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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Jul 27. 2020

과잉조차 과잉

자비에 돌란이 스크린에 폭격하는 것들

자비에 돌란의 영화들은 언제나 내용이나 출연 배우들보다도 감독인 자비에 돌란 자체가 훨씬 주목받는다. 연출한 작품이 거의 항상(거의가 아니라 그냥 항상일 수도 있다) 세계 3대 영화제로부터 소환당하고 어떤 작품을 보아도 자비에 돌란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독특한 색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거장의 반열에 오른 이 감독의 영화세계는 독특하지만 기실 작품 대부분이 비슷한 색채를 띠고 있다는 인상도 지우기 어렵다. 필자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돌란의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는 '과잉'이다. 대사도 과잉, 음악도 과잉, 설정도 플롯도 과잉, 색채도 과잉. 스크린에서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것만 같은 돌란의 예술은 그 자체로 독특성을 담보하며 보는 이를 매혹시키지만 동시에 먹다가 체할 것만 같은 부담도 동반한다. 이 과잉이 미학으로서 정점을 찍었던 영화는 <로렌스 애니웨이>였고(솔직히 필자는 이 영화도 보는 내내 힘들었다), 방향을 잘못 잡아 엉뚱한 방향으로 분출되었던 영화는 <단지 세상의 끝>이었다. 그리고 코로나 속 스크린에 도착한, 퀴어의 외피를 두른 두 남자의 성장담을 담은 돌란의 신작은 <마티아스와 막심>이다. 언제나처럼 스크린에는 그가 폭격한 대사와 이미지들이 난무하고 동시에 그가 천착해온 주제인 어머니와의 관계도 다루고 있으며, 해피엔딩과 파국 사이 어딘가에 머물던 결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연유로 <마티아스와 막심>이 기존 돌란의 작품과 동어반복이라 여기는 이들도 있고 필자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본인 스스로는 퀴어 영화를 찍은 적이 없다고 무심하게 대답하지만 돌란의 카메라는 언제나 소수자나 소외된 자들을 향해 있었다. 다만 그 묘사 방식이 소수자이니 특별하게 그려지기보다는 '세상에 이런 애도 있고 저런 애도 있는거지'와 같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다가 그 안에서 나름의 아름다움을 포착해낼 뿐이다. <마티아스와 막심> 또한 주인공인 두 캐릭터 마티아스(가브리엘 달메이다 프레이타스 분)와 막심(자비에 돌란 분)의 관계가 세기의 사랑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마티아스나 막심의 캐릭터 중 하나가 여성으로 바뀌고 둘 모두 이성애자 혹은 양성애자라도 영화 전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 영화가 돌란의 영화가 아니었다면 크게 특별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서로에 대한 감정을 확인해가는 두 남성의 이야기인 것처럼 홍보되었지만 생각보다 둘이 함께하는 분량은 별로 많지 않다. 오히려 마티아스는 사회생활에 지쳐 갈팡질팡하는 회사원의 일상을 보여주고 막심은 어머니와의 악연으로 고생하다가 독립하려는 청년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데 훨씬 치중한다. 다만 이 과정을 묘사함에 있어 그 방식이 언제나 돌란이 쓰던 그 방식-넘치는 대사와, 음악과 이미지에 치중해 순간에 집중하는 등-을 차용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고 만다. 영화 초반 식당에서 여럿이 모여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약을 하고 밥을 먹는 장면은 <단지 세상의 끝>을 다시 보는 것 같고 막심이 어머니와 부엌에서 애증섞인 다툼을 하는 장면은 <마미>의 축소판처럼 보이며 방황하는 마티아스의 모습은 <로렌스 애니웨이>의 순한맛 변주처럼 보인다. <마미>에서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에 집중해 138분여에 담아냈을 때만 해도 독특한 양상의 모자관계는 그 자체로 센세이션이었지만 <마티아스와 막심>에 이르러 감독의 자가복제가 되고 말았다. 다만 폭력의 가해-피해 관계가 뒤집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이 장면도 대사과잉과 설정과잉으로 이루어져 있다. 관객을 매혹시키던 돌란의 마법은 이제 깨진 것일까?


돌란이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다루어 오던 퀴어로맨스 또한 어느 정도 소재 고갈에 다다른 듯하다. 아마도 그렇기에 두 주인공 캐릭터의 성장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춘 것 같기도 한데, 그러다보니 관객에게 마티아스와 막심의 감정변화가 일관성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한가지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소재 고갈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돌란이 '퀴어'로맨스를 다루어왔기 때문이 아니라 퀴어'로맨스'를 비슷한 방식으로 다뤄왔기 때문이다. 이성애를 기반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 영화를 주로 제작하는 감독들도 영화를 여러 편 제작하다 보면 비슷한 비판에 부딪히며 비단 멜로 서사가 주인 장르를 다루는 감독들만의 문제가 아닌 어느 장르라도 마찬가지다. 거기다 <마티아스와 막심>은 돌란의 자가복제에, 기존 퀴어영화 서사의 반복까지 덧입혀져 관객의 기시감을 더 크게 불러일으킨다. 돌란 감독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우연히 스킨십을 하게 된 두 동성인물이 호감을 느끼지만 현실적인 제약으로 방황하고, 끝내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한다'는 서사는 어딘지 익숙하지 않은가.



