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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Jul 20. 2020

시스템의 배신

언제든 관찰당할 수 있는 당신에게

<비바리움>은 보는 내내 의문점이 들게 하는 영화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명확히 설명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미스터리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데다 영화의 표현 방식은 웬만한 공포 영화보다 소름끼친다. 영화가 끝난 이후 다른 관객들이 뭐라 하는지 들어보니 다들 나름의 방식으로 영화를 해석하고 설명하려 애쓰고 있었다. <더 랍스터>도 영화에 적체된 각종 이미지와 배경 설명이 꽤나 난잡한 편이지만 이리저리 끼워맞추면 설명이 가능했던 데 반해 <비바리움>은 그만큼도 친절하지 않다. 영화를 보면서도 생각이 많았고 끝난 후에도 생각이 끊이지 않아 머릿속에 떠오르던 단상을 토대로 나름의 설명을 해보고자 본 글을 쓴다. 즉 필자는 <비바리움>에 대한 어떠한 해석도 미리 찾아보지 않았고 감독의 인터뷰나 설명 등도 없는 상태에서 글을 쓰고 있으므로 본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할 뿐임을 서두에 밝혀둔다. 글을 다 쓴 이후에는 이것저것 검색해볼 지도 모르겠다.


앞서 <비바리움>이 <더 랍스터>만큼 친절하지 않다고 밝혔는데 사실 <비바리움>은 많은 면에서 <더 랍스터>를 연상시키는 영화다(실제로 왓챠피디아에서 <비바리움>을 검색하면 비슷한 작품으로 <더 랍스터>가 가장 먼저 뜬다). 이전 <더 랍스터> 리뷰에서 획일성과 유사성을 강요했던 사회를 설명한 바 있는데 <비바리움>은 한술 더 떠 아예 모든 집을 똑같이 만든 동네로 관객을 안내한다. 살 집을 찾던 젬마(이모겐 푸츠 분)와 톰(제시 아이젠버그 분)은 공인중개사 마틴의 안내로 욘더라는 마을로 향하고 사지도 않은 집을 보기만 한 상태에서 욘더에 갇히고 만다. 이들이 정착한 집은 9번. 차를 아무리 돌려도 9번 집으로 돌아오고 결국 날이 저물고 자동차의 기름이 다 닳고 나서야 이들은 욘더에 갇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똑같은 초록색 집이 무한히 늘어서 있는 마을 욘더는 구름마저 움직이지 않고 같은 모양으로 고정되어 있다. 비주얼만 봐서는 미셸 공드리나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나 나올 법한 집들이지만 이 곳에 갇히자 어떤 공포영화보다도 무서운 공간으로 돌변한다. 곧 사람들이 입주할 거라던 이웃집에는 아무도 없고 젬마와 톰은 9번 집에서 생활을 시작한다. 모든 식료품과 생활품은 (아니무슨 애덤 스미스도 아니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정기적으로 배달되고 쓰레기도 바깥에 놔두면 치워간다. 구조 신호를 위해 톰은 집에 불을 지르지만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그 자리에는 똑같은 9번 집이 기사회생해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아기가 담긴 박스가 배달되어 있고 이 아이를 키우면 풀려날 것이라는 메세지가 쓰여 있다.



젬마와 톰은 울며 겨자먹기로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지만 원해서 가진 아이도, 자신들의 아이도 아니기 때문에 아이에게 애정을 쏟지 않는다. 이들이 아이에게 애정이 없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아이에게 이름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섭게도 신생아 상태로 집 앞에 떨어진 아이는 98일만에 유치원생 가까이로 성장한다. 아침마다 젬마와 톰을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 깨우면 젬마와 톰은 함께 아이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날리고 대충 아침을 차려준다. 아이는시리얼에 우유를 적당량 부어줄 때까지 다시 비명을 지른다. 마치 '너희가 제대로 된 양육자 역할을 하지 않으면 괴롭게 만들어주겠어'라는 마인드를 어디선가 장착해온 것만 같다. 매일매일 마을을 탐구하던 톰과 젬마는 어느 날 톰이 바닥에 던진 담배꽁초 주위의 풀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땅을 파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 톰이 땅을 파기 시작한 시점부터 톰과 젬마는 갈등에 부딪힌다. 땅을 파기 시작한 시점이 갈등의 시작점이 된 이유는 톰에게 지하라는 별도의 공간이 생겼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점과 맞물려 남은 자동차 배터리로 헤드라이트를 켜고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던 톰과 젬마는 어느새 그 사이에 끼어든 아이로 인해 아이에 대한 시각을 미묘하게 달리한다. 그리고 아마도 이로 인해 톰과 젬마의 운명은 미묘하게 어긋나게 된다.


