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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Aug 17. 2020

프로토타입으로의 회귀

의외로 추억팔이가 성공하는 이유

신작 개봉의 연기 여파로 인해 재개봉 행렬이 이어지는 가운데 대만 청춘영화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나의 소녀시대>도 대열에 합류했다. 2015년작인 <나의 소녀시대>는 왕대륙이라는 배우가 국내에 알려진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대만 청춘영화의 신호탄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이후 <안녕, 나의 소녀>, <28세 미성년> 등 아류작이 국내에 개봉하는 데 물꼬를 터준 작품이 바로 <나의 소녀시대>다.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대만 청춘영화들에는 공통점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과거에 대한 향수다. <나의 소녀시대>는 과거를 추억하고, <안녕, 나의 소녀>는 대놓고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며 <28세 미성년>은 주인공의 정신연령을 과거로 돌려놓는다. 대만에서 이런 영화들이 제작되는 이유야 국내 관객으로서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국내에서는 왜 하고많은 대만영화 중에 이런 영화들이 인기를 얻는 것일까. 단순히 왕대륙, 류이호, 송운화와 같은 배우들만의 힘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고 보니 한때 네이버 평점 1위를 차지하며 주목을 받았던 주걸륜 주연의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도 과거에 관한 이야기였다.


극장의 수입구조로만 보자면 현재 극장에서 티켓을 가장 많이 소비할 수 있는 층이 30대이기 때문일 수 있다(연령대별 티켓구입률을 확인해 본 적이 없어 정확한 수치로 확인된 썰은 아니다). 한국영화의 중흥기였던 2000년대를 거쳐 한국의 극장가는 급속도로 성장했고 이 시기를 관통하며 한국 영화시장은 세계랭킹 안에 들 만큼 성장했다. 이 시기를 10~20대에 걸쳐 보낸 이들이 지금의 30~40대 관객층이다.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데 가장 거부감이 없고 영화라는 엔터테인먼트가 가장 생활과 밀접한 층이기도 하며 10대 시절에는 IMF,  현재 취업난과 3포세대로 대표되는 이들은 당연히 과거에 대한 향수가 짙은 세대이기도 하다. <나의 소녀시대>는 한국 관객보다는 대만 관객에게 더 익숙할 법한 이야기임에도 아시아 관객이 공유하는 문화적 배경이 생각보다 유사하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쉬타이위(왕대륙 분)의 난잡한 교실과 일진 문화는 90년대와 2000년대를 관통하며 인기를 끌었던 일본 드라마 <고쿠센> 시리즈를 떠올리게 하며(쉬타이위는 마츠모토 준이 연기했던 사와다 신과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은 캐릭터다), 쉬타이위와 린전신(송운화 분)이 자주 드나드는 매점 풍경은 아무래도 미드 속 고등학교 점심시간보다도 한국 관객에게도 익숙하다. 이외에도 연예인 사진과 스티커를 모으는 모습이나 소품으로 등장하는 만화잡지, 카세트 테이프 등도 이 시기를 추억하는 관객에게 좋은 추억팔이가 된다. 그리고 쉬타이위와 린전신을 이어주는 계기가 된 행운의 편지조차도.



