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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Aug 31. 2020

무엇을 그리 서두르시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스펙타클도 보여주고 싶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테넷>은 1차 관람으로는 온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이야기다. 엄청난 몰입감을 자랑하는 데도 온전한 이해를 위해 필요한 n차 관람은 놀란의 작품들이 가진 특징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강점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골치아프게 생각하며 봐야 하는 영화를 즐기는 관객이 그다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놀란의 작품을 보는 관객들에게는 바로 그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특히 국내에서는 놀란 영화=어려운 영화라는 것이 공식처럼 관객들의 뇌리에 박혀 있는데 그럼에도 놀란의 작품들은 높은 인기를 구가해 왔다. 전 세계적으로도 그다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던 <인터스텔라>조차 국내에서는 천만이 넘는 관객수를 기록했고 놀란은 이에 대해 한국 관객이 머리가 좋은가 봅니다.. 하는 립서비스를 하기도 했다. <테넷>도 별반 다르지 않다.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점이나 테러를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는 놀란 자신의 전작들이 다분히 연상되는 지점이 많지만 그가 주된 소재로 택한 '인버전'은 새로운 개념이다. 사물의 엔트로피를 반전시킨다는 시작부터 골치아파보이는 이 개념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소재이며 관객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원흉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버전은 또한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하는데 실제 격납고에 보잉기를 부딪혀 촬영했다는 공항장면보다도 프리포트 내부에서 벌어지는 인버전된 이와 주인공의 싸움이 더욱 흥미진진할 정도다. 뿐만 아니라 인버전된 물건이나 물체를 촬영한 장면은 그 자체로 신선하게 다가온다.


최초 시사 직후에는 <인셉션>을 뛰어넘었네, 놀란 최고의 작품이네 하던 평가들도 유료 시사회 후 일반 관객에게도 선을 보이고 나서는 양분되는 모양새다. 여전히 볼거리가 많고 복잡하며 굉장한 몰입감을 자랑하는 놀란의 영화답다고 하는 관객이 있는가 하면 놀란은 시나리오는 쓰지 말았어야 했다고 하는 이도 있다. 놀란의 전작 중 고평가를 받는 <다크 나이트>의 경우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동생은 조너선 놀란이 쓴 각본으로 연출되었지만 저평가를 받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 또한 조너선 놀란의 작품이다. <인셉션>의 경우는 놀란이 오랫동안 간직해온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파프리카>의 표절 논란에 휩싸인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놀란의 작품 가운데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덩케르크> 또한 크리스토퍼 놀란 본인의 각본으로 연출된 작품이고 또 다른 저평가를 받는 작품인 <인터스텔라>는 원래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하려던 것이 크리스토퍼 놀란의 손으로 갔다가 그 사달(..)이 났으니 놀란 본인이 각본을 쓰고 쓰지 않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다만 <테넷>의 경우 인버전이라는 신개념을 제외하고는 새로운 지점이 거의 없다는 것과 방대한 정보를 전달하려다 보니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지점이 심히 많다는 점이 특징이자 단점이다.


*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지만 스포일러라도 스포일러인 줄 모를 가능성이 다분하며, <테넷> 자체가 반전이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영화임을 감안하고 뒤로 가기를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테넷>은 관객에게 제공하는 정보와 제공하지 않는 정보로 양분된다. 우선 우리의 주인공의 이름이 제공되지 않는다. 개봉 전에도 존 데이비드 워싱턴의 극중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이름이 없다. 혹시나 해서 크레딧까지 살펴봐도 주도자(protagonist)라고 표기되어 있을 뿐이다(뭐 주도자라는 게 중요하긴 하다). 주도자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오가는 플롯의 특성상 주도자의 이름이 알려지는 순간 전 타임라인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캣(엘리자베스 데비키 분)이나 닐(로버트 패틴슨 분)의 이름은 알려져도 타임라인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의문은 남아 있지만 사실 주도자의 이름이 끝내 비밀인 것은 쓸데없는 미스터리다. 이와 같이 <테넷>은 알려주었어도 무방한 정보는 감추고 알려주지 않아도 될 정보는 구구절절 잡설을 푸는 경향이 있다. 일례로 마이클 케인이 전달하는 정보는 사실 다른 캐릭터를 통해 전달되어도 무방하다(마이클 케인에 대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집착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이 아닐까 한다). 2시간 반이나 되는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정보의 홍수로 혼란을 겪는 이유는 이렇게 굳이 전달할 필요가 없거나 다른 방식으로 전달되어도 되는 정보들이 일일이 나열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영화 전체가 서두르는 느낌이 나고, 관객이 받아들이고 소화할 시간을 주지 못한다. 이를 대변하기라도 하듯 우리의 주도자님은 놀란의 집착 상대인 마이클 케인을 만나 폭풍수다를 떨고도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마자 먹지도 못하고 장면에서 퇴장한다. 이 장면은 아마도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주도자가 후에 안타고니스트인 사토르(케네스 브레너 분)를 만나는 장면에서 변주된다. 주도자는 처음으로 사토르를 만나는 장면에서 저녁식사 초대로 등장하지만 저녁식사는 한 술도 뜨지 못하고 식사 자리를 벗어난다.


