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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Sep 07. 2020

슈퍼히어로에 대한 집착

슈퍼히어로 장르가 유독 인기인 이유

마블과 DC를 필두로 한 슈퍼히어로물의 인기는 절정을 달리고 있다. 코믹스를 기반으로 한 양대산맥 마블과 DC 출신 히어로들 이외에도 요즘에는 오리지널 스토리 기반 히어로들이나 기타 코믹스 출신들도 눈에 띈다. 특정 장르나 소재가 유행을 타는 건 산업 특성상 당연한 일이지만 슈퍼히어로 소재는 유독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중이다. 오죽하면 슈퍼히어로를 연기하지 않은 헐리우드 배우들이 대체 언제 누구를 연기할지를 점치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고통으로 가득한 삶에서 메시아를 기대하는 인류의 기복신앙적 특성 때문에 이제 종교나 신화는 가고 슈퍼히어로가 그 자리를 대체해가는 중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코믹스 위주로 등장하던 슈퍼히어로 캐릭터들이 유독 스크린에서 전성기를 누리는 이유는 한 번쯤 되짚어볼 만하다. ppl을 전혀 하지 않기에 상대적으로 자본의 영향을 덜 받고 창작자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한다는 넷플릭스에서조차 <프로젝트 파워>와 같은 졸작에 가까운 슈퍼히어로물을 공급하는 건 대체 왜일까. 넷플릭스라고 해서 언제나 일정 레벨 이상의 작품만 공급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다양성을 존중하고 창작자의 자유를 보장하는 넷플릭스가 기존 영화 제작사와 유사한 작품을 찍어낸다면(심지어 그 작품이 일정 수준 이하라면) 이 장르 자체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넷플릭스도 가입자를 유도해 산업을 유지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결국 시청자가 원하는 작품을 찍어낼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시청자는 왜 끊임없이 새로운 슈퍼히어로물을 원하는 것일까. 


<프로젝트 파워>는 5분만 지속되는 인위적인 초능력 알약이라는 설정을 제외하면 얼마 전 개봉한 또 다른 슈퍼히어로 졸작 <코드 8>과 상당히 유사한 이야기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코드 8>쪽이 훨씬 어둡기는 하지만 <프로젝트 파워>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인종차별에 대한 시선도 <코드 8>에서 이민자를 향한 시선으로 대체할 수 있을 만큼 주제의식마저 닮아 있다. 거꾸로 말하면 슈퍼히어로물 자체가 차별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가 좋은 장르라는 뜻이다. 슈퍼히어로물 이전에 유행하던 다른 장르들을 따져보면 좀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만 해도 세기의 걸작이지만 출연진 대부분(어쩌면 전원)이 백인 남성이다. 엘프 종족에 대한 묘사는 애초에 백인을 디폴트로 설정한 것이나 마찬가지고 굳이 백인일 이유가 없는 인간이나 호빗족, 난쟁이도 거의 백인 배우들이 연기한다. 판타지 장르에서 사실상 굳이 백인일 이유가 없는 캐릭터들 대부분은 백인 배우들이 연기하게 되는데 애초에 판타지 장르에서 인종차별을 잘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연극 <해리포터와 저주받은 아이>에서 헤르미온느 역을 흑인 배우가 연기한다고 했을 때 있었던 반발(?)을 떠올려 봐도 판타지 장르 자체에서 인종차별을 다루기보다는 극 외적인 요소에서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넓게 봐서 판타지 장르에 포함되는 뱀파이어 장르도 마찬가지다. 하얗게 빛나는 피부로 주로 묘사되는 뱀파이어들은 결국 백인을 묘사한 것이다. 최근 제작되는 뱀파이어 영화나 드라마들은 흑인이나 동양인도 포함하긴 하지만 메인 주인공들은 백인이 연기한다. 