사실 <나의 소녀시대>는 2015년작임에도 불구하고 플롯이 새롭거나 반전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기시감이 든다고 하기엔 사실 아시아 하이틴 영화의 프로토타입에 가까운 영화다. <꽃보다 남자> 시리즈도 있었지만 <꽃보다 남자> 시리즈는 재벌가가 등장하다 보니 일반인도 보기 힘든 풍경이 재현되어 하이틴 이야기의 원형이 되기엔 어렵다. 기실 <나의 소녀시대>가 소환하는 것은 그 시대의 풍경이라기 보다는 인터넷 소설이 기반이었던 당시 10대들의 감성에 더 가깝다. 어른이 된 린전신이 말하듯 어른이 되어 그렇고 그런 회사에 다니며, 그렇고 그런 연애를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 풋풋했던 시기를 <나의 소녀시대>는 스크린으로 소환하여 현실에 찌든 성인들에게 판타지를 제공한다. 연예인을 좋아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인기있는 남학생을 짝사랑했던 것이 나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공유하는 순간 관객들은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인기가 많고 공부를 잘했던 타오민민보다는 린전신에 가까운 관객이 훨씬 많기에 관객의 공감폭은 무한대로 늘어난다. 어쩌면 공부를 잘하고 인기가 많았던 이들도 사실은 린전신에 자신이 더 가까웠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결말이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고, 보다보면 유치하기까지 한 이 영화가 한국에서 작게나마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반대로 흔할 것 같은 이야기지만 의외로 스크린에서 보기는 힘든 이야기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듯 <나의 소녀시대>에서 연상되는 작품들은 아류 대만 청춘영화들을 제외하면 드라마인 <고쿠센> 시리즈나 인터넷 소설들 혹은 인터넷 소설에서 파생됐던 영화들이다. 2000년대를 가로지르며 영화시장이 성장한 한국 영화계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신인을 기용할 여지가 많은 하이틴 영화들이 보기 힘들어졌다. 아직까지 독립영화계나 학생영화 등에서는 간간이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유명 10대 후반~20대 초반 배우들이 등장하는 하이틴 영화는 드물다(드라마 쪽은 아직 많이 보인다). 영화시장이 성장하며 제작되는 영화의 규모 자체가 커지기도 했지만 초반에 언급한 주된 티켓 수입원인 30대에게 인기있을 거라는 예측이 안되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익숙하지 않은 배우들을 데리고 이제는 공감이 안될 지도 모르는 학창시절 이야기에 투자하려는 투자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현상을 좋다 나쁘다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만 있는 줄도 몰랐던 관객의 갈증을 풀어준 영화들이 놀랍게도 대만 청춘영화라는 사실은 이제 영화를 보는 제작자들의 시선이 달라져야 한다는 증거일 수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의 소녀시대>가 선방한 이유에서 배우들의 열연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일진 학생을 정겹게 그려낸 왕대륙과 상큼한 10대를 사랑스럽게 그려낸 송운화는 실제 학창시절의 추억과는 상관없이 나도 그랬을 거라는 환상을 그려주기에 충분하다(한국의 학창시절은 <파수꾼>이나 <스카이캐슬>에 가까울지 모른다). 과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의 난점 중 하나는 촌스러운 스타일링인데, 앞머리가 완전히 이마를 가리는 헤어스타일이 송운화처럼 사랑스러운 배우가 또 있을까. 양 더듬이를 늘어뜨린 듯한 머리를 귀엽게 소화하는 건 왕대륙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80~90년대생 한국 관객에게 사실 롤러장은 익숙한 공간이 아니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학창시절을 따라가다 보면 롤러장이 아닌 다른 익숙한 공간을 나도 모르게 추억 속에서 소환하게 된다. 쉬타이위가 영화 초반 린전신을 대하는 모습은 사실 폭력성이 가미되어 불편한 장면이기도 하지만 왕대륙과 송운화이기에 용서받을 수 있는 모습들일지 모른다.


있을 법한 이야기로 보이면서도 <나의 소녀시대>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판타지적 쾌감도 빼놓지 않는다. 모의고사 전교 10등 안에 든 쉬타이위가 컨닝을 했을 거라 굳게 믿은 학생주임은 쉬타이위를 단상으로 부르지 않는데 린전신은 이를 보고 반항을 하기에 이르고, 전 학생이 이에 동참하며 훈훈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현실성이 제로에 가까운 신이지만 결국 과거를 반추하며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나온 린전신처럼 많은 회사원들도 저런 봉기(?)를 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을 것이다. 어른이 된 린전신은 회사에서 해고당하지만 학생인 린전신은 쉬타이위를 구해낸다. 현실적으로 저렇게 나설 수 있는 학생도 없을 뿐더러 전교생이 이에 가담한다는 것도 말도 안되지만(특히 인기 많고 전교 1등인 학생회장이요..?) 관객은 이를 알면서도 저 땐 나도 반항적이었다고 회고한다(실제로 저렇게 반항적인 학생은 지극히 드물었을 것이다). <나의 소녀시대>는 상투적인 이야기지만 관객의 니즈를 정확히 아는 그야말로 원형에 충실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많은 영화들이 재개봉하고 있지만 <나의 소녀시대>가 재개봉한 이유는 명확해 보인다. 현실에 찌든 데다 외부적인 스트레스에 겹쳐 그야말로 친구와 공부가 세상의 전부였던 시기를 추억하고 싶은 관객이 많기 때문이다. 어서 코로나 시대가 마감되어 관객들이 스크린에서만 행복을 찾지 않고 일상에서도 행복을 느끼게 되는 날이 오길 기다려 본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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