<테넷>의 러닝타임이 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외에도 인버전이라는 개념 때문이기도 하다. 사물의 엔트로피를 반전시킨다는 개념으로 예고편에서 알려졌지만 영화를 보면 조금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생명체가 인버전되는 순간 그는 시간을 역행해 살아가게 된다(내 입장에서 보면 내가 쓴 글이 한 글자씩 지워지는 개념일테니 조금 빡치기는 하겠다). 인버전된 인간은 공기 흐름마저 본인 입장에서는 인버전된 상태이므로 숨을 쉬기 위해서는 호흡기를 장착해야만 한다. 영화에서는 이런 인버전된 이와 인버전되지 않은 이들이 부딪히는 장면들이 몇 번 등장하는데 이 장면을 설명하려다 보니 같은 장면을 인버전되지 않은 시각과 인버전된 시각에서 두 번씩 보여줘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긴다. 물론 같은 장면이라도 시각이 다르기 때문에(예를 들어 예고편에서 뒤집어졌던 차가 똑바로 서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인버전된 주도자가 차를 타고 가다가 엎어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보는 이의 입장에서는 신기하기도 하고 장면 자체가 현대 CG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그야말로 시각의 향연이기도 하지만 러닝타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는 단점이 생긴다. 일부 장면에서 러닝타임을 낭비하게 되면 다른 장면에서 메꾸어야 하는데, 이 과정을 놀란이 능수능란하게 다룬 것 같지는 않다. 특히 따듯한 감정을 잘 다루지 못하는 감독으로 정평이(?) 나 있는 만큼 놀란이 캐서린을 다루는 장면에서 아쉬운 부분이 많다.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도자와 저녁식사를 하며 자신의 사연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캐서린은 주도자가 곧 죽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왜 눈물겨운 인생스토리를 풀어놓는 것일까. 이렇게 감정적으로 개연성이 없는 장면까지 몰입시키려다 보니 음악의 역할이 커지는데 다른 영화 작업으로 이번에는 합류하지 못했다는 한스 짐머가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놀란의 이야기는 언제나 정교하고 복잡하지만 몰입감으로 골치아픔을 무마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과정에서 캐릭터의 특징을 잘 살리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인셉션>의 경우 아서(조셉 고든-레빗 분)와 임스(톰 하디 분)의 캐릭터는 역할을 바꿔 맡아도 별 문제가 없다. 아리아드네(엘렌 페이지 분) 또한 아서가 대체해도 별 문제가 없는 역할이다. 극단적으로는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의 트라우마를 아서가 갖고 있다고 해도 서사 진행에 무리가 없다. 하지만 <인셉션>을 보는 이들은 이런 부분에는 관심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꿈의 3단계로 들어가 무의식을 파헤치는 것이나 꿈 속의 세계가 내 마음대로 설계된다는 설정이 극도로 흥미롭기 때문이다. 나아가 3단계의 꿈을 굳이 군사 기지로 설정함으로써 스펙타클한 볼거리를 선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테넷> 또한 마찬가지인데 주도자의 캐릭터성에 개성이 없어서 굳이 존 데이비드 워싱턴이 연기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이는 배우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각본의 잘못에 가깝다. 주도자뿐만 아니라 닐 캐릭터도 개성이 없긴 마찬가지이며 클리셰의 끝판왕은 사토르다. 케네스 브레너는 <잭 라이언: 코드네임 쉐도우>에서 이미 러시아인 빌런을 연기한 적이 있는 데다 헐리우드 단골 빌런은 러시아다. 테러라는 소재를 가져오다 보니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기시감마저 주는 데다 빌런이 또 러시아 무기 거래상이라니 인버전이라는 소재가 아까울 지경이다. <다크 나이트>가 명작이었던 이유는 안타고니스트인 조커(히스 레저 분)가 순수 악 그 자체라는 신선함이 있었고 프로타고니스트인 배트맨(크리스천 베일 분)을 괴롭히는 동시에 슈퍼 히어로로서 성장시키는 존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토르는 지나치게 평면적이며 빌런을 위한 빌런으로서만 기능한다. 웬만한 마블 영화에서도 이젠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싶어하는 악당은 잘 보이지 않는데..


