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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Dec 14. 2020

세관을 통과하지 못한 정서

리메이크의 함정

헐리우드에 이어 충무로도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씨가 말랐는지 리메이크작이 속속 도착하고 있다. 금주 공개된 <조제>는 무려 2003년작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리메이크 버전이다. 최근들어 한일 영화계에 리메이크가 늘어나는 와중에 일본에서는 한국의 스릴러 영화들(ex. <내가 살인범이다>를 일본에서 <22년 후의 고백>으로 리메이크)을, 한국에서는 일본의 서정적인 영화들을 리메이크(ex. <리틀 포레스트>를 <리틀 포레스트>로 리메이크)하는 경향을 보인다. 아마도 각 국가에서 부족한 점을 타 국가에서 빌려오는 모양새가 아닐까 싶은데 매번 리메이크작들은 함정에 빠진다. 각 국가의 정서를 반영한 remake를 하는 대신 해당 작품이 가지고 있었던 정서를 답습하려다 겉모습만 빌려온 repeat이 된다는 점이다. 이런 리메이크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해당 영화가 만들어지던 시기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세기말을 지나 일본 경제의 버블이 꺼져가던 2000년대 초반 젊은이들의 불안한 정서를 멜로와 함께 그리는 동시에 일본 특유의 착잡한 정서를 가슴시리게 담아낸 작품이었다. 그리고 17년이 지나 한국에서 리메이크된 <조제>는 플롯을 빌려오는 동시에 정서를 한국화하는 데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정서 이외에도 캐릭터 해석에서도 일본 원작과 한국 리메이크작은 차이를 보이는데 그 과정에서 조제가 가지고 있었던 매력이 큰 비율로 증발해 버렸다. 원작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속 조제를 연기한 이케와키 치즈루는 귀여운 사투리와 함께 나이를 알 수 없는 얼굴 그리고 작은 몸에 당찬 성격을 야무지게 표현해냈다. 통통한 얼굴과 단발로 어린아이처럼 보이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 분)보다도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걷지 못하면서도 집 안을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꾸러기이기도 했다. 조제와 츠네오의 조우는 남들이 돌아다니지 않는 시간에라도 세상을 구경하고자 했던 조제의 의지 때문에 발생한 소형사고였다. 반면 한지민이 연기한 조제는 어른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약자로만 그려진다. 조제와 영석(남주혁 분)이 처음으로 마주치게 된 이유는 조제가 성추행범으로부터 달아나다가 고꾸라졌기 때문이다. 이케와키의 조제는 처음 본 츠네오에게 요리를 해주고 맛있다는 칭찬에 "당연하지, 누가 만든 건데"라고 대꾸한다. 한지민의 조제는 밥을 먹는 영석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기껏 설정한 조제의 반말은 조제를 강해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성이 떨어져 보이게 한다(참고로 원작에서도 츠네오는 초반에 존칭어, 조제는 타메구치(굳이 번역하자면 반말)를 사용한다). 다른 많은 점을 고려하더라도 리메이크작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조제가 한없이 나약한 모습으로만 그려진 것이었다. 특히 한지민이 전작 <미쓰백>에서 용감하게 잘 알지도 못하던 소녀를 구해오던 미쓰백을 연기했던 것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러하다.



본격적으로 정서에 대한 썰을 풀기 전에, 말했듯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2003년작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불과 20여년 전이지만 당시에는 스마트폰이 흔하지 않았다. 거기다 신문물을 받아들이기보다 구시대의 유물에 천착하는 일본인들의 특성상 오래된 책을 쌓아두고, 남이 입던 옷을 아무렇게나 주워입는 조제의 모습은 관서 사투리와 꽤 잘 어울렸다. 이런 배경과 맞물려 조제와 츠네오가 만든 추억은 낡은 사진처럼 스크린에 조각되었고 이 커플이 헤어지며 새로운 시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럽게 묘사되었다. 반면 한지민의 조제가 낡은 책을 쌓아두는 것은 과거에 천착하는 모습이 아니라 가난의 흔적처럼 보인다. 영석이 스마트폰을 들고 조제에게 구글맵으로 세상을 보여주는 모습은 조제를 세상 밖으로 꺼내는 것이 아닌 원시인을 계몽시키려는 문명인처럼 묘사된다. 온돌이 없는 일본에서야 지금도 고타츠를 사용하기에 조제가 집에서 담요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 가난의 상징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온돌이 보편화된 한국에서 조제가 기름을 쓰는 난로를 사용하는 모습은 조제의 처지를 더 비참하게 묘사할 뿐이다. 원작의 조제는 츠네오를 통해 세상 밖으로 태어났지만 리메이크작의 조제는 영석을 통해 자신이 경제적으로 최하계급에 있다는 현실을 직시한다. 스마트폰을 처음 보며 신기해하고 여행서를 읽은 것만으로 세상을 모두 다 가보았다고 하는 한지민의 조제는 태아와 같았던 이케와키의 조제와 달리 고집센 노인네처럼 보인다.


