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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Aug 03. 2020

왜 그들의 이야기는 비슷한가

헐리우드가 (여성)변호사를 이야기할 때

법정은 영화화하기에 장단점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변호사와 검사의 말 한두마디로 상황이 역전되는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어떤 액션도 없이 그저 대사로만 모든 상황과 긴장을 전달해야만 한다.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카메라 워크와 음악뿐이고 배우는 대사에 의존해야 하며 관객은 생각보다 많은 상상력을 활용해야 하고 누구 말이 더 논리적인지 깊이 생각도 해야 한다. 관객에게 생각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법조계의 이야기는 정교함을 요구하지만 지나치게 복잡할 경우 관객을 지치게 만들 수도 있다. 아마도 그래서인지 많은 헐리우드 법정 영화들은 의뢰인이나 변호사, 검사의 사생활을 부수적인 이야기로 가져온다. 이 곁가지 이야기들은 때로는 이들은 악마로, 때로는 이들은 성인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번주에 개봉한 <세인트 주디>는 변호사 주디 우드를 제목부터 성인이라 칭하지만 영화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현실에 치인 여성일 뿐이다.


최근 개봉해온 법정 영화들의 목록을 잠시 살펴보자. 코로나가 터진 이후 개봉작 자체가 많지는 않지만 가장 가까운 예로는 마크 러팔로와 앤 해서웨이 주연의 <다크 워터스>가 있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데드풀라이언 레이놀즈 주연의 <우먼 인 골드>도 있었으며, 여성 변호사(나중엔 대법관이 되셨지만)를 다룬 이야기는 <세상을 바꾼 변호인>이 있었다. <세인트 주디>를 포함한 네 영화 모두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들이며 주인공이 된 실제 인물들의 삶은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국내 영화로는 양우석 감독이 송강호를 주연으로 만든 <변호인>이 있고 정우 또한 <재심>을 통해 변호사를 연기했으며, 실화 기반이 아닌 법정 스릴러로는 <의뢰인>이 있었다. 여성 변호사 이야기는 얼마 전 신혜선 주연으로 개봉한 <결백>도 있었으니 이제 국내에서도 법정 이야기는 꽤 인기 파이를 차지한 모양이다. 위에 나열된 영화만을 비교해 볼 때 국내 법정물보다는 헐리우드 법정물이 실화에 근거한 케이스가 많은 것처럼 보인다(법정이 주된 공간이 아닌 <마이 시스터즈 키퍼>라든가 <소원>같은 영화는 제외하기로 하자. 여성 변호사가 나오긴 하지만 <아이 엠 샘>은 유물이죠..).



제목에서 왜 그들의 이야기는 비슷할까 라고 질문한 연유는 사실 <세인트 주디>가 꽤 좋은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시감의 후폭풍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끊임없이 떠올랐던 영화는 위에서 나열한 목록에는 없는 <컨빅션>이었다. 힐러리 스웽크 주연의 이 영화는 무고한 죄를 뒤집어쓴 친오빠를 구하기 위해 변호사가 된 베티 앤(힐러리 스웽크 분)의 이야기다. 베티 앤은 당시 고졸이었기에 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쿨을 가는 긴 세월을 감내한 후에야 오빠를 구할 수 있게 되었는데 무려 실화다. 영화 초반부를 보면 이혼 후 아들 둘을 키우며 공부하느라 아침에도 제정신이 아니다. <세인트 주디>의 주디(미셸 모나한 분)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혼 후 공동 양육권을 위해 아들을 데리고 캘리포니아로 이사 와 이민자들의 변호를 맡는 것으로 주디의 이야기는 시작한다. 두 여성 모두 재정적인 문제에 시달리고, 돈도 되지 않는 재판을 진행하느라 지쳐 있지만 재판을 그만둘 수도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두 이야기 모두 실화이기에 각본가가 정신줄을 놓고 비슷한 이야기로 자작극을 벌였다고 의심할 수도 없다.


비슷한 이야기들이 기시감이 든다고 해서 문제가 된다고 지적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화를 기반으로 했고 전혀 다른 사건이 다루어짐에도 기시감이 드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미국 내 이혼가정에 대한 시선은 국내에 비해 개방적이기에 이혼가정을 다루는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어째서 전문직 여성(혹은 업무가 과중한 여성)은 이혼의 처지에 쉽게 놓이는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다크 워터스>의 변호사 롭 빌럿(마크 러팔로 분)도 처한 상황은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베티 앤과 주디 우드는 애초에 로펌에 있지 않았거나 로펌에서 해고당해 홀로 재판을 준비하지만 롭 빌럿은 마지막까지 로펌의 보호를 받는다는 정도다. 하지만 롭 빌럿도 돈이 되지 않는 재판을 오랜 기간 끌어온 것은 마찬가지이며 이로 인해 감봉처분을 여러 차례 받아 재정적인 위기에 시달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롭의 아내 사라(앤 해서웨이 분)는 롭을 떠나지 않으며 롭이 없는 사이에도 아이들을 맡아 키워낸다. 롭이 가정에 소홀한 점 때문에 말다툼을 하는 장면이 있기는 하지만 롭이 과로로 병원에 입원하자 사라는 롭의 상사에게 용감하게 맞서며 롭을 감싼다. <우먼 인 골드>속 랜드 쉔베르크(라이언 레이놀즈 분) 또한 재정적인 어려움에 시달리는 부분이 얼핏 비춰지지만 영화의 주된 서사는 클림트의 그림을 어떻게 돌려받는가이지 랜드의 개인사가 아니다. 정의롭게 싸우는 변호사인 것은 넷 모두 마찬가지인데 어째서 가정에 소홀한 책임을 지고 이혼하는 것은 여성이고, 심지어 이혼을 하든 하지 않든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 모두 여성인가. 아니, 실화라 그렇다 치더라도 왜 여성 변호사의 사생활은 서사의 큰 축을 담당하는가.