반면 슈퍼히어로는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이들이 연기해도 별 이질감이 없다. 대부분 코믹스 기반이기에 본래 그림체와 유사한 외모의 배우들이 해당 역을 연기하면 유독 화제가 되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연기력으로 커버되는 경우가 많다. <콘스탄틴>만 해도 원작에서는 금발 백인 남성이 주인공이지만 영화화될 때 동서양 혼혈인 키아누 리브스가 연기했고 키아누 리브스의 대표 캐릭터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상태다(심지어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속편이 언제 나오냐고 성화다). 블랙 팬서나 샹치 등 애초에 소수자를 대표하는 캐릭터들이야 타 인종(특히 백인)이 연기할 경우 화이트워싱 등의 논란이 있을 수 있고 기존 코믹스에서 다뤄오던 이슈가 있어 웬만해서는 그럴 수도 없다(블랙 팬서가 백인이라면 와칸다라는 가상의 흑인 왕국이 필요하지도 않다). <프로젝트 파워>에서도 크레딧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름은 흑인 배우인 제이미 폭스(아트 역)이고 실제 극중에서도 메인 프로타고니스트로 등장한다. 극중 아트를 돕는 두 조력자 중 한 명은 또다른 흑인 여성인 로빈(도미닉 피시백 분)이며 다른 한 명은 백인 남성인 프랭크(조셉 고든 레빗 분)다. 즉 메인 캐릭터의 2/3가 흑인이다. 영화는 한술 더 떠 대놓고 로빈에게 "젊은 흑인 여자가 살기 힘든 건 세상 잘못"이라고 말해주고 프랭크가 로빈의 어머니 아이린의 연인인 척 하는 장면에서는 "내가 백인이라 아름다운 흑인 여성과 사는 게 잘못이냐"고 인종차별적인 시선을 이야기한다. 흑인에 관한 차별을 다루는 건 <프로젝트 파워>뿐만 아니라 <블랙 팬서>에서도 마찬가지였고 DC 드라마 시리즈 애로우버스(arrow-verse) 내의 슈퍼걸 시리즈에서도 나타난다. 슈퍼걸이 사는 지구는 심지어 우리가 사는 지구와는 다른 우주에 속해 있는데도 흑인 CEO인 지미 올슨은 자신이 흑인으로서 받을 차별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심지어 지미 올슨은 원작에서 백인 설정이었다).


슈퍼히어로 장르가 인종차별을 다룬다는 점은 결국 현실에 기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초능력을 타고났거나 인위적으로 얻은 슈퍼히어로들이 점점 줄어들고 개인 능력치에 기반한 슈퍼히어로들이 인기를 얻고 비중이 늘어나는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미국에서 마블 코믹스 캐릭터 인기투표 결과는 아직까지 스파이더맨이 1등, 헐크가 2등이지만 페이즈4까지 MCU를 이끌었던 이는 사실상 초능력은 없는 아이언맨이다. 유전자 조작 거미에게 물려 초능력을 얻고도 집세 하나 제때 못 내는 스파이더맨이 현실적인지 거대기업 CEO로 군림하면서 세상을 위해 신념을 가지고 싸우고 자기 자신도 희생할 수 있는 아이언맨이 현실적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아이언맨 쪽이 과학적으로는 더 타당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애초에 서민인 스파이더맨이 인기투표 1위인 점도 서민이 절대 다수인 독자들의 입장에서 감정적으로는 이입하기에 더 현실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예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 비현실이 배경인 판타지 장르나 신화나 설화에 기반한 뱀파이어 장르에 비해 슈퍼히어로 장르는 보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다. 이제 관객들은 실존하지 않는 곳으로 현실도피를 하기보다는 실재하는 문제들을 해결해 줄 가상의 신을 갈망한다고 봐야 한다. 이는 몇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데 관객들이 리먼 브라더스 사태 등의 경제적인 위기를 맞이하며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혀서일 수도 있고(실제로 리먼 브라더스 사태는 2008년인데 MCU의 실질적인 초석이 된 <아이언맨>이 개봉한 해이기도 하다) sns가 발달하며 실제 슈퍼히어로 역을 맡은 배우들이 사회에 공헌하는 바가 알려지면서 슈퍼히어로라는 존재가 실존하는 것처럼 느껴져서일 수도 있다(물론 병크 터트리는 배우들도 만만치 않게 많다). 어느 쪽이든 결국 관객은 이제 영화라는 매체가 현실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인지하게 되었으며 역으로 이 점이 영화산업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 점은 자명하다.



