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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Sep 14. 2020

트라우마의 치료

과거를 마주하면 나아갈 수 있을까

미드나 헐리웃 영화에서 과하다 싶을 만큼 많이 쓰이는 트라우마 치료 방식이 있다. 누군가가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현재 시점에서 일상 생활에 불편을 겪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끼친다. 보통 해당 트라우마는 양육자 혹은 양육자에 준하는 이에게서 폭력을 당했거나 타인을 심하게 해친 경험에서 비롯된다. 이런 트라우마를 가진 이는 현재에 인간관계에 있어 문제가 있고 이를 치료하려 드는 이들이 있다. 빌런들은 이들이 가진 에너지를 억누르거나 반사회적인 방향으로 사용하고자 하고, 이들을 진정 위하는 이들은 이들의 과거로 들어가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치유하여 친사회적으로 변하도록 돕고자 한다. 이는 <엑스맨> 시리즈, 뱀파이어물, 늑대인간물에도 사용되어 온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다. 과거에서 원인을 찾아 해결하고자 하는 방식은 다분히 정신분석학적인데 영화에서는 시각적인 연출을 위해 보다 화려한 이야기들을 덧붙인다. 그리고 등장인물은 단순하게 선과 악으로 나뉘고 선을 선택한 자는 히어로가 되고 악을 선택한 자는 빌런이 된다. 뭐 당연한 말이긴 하다.


서사의 진행을 위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원인을 거슬러 가는 것은 필연적이다. 다만 미국의 드라마나 영화는 막대한 예산이 뒷받침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과거를 보여줄 때 판타지적인 접근법이 주로 사용된다. <엑스맨> 시리즈의 자비에 교수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엑스맨들의 과거를 들여다보고 이들을 치유하고자 했다. 미드 <뱀파이어 다이어리>시리즈와 스핀오프인 <디 오리지널스> 시리즈에서는 마녀들의 힘을 빌어 이들의 마음 속으로 직접 들어간다. 수차례의 개봉 연기를 거쳐 드디어 스크린에 도달한 <뉴 뮤턴트>는 이들의 트라우마를 현실로 불러온다. 일리야나(안야 테일러 조이 분)를 괴롭히던 스마일 맨들은 가면을 벗고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속 할로우게스트처럼 나타나 일리야나를 잡아가려 하고, 늑대인간으로 변하는 레인(메이지 윌리엄스 분)에게 폭력을 가했던 주교는 (아마도 witch를 상징하는)W자가 새겨진 불쏘시개를 들고 나타나 레인의 목에 새로운 상처를 아로새긴다. 그리고 너무나 필연적으로 이들은 과거의 상처를 다시금 들여다보고 이들을 물리쳐 공포에서 승리한 후 과거를 뒤로한 채 새로운 여정을 떠..났어야 했다. 상처를 헤집으면 그 상처를 반드시 극복할 수 있는 것일까? 상처에는 약을 발라줘야지 이를 헤집는 건 악화시킬 뿐이다.



<뉴 뮤턴트> 속 엑스맨 주니어들은 오랜 기간의 기다림을 배신하기라도 하듯 너무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과거에 사람을 해친 경험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지닌 건 로건과 로그도 마찬가지였고 이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멀어져 사회성이 바닥을 친 진 그레이도 이미 관객은 오랜 세월 지켜봐왔다. 일리야나는 자신을 해쳤던 이들로 인해 불신으로 가득차 닥터 레예스(앨리스 브라가 분)를 신임하지 못하고 새로 온 대니(블루 헌트 분)와도 투닥거린다. 사람을 해친 경험이 있는 건 로베르토(헨리 자가 분)와 캐논볼 샘(찰리 히튼 분)도 마찬가지다. 모든 엑스맨이 트라우마로 인한 사회성 결핍 문제를 겪는 건 뮤턴트가 아닌 모든 관객도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는 반증일지 모른다. 처음부터 사회생활을 잘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누구나 경험을 통해 하나씩 배워나간다. 그리고 과거에 타인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때때로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만 새로운 이들을 만날 때 경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기도 한다. 뜨거운 곳에 손을 댔다가 손을 덴 아이는 다시는 그 곳에 손을 대지 않는다. 그렇게 일리야나는 닥터 레예스를 경계하게 되지만 대니도 함께 불신한다.