<마티아스와 막심>은 3시간여에 달했던 <로렌스 애니웨이>나 138분인 <마미>등과 비교하면 120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을 자랑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돌란식 영화의 재탕으로 인해 실제 러닝타임보다 길게 느껴진다. 이는 아마도 설정과잉에서 비롯된 문제인데 두 캐릭터의 전사와 배경을 세세히 세팅해두고 이를 전부 묘사하려다 발각되었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차치하고라도 막심의 얼굴에 있는 희한한 무늬의 점은 아마도 막심의 콤플렉스일 것이라고 설정했을 텐데 이는 거울에 비친 막심의 얼굴에서 점이 사라졌다가 카메라가 다시 막심을 향한 순간 나타나는 데서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너무나 안타깝게도 뻔하게도) 이 점은 마티아스가 막심을 거부할 때 공격수단으로 사용되어('점박이') 막심에게 상처를 남긴다. 이 설정의 가장 큰 문제점은 막심이 얼굴에 있는 점으로 인해 일상생활에서 겪는 불편이 전혀 설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막심이 어머니와 싸우고 버스를 탔을 때 타인의 시선을 느끼지만 그것은 점 때문이 아니라 리모콘에 맞고 이마에 난 상처로 인해 흘러내린 피 때문이다. 점의 색깔이 붉은 까닭은 아마도 피의 이미지를 형상화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이는데, 막심의 과거가 어머니와의 관계나 형의 부재로 인해 굴곡이 많았을 것임을 추측하게 하지만 마티아스와의 관계에서 그닥 중요한 설정은 아니다. 즉 막심의 점은 돌란의 고질적인 장점이자 문제점인 설정과잉이 드러난 예라고 할 수 있다.


마티아스는 돌란의 전작들에서는 묘사된 적이 별로 없는 캐릭터지만 역설적으로 일반적인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캐릭터다.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있고 여자친구가 있지만 성 정체성에 대해 아직도 답을 내리지 못한 성인 남성. 쓰고 나니 <브로크백 마운틴> 속 에니스가 떠오른다. 마티아스 캐릭터의 가장 큰 문제는 이 전형적인 캐릭터로 인해 여성 캐릭터들이 설정상으로나 영화 속 역할로나 결국 피해자가 된다는 데 있다. 마티아스는 성 정체성 혼란으로 인해 여자친구의 화를 사고 고객 변호사와 스트립 클럽마저 간다. 스트립 클럽 안 나신의 여성들은 마타아스의 성 정체성 확립을 위한 도구일 뿐이며 마티아스의 여자친구는 마티아스와 막심의 사랑을 자신도 모르게 방해하는 훼방꾼으로 전락한다. 더욱이 마티아스와 막심이 최초로 키스를 하게 된 계기인 영화 과제를 하는 리베트는 지적 허영심이 가득한 아마추어처럼 그려지고 극중 남성 캐릭터들은 아무도 진지하게 리베트의 과제를 대하지 않는다(애초에 마티아스와 막심이 키스하는 장면을 찍게 된 것도 내기에 져서다). 마티아스마저도 거실 소파에서 나란히 둘러앉아 리베트의 과제를 시청하자 '오늘 개봉하는 줄 몰랐네요'라고 비꼬고 막심은 '나는 잘 모르지만'이라는 간접 공격 화법으로 리베트의 영화 철학이 이상하다고 말한다(자비에 돌란은 실제로도 영화감독이기 때문에,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주류인 백인 남성이 여성을 향해 너희들은 영화를 전문적이 아니라 아마추어적으로 제작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리베트는 마티아스와 막심이 호감을 갖게 된 계기를 제공하는 단역일 뿐 전문적인 지식과 열정을 가진 직업인이 아니다. 와중에 마티아스가 호감을 가진 것처럼 비춰지는 다른 남성 캐릭터 케빈은 무려 변호사가 아닌가(케빈이 최초 등장하는 장면은 음악 과잉인 건 사족이다).



돌란은 영화를 통해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처럼 스크린에 많은 것들을 폭격한다. 돌란의 메세지들은 때로는 충격적이고, 때로는 잔인하며, 때로는 매우 현실적이기에 관객의 폐부를 깊이 찌르곤 했다. 하지만 그의 시그니처는 이제 돌란의 영화를 처음 만나는 관객이 아니면 심드렁할지 모른다. 아직 젊고 유능한 감독이기에 나는 그가 다시금 충격적인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소환하기를 기대한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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