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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Aug 24. 2020

아이다울 권리를 허하라

왜 영화 속 아이들은 성인을 대체하는가

프란시스 호지슨 버넷의 소설 <비밀의 화원>은 철저하게 주인공 메리의 시선에서 쓰여진 이야기다. 어린 시절 <비밀의 화원>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어른들 몰래 자신만의 공간을 갖게 된 메리에 대한 깊은 이입이었다. 아이들은 성장하며 부모의 집에서 독립하기까지 자신만의 공간을 온전히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메리는 운이 좋게도 그런 공간을 찾아낸 아이다. 프란시스 호지슨 버넷은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아동들의 심리를 꽤나 잘 알고 있던 작가였고 소설 초반부에서는 사실상 스포일드 키드에 가까운 메리와 콜린을 독자에게 프로타고니스트로 선보였다. 성인의 관점에서는 작중 어른들인 매들록 부인이나 크레이븐 이모부는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이들일 뿐이지만 아이들의 관점에서는 빌런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영화화된 <시크릿 가든>은 아이들과 성인들 사이의 관점을 어중간하게 오가다가 재해석에 실패한 사례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아쉬운 점은 아이들이 아이들답게 행동할 권리를 무시하고 지나치게 어른스러움을 강요하거나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순수하며 세상을 잘 모르고 어른들의 사정을 이해할 수 없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공식처럼 기반으로 두는 아역 캐릭터 설정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영화에서는 이 명제를 편의에 맞게 사용하다가 성장이라는 명목으로 변형시킨다. 메리(딕시 에저릭스 분)는 식민지였던 인도에 살다가 부모님을 여의고 이모부인 크레이븐(콜린 퍼스 분)의 저택으로 보내진다. 부모님이 왜 죽었는지도 제대로 모른 채 생판 남이나 다름없던 친척의 집에 얹혀 살게 됐으니 혼란스러운 건 당연지사다. 거기다 이모부는 메리에게 별 관심도 없고 아이들 교육을 매들록 부인(주디 덴치 분)에게만 맡겨두는데 매들록 부인도 아이들을 다룰 줄 모르는 건 매한가지다. 이 상황에서 아이가 삐뚤어지지 않기란 쉽지 않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메리는 인도에서도 부모님과 애착 관계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했으니 크레이븐 저택에 오자마자 소리지르고 울지나 않는 게 다행이다. 영화에서는 콜린 퍼스가 맡아 연기하는 바람에 크레이븐이 얼마나 괴팍하고 무서운지 잘 묘사되지 않았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그야말로 괴물같았던 그를 유일하게 사랑했던 인물이 아내였던 그레이스다. 실제 상황이었다면 메리가 느꼈어야 할 감정은 공포에 가까운데, 영화는 메리를 스포일드 키드에 가깝게 묘사함으로써 고아인 메리를 맡아준 유일한 이가 크레이븐 이모부이니 감사해야 할 것처럼 그린다.



메리의 감정이 세밀하게 묘사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가정부인 마사의 비중이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원작 소설을 읽은 이라면 마사가 얼마나 사랑스러우며 메리에게 중요한 인물인지 기억할 것이다. 스스로는 옷도 입을 줄 모르던 메리를 붙잡아 옷을 입히고, 어른으로부터의 애착을 형성해본 적이 없는 메리가 거의 처음으로 유대감을 느끼는 인물이 마사다. 마사는 수다스럽지만 콜린을 발견하기 전까지 이야기 나눌 이가 없던 메리에게 거의 유일하게 말상대가 되어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메리가 처음 보는 디콘에게 신뢰를 준 이유도 디콘이 마사의 남동생이기 때문이다. 마사가 선하고 순수한 인물로 그려지는 만큼 소설을 읽는 이들에게도 마사의 가족은 전부 마사처럼 순하고 정이 많을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렇기에 독자들도 디콘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유대를 형성하는 메리에게 공감을 느낀다. 하지만 영화상에서는 마사가 디콘만큼도 존재감이 없다. 마사와 메리가 애착을 형성하는 과정이 좀 더 길었더라면 메리의 전사를 굳이 중후반부에 플래시백으로 보여줄 필요도 없었다.