현실에 기반한 슈퍼히어로들이 인기를 얻기 시작하자 <프로젝트 파워>에서는 아예 타고난 슈퍼히어로는 없고, 5분간 초능력을 지속시켜주는 초능력 알약이라는 보다 현실적인 설정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렇게 영화산업과 관객이 영향을 주고받은 결과가 현재 스크린과 스트리밍 서비스에 나타나는 슈퍼히어로들이다. 한가지 더 짚어볼 점은 기존 코믹스가 아이들용으로 치부되던 매체라는 점이다. <로건>에서도 로건은 로라가 특정 주소로 데려다 달라는 말에 이건 그냥 코믹스에 나온 주소고 현실이 아니라고 대답하며 아이라서 코믹스를 믿었다고 여긴다. 그만큼 코믹스는 성인이 즐기는 매체가 아니라고 여기는 경향이 강했는데 이 시선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영화산업의 기술이 발전하면서다. 실제로 CG가 발달하기 이전의 코믹스 기반 영화들은 조잡하기 그지없어 정말 유치하지만 작금의 슈퍼히어로물은 스펙터클한 영상을 자랑하며 실제로 홍보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기술의 발전이 성인들의 취향을 바꾸어 놓았다고 볼 수도 있고 사실 성인들도 음지에서 즐기던 콘텐츠를 양지화했다고 볼 수도 있다(일종의 덕밍아웃이랄까..). 매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마블 영화가 대부분의 부문에는 후보에 오르지 못하지만 시각효과상 부문에는 꾸준히 후보작을 내는 것만 봐도 최소한 기술의 영역에서는 슈퍼히어로물이 전문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로젝트 파워>가 기존 슈퍼히어로물과 별반 다르지 않은 플롯을 가지고 있고 주제의식도 그닥 새롭지 않기는 하지만 동시에 슈퍼히어로라는 장르 자체가 가진 시사점과 문제점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인종차별적 시점을 다루면서 이제 흑인도 서사의 한 축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아직까지 동양인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거나 타입화된 역할로만 그려진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마블에서도 이제야 샹치를 필두로 동양인 메인 캐릭터가 등장하려는 중이고 DC에서는 요원하다. 그나마 애로우버스 내의 배트우먼 시리즈에서 동양인이 서사의 한 축으로 등장하지만 애로우버스 드라마 시리즈 전부 메인 주인공은 백인이다. 또한 흑인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도 문제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많은 경우 흑인 캐릭터들은 동양인과 마찬가지로 타입화되어 묘사되는데 가난은 기본이고 공부에는 관심이 없으며 장래희망이 래퍼 혹은 운동선수다. 로빈은 의료보험이 없어서 마약 거래를 하며 교과수업은 D를 받으면서 래퍼를 꿈꾸는 학생이고 아트 또한 돈이 없으면 입대하라는 충고를 하는 것으로 보아 본인도 과거에 가난으로 입대한 군인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안타고니스트 전원이 백인으로 그려지기는 하지만 이는 결국 백인에게 다양한 역할을 부여하는 것일 뿐 다양한 인종에 대해 다양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의식한 것인지 결국 마블은 안타고니스트를 아예 외계인 등 이질적인 존재로 그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혹자는 이를 두고 백인 남성들이 지구에서는 상대할 악인이 없어 결국 외계로 진출한 거라 해석하기도 한다(심지어 외계인 분장을 한 빌런은 대부분 백인 배우들이 연기한다). 언제나 한발 늦는 DC는 아직도 조커의 멱살을 잡는 중이고..



코로나 사태로 북미에서는 극장 대부분이 문을 닫았고 국내에서는 극장 영업이 성행하기는 하지만 관객수가 현저히 줄어든 탓에 많은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개봉일을 미뤄 줄줄이 대기만 애타게 하는 중이다. 이 와중에 넷플릭스가 영화관의 대체재로 떠오르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관객은 극장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몰입감을 그리워한다. 넷플릭스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는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넷플릭스도 이제 한발 더 나아가야 할 시점이 아닐까. <프로젝트 파워>는 슈퍼히어로 장르의 현위치를 잘 드러내 주지만 전혀 새롭지는 않다. 오랜만에 작품에 모습을 드러낸 조셉 고든 레빗의 선택이 아쉽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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