<뉴 뮤턴트>는 새로운 뮤턴트들이 등장한다는 것 이외에는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다. <엑스맨> 프랜차이즈를 공포물로 재해석하겠다는 애초의 야심과는 달리 이들이 겪는 공포가 자신들의 트라우마일 뿐이라는 것이 명확해지는 순간 공포감은 힘을 잃고 무너진다. 게다가 이들은 비범한 능력을 가진 뮤턴트다. 관객은 이들이 물리적인 외부의 적을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뮤턴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자신의 과거라는 설정은 그닥 나쁘지 않지만 결국 이들의 과거를 이용하고자 하는 외부의 빌런이 드러나는 순간 서사는 기존의 엑스맨 서사를 답습한다. 그럼에도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던 이유는 성인이 된 엑스맨들과는 달리 이들에게는 실수를 하고 성장할 기회라는 치트키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뉴 뮤턴트> 속 뮤턴트들은 전원 자신의 능력으로 인해 누군가를 해친 이력이 있다. 하지만 일리야나와 레인은 정당방위였고 샘, 로베르토, 대니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줄도 모른 채 해친 상황이다(굳이 말하자면 심신미약인가..). 이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과거를 뒤집어 엎어 맞서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잘못한 게 아니라고 말해줄 누군가였을지도 모른다.



안됐지만 서사상 당연하게도 닥터 레예스는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고 결국 이들은 서로에 의지해 그들이 갇힌 곳을 탈출할 수밖에 없다. 서사가 비로소 시작되는 것은 이 지점인데 너무 늦다. 이전까지 샘은 자신의 힘을 이용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고 로베르토는 부잣집 자제분인데도 타인과 접촉하며 신체의 온도가 급격하게 올라갈 수 있어 숫총각 상태다(얼마든지 여자들을 만날 수 있지만 신체적 조건으로 인해 그럴 수 없다는 게 콤플렉스라니 이 얼마나 1차원적인지..). 일리야나는 그냥 또라이(..)처럼 그려지고 그나마 정상으로 보이는 건 레인 뿐이다. 샘은 광산을 날려버린 자기 자신을 증오하며 그 과거를 끝도 없이 마주하지만 극이 끝날 때까지 극복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로베르토는 여자친구를 실수로 태워버린 과거로 인해 폭주하지만 샘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는 실패한다. <뉴 뮤턴트>는 문제가 많은 10대들을 조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샘과 로베르토의 서사를 활용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대니는 자신의 공포가 만들어낸 데몬 베어로 인해 인디언 보호구역 하나를 날려버렸고 극의 후반까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대니와 레인의 로맨스 서사로 인해 <엑스맨> 프랜차이즈가 받아들인 소수자의 경계는 넓어졌지만 결국 대니를 구원한 건 대니의 가족이었다. 대니와 레인의 서사는 성 소수자 포용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서로의 트라우마를 구원하기보다는 각자도생에서 마무리된다. 그나마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고 극복한 건 일리야나뿐이다. 일리야나는 록히드와 함께 다른 공간으로 도피하다가 결정적인 순간 스마일맨을 물리치고 데몬 베어를 마주하기에 이른다. 기실 이 장면에서도 일리야나가 스스로 과거를 극복했다기보다는 샘이 밀어붙여 해치운 쪽에 가깝다. 결국 뉴 뮤턴트들은 전원 자신의 트라우마를 현실로 불러내고도 제대로 물리치는 데는 실패한 셈이다.



<엑스맨> 시리즈에서 엑스맨들이 길을 잃고 헤맬 때 이들을 이끌었던 이는 마음씨가 넓은 자비에 교수였다. 자비에 교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는 로건이 그 역할을 했다. 뉴 뮤턴트들에게는 자비에 교수도 로건도 없다. 단순히 과거를 현실로 불러내는 것으로는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없다.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쳐패스트>에서 자비에 교수와 매그니토가 로건을 과거로 보내야 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뉴 뮤턴트들은 시설 밖으로 나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자비에 교수를 만나기 전까지 계속해서 과거를 끌어안고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십세기 폭스사가 디즈니에 인수되기 전 마지막 <엑스맨> 이야기인 <뉴 뮤턴트>는 그렇게 아쉬움을 남긴다. 나는 일리야나가 타인을 긍정하기를, 샘이 고향을 방문하기를, 로베르토가 타인을 포옹하기를, 대니와 레인이 서로에 의지해 이 세상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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