그나마 메리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메리에게는 변명할 시간이 어느 정도 주어졌지만 콜린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지병으로 인해 방에만 갇혀 있다가 메리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 밖으로 나가는 콜린은 두려움이 많지만 먼저 변화한 메리의 영향으로 함께 성장했어야 하는 인물이다. 콜린은 생각보다 일찍 모습을 드러내는데 분량에 비해 콜린이 변화하는 모습은 많이 보이지도 않고, 가장 입체적이었어야 할 인물임에도 가장 평면적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은 콜린이 메리와 크게 말다툼하는 장면이 삭제된 것인데 언제나 사람들을 부리기만 하던 콜린이 원하는 것을 언제나 가질 수만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디콘에게 질투까지 느끼다가 성장하는 콜린은 사라지고 영화 말미까지도 어느 정도 스포일드 키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콜린만 남아 원작 소설의 팬들에게 아쉬움을 남긴다. 



왜 <시크릿 가든>은 아이들을 아이들답게 그리는 데 실패했을까? 아이들을 성인의 대체물로 생각했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이는 메리가 엄마인 앨리스가 쌍둥이 자매에게 보내던 편지를 찾는 장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모와 엄마가 주고받던 편지를 발견한 메리는 이를 읽다가 엄마의 환영을 보고 그 슬픔을 이해하지 못해 미안했다고 사과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양육자가 자신의 슬픔으로 인해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면 그것은 양육자의 성숙하지 못한 양육 태도가 문제지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동의 문제가 아니다. 왜 영화는 메리에게 성인의 사정을 이해하도록 강요하는가. 메리를 성인으로 대체하면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메리는 성인으로 대체되어서는 안되는 존재다. 훨씬 어리기 때문이다. 콜린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버려두고 하인들에게 양육을 맡긴 채 인성교육에는 관심도 없는 아버지에게 콜린이 느꼈어야 할 감정은 애정이 아니라 분노다. 제대로 된 애착 관계를 형성한 적도,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아본 경험도 전무한 아이들이 사랑하는 존재를 잃었다고 해서 일상을 놓아버리는 성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설정은 가히 무리수에 가깝다. 이들은 이해하고 사과할 존재들이 아니라 이해받고 사과받아야 할 존재들이다.


프란시스 호지슨 버넷의 원작소설 속 마법은 정원이 아니라 아이들의 우정과 이들을 사랑해준 유일한 어른에 가까운 마사에게서 나왔다. 마르고 핏기없는 얼굴의 소유자로 묘사되던 메리는 비밀의 화원을 발견하고 화원을 손질하며 뜀박질을 하다가 입맛이 돌아 식사량이 늘고 얼굴에 생기가 돈다. 그리고 이런 메리에게 잘했다며 칭찬해주던 유일한 성인이 마사다. 헌데 영화는 마사의 비중을 극단적으로 줄이고 아이들의 이야기에 치중하느라 감정적 개연성을 놓치고 말았다. 마사를 통해 메리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화원을 발견했으며 타인에게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아이로 변모했다. 이는 소설 중후반부 메리가 마사와 디콘에게 자신이 누리는 음식들을 베풀고 싶어하는 데서 드러낸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데는 일반적으로 아이들만으로는 부족하다. 성인들의 가르침과 애정이 있어야 비로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데 영화는 지나치게 아이들을 믿거나 혹은 성인의 대체물로 여긴 나머지 메리는 스스로 변화한 아이로, 콜린은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는 아이로 그리고 만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크레이븐 이모부도 마찬가지다. 화재 한번으로 크레이븐 이모부가 콜린과 메리에 대한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은 비약이 심하다.



<시크릿 가든>은 시각적으로는 분명히 즐거운 영화다.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아름다운 화원의 모습을 아름다운 비주얼로 확인할 수 있고 아이들의 감정에 따라 화원의 식물들이 변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이들다울 권리가 있다. 사회화가 되기 전의 아이들은 감정을 그대로 분출하고 떼를 쓴다. 건강한 사회화 과정을 거쳐서만이 아이들은 누군가를 이해하고 때로는 감정을 숨기거나 건강한 방식으로 해소하는 법을 배운다.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사정을 이해해달라고 하는 건 무리한 요구가 아닐까. 어차피 자라면, 그리고 차분히 설명해 주면 그들도 이해하게 될테니 그 전까지는 어른들의 인내와 양보가 필요하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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