있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언뜻 헬레네를 얻고 트로이를 무사히 빠져나온 파리스가 얄미워 보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와 형을 잃은 채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무너진 트로이를 돌아본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관객은 알 수 없다.


*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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