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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Jun 29. 2020

단 한편의 백워드

창의적인 애니메이션가의 대명사가 한스텝 주춤

<온워드: 단 하루의 기적>(이하 <온워드>)은 코로나 시기만 아니었다면 꽤 높은 흥행 스코어를 올릴 만한 영화다. 아주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나름 새로운 시도들이 눈에 띄고, 마블민국에서 스파이더맨으로 유명한 톰 홀랜드와 스타로드로 유명한 크리스 프랫이 목소리 연기를 했다는 점은 굉장한 플러스 요인이다. 무엇보다 픽사의 영화가 아닌가. 몇년 전 <인사이드 아웃>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 관객이 있을 것이며, <주토피아>에 열광했던 관객도 있을 것이다. 끝난 줄 알았던 <토이 스토리>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한 <토이 스토리4>의 신선한 전개와 결말에 어딘가 아쉬우면서도 박수를 쳤던 이들도 과연 픽사이기에 이런 이야기를 선택했을 것이라 말했을 것이다. <온워드>는 이런 이야기들의 연속선상에 있으면서도 판타지 세계라는 배경을 얹어 새로움을 꾀한 영화다. 언뜻 보면 드림웍스의 <드래곤 길들이기> 시리즈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기실 <온워드>의 배경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참고한 것이라고 한다(이러한 연유로 햄버거 가게의 이름이 호빗족이 사는 마을인 샤이어에서 따온 버거 샤이어라고 한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분명 신선한 시도나 지점도 분명히 있고, 픽사답게 감동도 주지만 어딘가 아쉬웠다. 이안(톰 홀랜드 분)과 발리(크리스 프랫 분)의 감정선 변화가 급작스러운 지점이 몇 군데 눈에 띄고, 기본적으로 이안과 발리의 캐릭터성이 그다지 새롭지 않다. 너드 캐릭터로 분류되는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의 캐릭터와 모험을 좋아하고 성질이 급하지만 책임감이 강한 스타로드 피터 퀼의 캐릭터를 약간 수정하여 형제로 만든 느낌마저 나는데, 실제 발리의 조끼에 이스터 에그로 타노스의 건틀렛이 있다고 하니 마블과의 연계성을 무시할 수 없는 지경이다. 이안과 발리는 <인크레더블> 시리즈의 바이올렛과 대쉬 캐릭터를 형제로 바꾼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이올렛은 부끄러움이 많아 얼굴 반쪽을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다니고 좋아하는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가 사라져 버리지만 영화가 끝날 때 얼굴을 가렸던 머리카락을 걷고 좋아하는 아이에게 말도 건다. 대쉬는 자신의 초능력을 활용해 수업 시간에 도둑질을 하는 등 지역사회에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지만 영화 말미에는 슈퍼히어로로 거듭난다. 이는 영화 초반 친구들에게 말을 걸었다가 취소하는 이안과 역사 유적을 보존하겠다며 마을 개선 공사에서 반대 시위를 하여 잡혀오는 발리와 상당히 유사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영화 후반 이안과 발리는 마을을 구한 영웅으로 변모한다. 캐릭터 자체의 유사성은 차치하고라도 성격이 다른 두 남성 투톱 콤비 영화는 이미 헐리우드 곳곳에서 발견된다. <스타트렉> 시리즈의 짐 커크와 스팍, 톰 홀랜드의 이전 애니메이션작인 <스파이 지니어스>의 랜스와 월터,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샘과 프로도... 픽사에서만도 <라따뚜이>의 라따뚜이와 링귀니, <몬스터 주식회사>의 설리와 마이크, <토이 스토리>의 우디와 버즈 콤비가 이미 있었다. 픽사를 인수한 디즈니의 근작 중 최고 흥행작인 <겨울왕국>의 메인 콤비가 자매인 엘사와 안나라는 건 픽사에게는 고려사항이 아니었던 것일까.



영화의 메인 축이 되는 캐릭터들이 거의 남성 캐릭터들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맨티코어(옥타비아 스펜서 분)와 엄마인 로렐(줄리아 루이스 드레이퍼스 분) 콤비가 눈에 띈다. 사실 다 큰 아들 발리를 바닥으로 엎어치는 로렐의 캐릭터마저도 이미 <인크레더블>의 헬렌에서 변주된 모습일 뿐이다. <온워드>에서 가장 신선한 캐릭터인 맨티코어는 타고난 맨티코어의 습성을 누르고 평범하게 살다가 이안과 발리 형제의 방문을 계기로 본성을 드러내고 문자 그대로 날개를 펼친다. 다만 플롯의 주 축이 이안과 발리 형제이기 때문에 맨티코어의 활약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점은 아쉽다. 이야기의 후반부에서도 결국 액션의 정점을 찍는 것은 이미 강인함을 극 내내 표현해왔던 로렐과 맨티코어가 아닌 이제 막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이안이다. 심지어 맨티코어는 허리를 다쳐 활약을 하기 시작할 때쯤 화면에서 보이지 않는다. 모든 퀘스트가 완수된 이후 맨티코어는 운영하던 가게의 컨셉을 완전히 바꾸기는 하지만 아쉬움을 달래기엔 역부족이다. 얼굴에 푸른 칠을 했다고 한들 결국 서사를 이끌어가는 이들은 백인 남성이며, 다양성을 추구하겠다고는 하나 소수자성을 표현하는 캐릭터는 전부 여성이다(맨티코어 목소리를 연기한 옥타비아 스펜서는 흑인이며 동성애자 애인의 아이 이야기를 꺼내는 경찰 또한 여성이다).