실화라는 이유로 이 모든 각색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지금까지 열거된 영화 가운데 그나마 사정이 나아보이는 <세상을 바꾼 변호인>의 경우 주인공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펠리시티 존스 분)는 고환암이 있는 남편 마틴(아미 해머 분)을 정성껏 간호하고 마틴의 공부를 돕기 위해 본인의 로스쿨마저 옮겨가며 학위를 끝마친다. 자신이 왜 컬럼비아 로스쿨이 아닌 하버드 로스쿨의 졸업장을 받아야 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장면이 있는 루스가(이 장면은 실제로 보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재판 경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재판 연습을 하며 남편에게 충고를 듣는 장면이 꼭 필요한가. 실화의 일부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아들이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켜 불려간 주디 우드가 자신의 논리력을 교장 앞에서 낭비하는 장면은 정말 필요한가. 베티 앤, 주디 우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모두 재판 날 변호인석에 서기까지의 과정에서 가정사가 어떤 식으로든 부정적으로 그려지지 않는 경우가 없다. 이것은 각색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롭과 랜드의 이야기는 성과 중심인데 어째서 베티, 주디, 루스의 이야기는 과정 중심인 걸까. 애초에 고졸로서 로스쿨에 도전까지 해야 했던 베티 앤은 삶 자체가 극적이기에 그렇다 치더라도, 여성 두번째로 미국의 대법관이 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이야기는 또한 그 과정이 중요했다 치더라도, 주디 우드의 이야기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충분히 성과 중심일 수 있었고 '여성' 변호사로서 아들을 키우며 감당해야 할 삶이 부차적으로 그려질 이유가 없었다. 주디 우드는 여성 '변호사'로서 그려져야 했다.


역설적으로 주디 우드가 변호를 맡은 아세파 아슈와리(림 루바니 분)가 재판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디가 아세파를 여성이 아닌 사람으로서 바라보았을 때 돌파구를 찾았기 때문이다. 재판에서 아세파가 망명 이전에 겪었던 일에 대한 증언까지 받아내고도 재판관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세파의 난민 신청을 받아줄 수는 없다며 기각한다. 하지만 아세파의 삼촌 오마르가 주디에게 자신도 같은 일을 당했다고 이야기하자 주디는 아세파가 겪은 일이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약자라서임을 간파한다. 아세파의 사연은 같은 여성으로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사실상 약자에게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에 사람으로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 점에 착안한 주디는 재판에서 아세파가 정치적으로 다른 의견을 제시했기에 박해받았음을 증명해냈고 법원은 아세파의 난민신청을 받아들였다. 주디는 여성이기에 주어지는 사회적인 역할로 인해 영화 내내 업무와 양육에 시달리지만 아세파는 반대로 (여성을 교육했기 때문에 박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점을 지우고서야 신분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세파와 주디의 승리는 영화의 각본과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어 관객으로 하여금 혼란을 일으킨다. 아세파처럼 여성이 아닌 사람으로서 살아야 하는지, 아니면 주디처럼 성 역할에 부딪혀 싸워가며 살아야 하는지. 나아가 영화는 여성이라는 성별 자체가 정치적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지만 아세파와 주디가 처한 입장에서는 그 대답이 다르게 나온다.



<세인트 주디>는 여성들의 연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이야기로서 의미가 있으며 미국의 난민 판례에 있어서도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기에 몇가지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에 기록되어야 할 역사임은 분명하다. 아세파 아슈와리의 재판은 실제로 미국 내에서 이전까지 있었던 난민 재판이 전부 틀렸음을 인정하는 사건이 되었고, 이후로 수많은 난민이 미국에 정착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모국에서든 타국에서든 자신의 삶을 인정받기 위해 증명을 끊임없이 거듭해야 하는 아세파와 주디의 이야기는 결국 모든 여성은 어디에서나 난민임을 역설적으로 설파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와중에 아세파는 말한다. 자신의 모국과 미국 모두 자신을 원하지 않고 쫓아내려 했지만 미국에서는 맞서 싸울 수 있었다고. 과연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국가의 법정물이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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