가장 아쉬운 캐릭터는 캐서린인데 놀란의 고질적인 문제점 중 하나인 여성 캐릭터의 활용이 극화된 인물이다. 무려 190cm의 장신인 엘리자베스 데비키가 남편 사토르에게 약점을 잡혀 폭력으로 휘둘리기만 하는 역할이라는 점이 이미 구시대적인 성역할 발상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점입가경으로 사토르는 직업도 있는 캐서린에게 내가 버는 돈으로 명품을 입고 다닌다고 비난하고(저기요..) 내가 못가지면 아무도 못 가진다는 한국 인터넷 소설스러운 발언마저 일삼는다. 사토르를 평면적인 캐릭터로 만들더라도 캐서린이 보다 입체적이었다면 훨씬 흥미로웠을텐데 캐서린은 마지막까지 감정에 휘둘리는 결정을 내리고 만다. 캐서린은 <인셉션>의 아리아드네, <인터스텔라>의 머피(제시카 차스테인 분)보다도 후퇴한 캐릭터다. 이는 캐서린에게 총을 쥐어줬다고 해서 정당화될 수 없으며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보호하는 대신 타인에게 신변 보호를 요청한다는 점에서 캐서린이 성장하지 않았다는 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테넷>의 강점이자 약점은 세계관을 처음부터 온전히 알려주지 않고 서사가 진행되며 관객과 주도자가 함께 파악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관객을 영화 내내 누구를 믿어야 할 지 알 수 없고 하나라도 놓칠까봐 깊이 몰입하여 영화를 보게 된다. 특히 영화의 백미가 되었어야 할 마지막 작전은 작전 설명을 또 서둘러서 하는 데다 순행 시각과 인버전 시각이 극단적으로 교차되며 진행되고 심지어 이 장면 자체가 캣의 작전과 교차된다. 장면장면이 인버전인지 아닌지 쫓아가기도 버거운데 여기에 캣과 사토르가 합류하니 더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관객은 관람 직후 뭔가 재미있게 본 것 같기는 한데 도통 이해가 안되네.. 하는 상태가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인버전된 시각을 확인하기 위해 관객은 군인들의 배색을 끊임없이 확인해야 하고 모든 사건이 마무리된 후에도 인버전을 거듭해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가장 스펙타클한 장면임에도 마지막 폭탄 제거 장면이 프리포트의 인버전 전투 장면보다도 여운이 남지 않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심지어 사토르 최후의 변명(?)은 어이없기까지 해 임팩트가 더욱 약하다. 가능하면 CG를 쓰지 않는다는 놀란 감독이 CG를 남발하며 적응하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테넷>은 분명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시간 내내 관객이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영화다. 인버전이라는 소재도 신선하고 화려한 볼거리도 많다. 그럼에도 놀란 감독은 이제 관객들을 조금은 배려할 필요가 있다. 어렵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겐 정보를 듣고 소화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시나리오를 읽으러 들어간 존 데이비드 워싱턴은 이해가 안 돼서 앞뒤로 돌려가며 읽느라 한번 읽는데 5시간이 걸렸다고 하고, 로버트 패틴슨은 끝내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촬영에 들어갔다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들을 것이 아니다.


*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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