혹자(라기보다는 관람 전 <비바리움>에 대한 씨네21의 짤막한 소개글이다)는 젬마는 아이에게 정을 붙여 키우고자 하고 톰은 아이를 버리려 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젬마에게서 모성애는 찾아볼 수 없다. 우유를 부어줄 때까지 비명을 지르는 아이를 보고 화가 난 톰은 아이를 자동차에 가두고 굶겨 죽이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젬마는 결국 아이를 꺼내오는데 이것은 아이에 대한 모성애 때문이 아니라 젬마의 도덕성 때문이다. 톰은 아이를 소년(the boy)라 지칭하는 젬마에게 아이가 아니라 저것(it)이라고 이야기하고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젬마는 괴생물체일지언정 아이를 생명체로 대했기 때문에 자동차에 감금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영화 후반부 젬마에게 기댄 톰에게 젬마가 왜 그 때 아이를 죽이지 않았을까 후회하는 장면에서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톰은 그 대답으로 젬마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 소년은 현대 국가 시스템의 많은 부분을 대변한다. 아침에 젬마와 톰을 깨우고 시리얼을 부어줄 때는 시계 역할을, 젬마와 톰을 흉내낼 때는 현대인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그리고 영화 전반적으로는 국가 시스템 그 자체를 나타낸다. 땅파기는 과거 육체노동 시대 신체적 능력이 평균적으로 여성보다 뛰어났던 남성들이 했던 노동을 상징하는데 톰이 땅을 파는 동안 젬마는 세탁기를 돌리고 아이를 미행한다(결국엔 돌봄노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욘더 빌리지는 결국 젬마와 톰에게 구시대적 남녀 역할을 무의식적으로 강요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인공적으로 아이를 집 앞에 던져놓은 것이다.




하지만 욘더빌리지 시스템이 간과한 점은 강요한다고 해서 젬마와 톰이 부모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소년이 좀 더 살가웠더라면 달랐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른마냥 아이 정장을 차려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현대 직장인을 축소해 놓은 것만 같은 이 아이는 영화 내내 젬마와 톰에게 공포심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아이가 국가 시스템을 상징한다고 봤을 때 결국 국가 시스템은 개인들에게 살 집과 먹을 것을 제공하더라도 진정한 자유와 역할을 줄 수는 없다는 점, 나아가 공포감마저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톰이 땅을 파기 시작한 이후 구덩이 속에서만 잠을 잔다는 데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침대가 더 편할 텐데도 톰은 구덩이가 어느 정도 깊어진 이후로는 구덩이 속에서만 취침한다. 그리고 결국 아이를 재우러 간 젬마는 아이 옆에서 잠드는데 젬마 얼굴 앞에 드리워진 아이용 침대의 나무살은 젬마가 갇힌 감옥을 의미한다. 젬마와 톰 모두 감옥에 갇힌 셈이고 톰은 벗어나고자 일시적으로 구덩이로 탈출했지만 시스템을 탈출할 수는 없다.


<비바리움>의 가장 큰 공포감은 젬마와 톰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욘더빌리지의 시스템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것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은 어느 날 아이가 가져온 책이다.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해가 저물고 톰이 파는 구덩이 앞에 나타난 아이는 책을 들고 있다. 책은 이집트 상형문자처럼 보이는 알 수 없는 문자들로 가득하고 TV를 틀면 나오는 이상한 무늬가 그려져 있고 한 쌍의 남녀 그림과 사이에 있는 아이 그림도 들어 있다. 이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남녀를 이용해 아이를 기르고자 하는 것까지는 그림으로 이해되지만 나머지 내용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젬마와 톰은 민간인이 이해할 수 없는 국가 시스템에 갇힌 수많은 민간인의 대표이며, 국가 시스템(혹은 정치)은 일개 시민이 이해하고자 해도 이해할 수 없다. 욘더빌리지 시스템과 이들을 잇는 유일한 다리인 소년은 물어봐도 대답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하고, 결국 젬마가 머리를 써서 오늘 만난 사람을 흉내내 보라고 하자 기괴한 소리를 내며 목이 부풀어 오른다. 젬마는 이 모습에 기겁하며 뒤로 물러나는데, 욘더빌리지 시스템(으로 대표되는 시민 착취 시스템)의 실체는 사실 매우 끔찍하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결국 영화의 후반부 젬마는 이제 성인이 된 소년을 공격하고 소년이 도망간 보도블럭 밑으로 쫓아나선다. 소년은 기겁하고 도망가지만 타격을 입은 것 같지는 않다. 일개 시민이 큰 시스템을 치려고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곳에서 젬마는 욘더빌리지의 다른 차원을 보게 되고 젬마와 톰 이외에도 소년을 기르도록 끌려온 커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젬마는 몇 개의 차원을 거치고 다시 9번 집으로 돌아오고 비로소 욘더빌리지의 착취 시스템에서 (어떤 의미로는) 해방된다. 영화 내내 톰을 아빠라고 부르지 않던 소년은 계속해서 젬마를 엄마라 부르며 양육을 착취하려 들지만 젬마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난 네 엄마가 아니야(I'm not your fucking mother)"이라 절규하며 저항한다. 하지만 이미 젬마의 양육을 등골까지 빼먹은 소년은 "그러거나 말거나(whatever)"라고 응수한다. 그리고 이름이 없던 소년은 욘더빌리지를 벗어나 공인중개사 마틴의 사무실에서 죽은 마틴의 이름표를 빼앗고 전임자의 시체를 치운 후 업무를 대행한다. 이 시스템은 전임자가 죽는다고 해서 죽는 시스템이 아니며, 톰과 젬마를 포함한 수많은 커플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후임자를 길러내고 있기에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다.


감독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기에 개인의 해석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읽힐 것이다. 참고로 비바리움은 관찰이나 연구를 목적으로 동물이나 식물을 사육하는 공간을 의미하며, 욘더는 '저 너머에'라는 뜻이다. 욘더라는 저 너머로 넘어가면 젬마와 톰(이 될 수 있는 누구나)은 돌아올 수 없으며, 톰이 소년을 보며 "저 아이는 항상 무언가를 보고 있어"라고 말했듯이 시스템의 감시 대상이 된다. <비바리움>은 언제든 감시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는 개인들을 관찰하며, 사실 영화 시작에서 이들의 결말을 나무에서 떨어진 새를 통해 암시한다. 그리고 그 광경은 매우 섬뜩하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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