* 다음 단락에는 스포일러 아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안과 발리 형제의 성격 묘사가 전형적이다 보니 이들이 일으키는 갈등도 전형적이다. 이안은 신중하지 못하고 논리가 아닌 직감에만 의존하는 형 발리가 불만이고, 발리는 이안보다 오랜 시간 마법 공부를 해왔음에도 자신을 믿어주지 못하는 이안 때문에 속상하다. 퀘스트는 형제의 협업으로 완수될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 장애물이 등장하고 형제는 결국 쌓아온 불만을 터트린다. 이쯤 되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토르> 시리즈와 믹스되어 끊임없이 소환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퀘스트에 실패하고 형제는 갈라서지만 새로운 안타고니스트가 등장하여 형제는 재소환되고 결국엔 협업을 통해 퀘스트를 완수한 후 가족애를 깨닫고 화합한다. 저기요, <몬스터 주식회사>와 <몬스터 대학교>도 이렇게 마무리되지 않았었나요..?



이쯤 되면 미안한 얘기지만 영화 내내 보이는 개그조차도 픽사 시리즈에서 이미 활용된 개그를 재활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몸이 작아지고 헬륨풍선 먹은 목소리를 내는 발리는 이미 <토이 스토리3>에서 버튼을 잘못 눌러 목소리와 언어가 바뀐 버즈로 표현된 적이 있다. 픽시들이 편의점을 터는 장면이나 로렐과 맨티코어가 지도를 가져오는 장면은 <주토피아>에서 본 것만 같다. 개그컷은 아니지만 애초에 아버지를 구하겠다고 모험에 나선 형제를 맨티코어와 로렐이 돕겠다며 쫓아가는 플롯은 <인사이드 아웃>에서 라일리를 구하려다가 모험길에 나서게 된 기쁨이와 슬픔이를 나머지 감정들이 남아서 라일리의 일상을 유지하게 하려는 것과 이미 비슷하다(심지어 기니비어의 운명은 빙봉의 그것도 생각나게 한다ㅠ). 더 나아가 라이트풋 형제의 운전 신은 <도리를 찾아서>의 후반부 자동차 신마저 떠올리게 하며, 다리를 건넌 이후의 초원 장면은 픽사의 망작으로 분류되는 <굿 다이노>까지도 연상시킨다. <인사이드 아웃>은 각 캐릭터의 특성이 확고하게 달랐고 빙봉이라는 희대의 캐릭터가 있었으며, 소녀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감정들이 그 주인공이라는 데서 이미 신선함을 표방했다. 하지만 <온워드>는 이제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 시리즈 이후 수많은 관객들이 익숙해진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사실 제일 비슷해 보이는 건 드림웍스의 <드래곤 길들이기>시리즈다) 이안과 발리는 수많은 남성 투톱 콤비의 또다른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 맨티코어는 <슈퍼배드> 시리즈의 미니언이나 <인사이드 아웃>의 빙봉만큼의 비중이나 활약이 없다. 상반신이 사라진 아버지는 신선한 설정이고 때로 웃음을 유발하지만 형제의 갈등에 끌려다니느라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온워드>가 재미없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분명 <온워드>는 픽사가 지금까지 쌓아온 수많은 노하우로 만든 또 하나의 감동적인 가족극이다. 영화 전반에서 발리가 흘린 한두마디가 복선이 되어 후반부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부분에도 신선한 아이디어가 많다. 무엇보다도 결과적으로 최후에 아버지가 소환되는 부분은 슬프기도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픽사가 가족애를 표현하는 궁극의 방식이라는 생각도 든다. 가족애로 가는 과정에서 이안이 급작스럽게 깨닫는 형제애가 억지스럽고 형제간의 갈등이 봉합되는 방식도 전형적이기는 하나 과연 픽사다운 마무리다. 또한 라이트풋 형제가 아버지를 구하는 과정에서 결국 세상에 마법을 돌려주게 된다는 플롯은 어린 시절의 순수한 마음을 잊어가는 어른 관객의 향수를 자극하기도 한다. 이렇게 픽사는 전 세대를 아우르는 애니메이션을 아직도 제작하고 있다는 메세지를 매 작품마다 강력하게 인장으로 박아둔다.



<토이스토리4>가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장난감에게는 주인이 필요하다는 시리즈의 기본 전제를 전복하고 장난감들에게 선택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픽사는 여전히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장난감들의 심성을 잊지 않았으며 장난감들 사이의 우정을 포기하지 않았고 시류에 맞춰 여성 캐릭터들을 능동적으로 변화시켰다. 물론 <토이스토리> 시리즈와 <온워드>를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다. <토이스토리>는 이미 팬층을 확보한 유서있는 시리즈물이며 서사를 받쳐온 두 캐릭터인 우디와 버즈가 굳건하게 버티고 있어 새롭게 창작해야 할 부분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반면 <온워드>는 픽사가 오랜만에 내놓은 오리지널 작품이다. 서사부터 디자인까지 만들어 내다 보면 어느 부분에선가는 픽사의 기존작을 답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필자는 언젠가 픽사가 <인사이드 아웃>이 주었던 충격과 감동을 또 한번 주기를 기대한다. 로렐이 맨티코어와 데이트를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감히 한번 해본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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