조제를 지나 원작의 츠네오, 리메이크작의 영석 또한 리메이크의 후폭풍(?)을 맞았다. 2000년대 초반의 일본 사회는 젊은이들의 취직이 어려워지던 시기였고 일본 경제의 버블이 꺼지며 불안감을 사회 전반적인 불안감을 조성했다. 이런 배경에서 정장을 입고 카지노 아르바이트를 하는 츠네오의 모습은 퇴폐 그 자체인 동시에 동양의 오랜 도박인 마작과 서양에서 건너온 신문물인 정장이 기묘하게 맞물리는 시대변화를 반영했다. 이는 또한 당시 일본에서 화두가 되기도 했던 프리터족을 설핏 보여주며 젊은이들의 절망과 생존을 묘사해 보인 것이기도 하다. 츠네오가 조제를 두고도 여성편력을 보이는 모습은 프리터족처럼 어디에도 적을 두지 못하는 개자식불안한 청년의 심리를 반영한 것이다. 반면 영석은 지방대 출신에 취직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잠시나마 보여주긴 하지만 연줄을 통해 인턴자리를 쉽게 구하고 권력자라 할 수 있는 교수와 바람을 피며 어느 정도 돌아갈 곳이 있음을 암시한다(한국에서는 프리터로는 생계를 꾸리기가 영 어려워 현실적으로 프리터족이 없기에 츠네오의 배경을 복붙하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영석의 여성편력은 영석이 큰 키와 아름다운 외모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에 있음을 시사하며 주민등록이 말소된 조제와 대척점에 선다. 조제와 영석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건 조제와 츠네오처럼 감정적으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조제는 이를 깨닫고 영석에게 불편하니 오지 말아달라고 하지만 영석은 이를 깨닫지 못했기에 조제를 다시 찾아간다. 그리고 조제가 마침내 자유롭게 유영하는 물고기들을 보며 자신의 추운 이불 속에서 영석이 함께 떨게 하는 대신 본래 속한 세계로 돌려보내기로 결심했을 때 조제와 영석은 헤어진다.



원작에서나 리메이크작에서나 조제의 요리는 중요한 요소다. 헌데 요리가 활용되는 방식이 아주 다르다. 이케와키의 조제에게 요리란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무언가였으며, 요리 도중 쿵 하고 몸을 떨구듯이 내려오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장애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매개체이기도 했다. 조제가 만든 일본식 한상은 화려하진 않아도 정갈했고 계란말이처럼 꽤 요리실력을 필요로 하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츠네오는 조제가 차린 식사를 언제나 맛있게 먹었고 조제의 부엌은 깔끔하며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반면 한지민의 조제에게 요리란 '해줄 건 없고' 자신을 데려다 준 영석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보답으로 기능한다. 조제가 차린 밥상은 단촐하고 기본 밑반찬이라 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단순하다. 그렇기에 조제는 계란말이와 같은 음식을 만드는 대신 스팸을 굽고 고기라곤 보이지 않는 국을 끓인다. 영석은 결코 음식이 맛있다고 반응하는 법이 없으며 그런 영석을 보고 조제는 "독이라도 들었을까봐 그러냐"고 반응한다. 츠네오는 조제가 좋아할 만한 요리 재료를 가져오지만 영석은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받은 스팸을 조제에게 건넨다(심지어 "나에게는 쓰레기"라고 표현해 조제의 자존심에 상처를 준다). 조제의 부엌은 어둡고 칙칙하며 비위생적으로 보인다. 현해탄을 건너면서 조제는 요리라는 취미를 잃어버린 것일까?


<조제>는 원작에 짙게 깔려있던 일본식 정서를 세관에(?) 맡겨두고 플롯만 빌려와 한국식으로 재탄생시키려다 실패했다. 가장 큰 이유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조제 캐릭터의 잘못된 해석이지만 캐릭터 자체의 문제보다도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한지민의 조제는 느릿느릿 이야기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표현을 사용하며 상상으로 자신의 전사를 지어낸다. "병들 가운데 '혼자' 위스키병인 것"을 달라고 하거나 이야기할 때마다 가족 설정이 바뀌는 것이 단적인 예다. 성인 여성이 고아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사회성이 부재하고 현실감이 없도록 설정하는 것은 해당 사회계층에게 실례다. 조제가 독특한 성격과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는데 없었습니다리메이크작의 조제는 원작의 조제에 비해 훨씬 수동적이며 불필요하게 4차원적이다. 이런 쓸데없는 설정들 때문에 영석이 조제에게 매혹되는 과정에서 설득력이 떨어지고 헤어짐을 결심하는 과정도 뜬금없다. 기실 현실감이 없기는 영석도 마찬가지다. 처음 보는 사람을 쉽게 도와주고 계속 찾아가고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면서 온갖 착한 척은 다 하면서 교수와 바람피고 그와중에 후배를 유혹하고 나중엔 그 후배랑 결혼하고(이거 써놓고 나니 쓰레기네)...



<조제>는 원작을 떠올리게 하는 배경과 설정들로 가득하다. 대관람차나 수족관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그 배경에 녹아들었던 정서는 모두 휘발되고 어정쩡한 플롯만 남아 모든 짐을 배우들에게 덮어씌웠다. 원작의 조제가 전동 휠체어를 타고 거리로 나설 때는 세상을 어떻게든 잘 살아가리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리메이크작의 조제는 자동차 운전을 하면서도 불안해 보인다. 츠네오를 만난 조제는 츠네오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배웠지만 영석을 만난 조제는 애초에 영석을 만날 필요가 없었다는 걸 깨달은 건 아닐까. 조제에게 가장 큰 비극은 관세에서 정서 비용을 지불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17년이나 지나 굳이 현해탄을 건넌 것이다. 조제가 말했듯이 조제는 (일본에) 갇혀있는 게 나았다.


*모든 이미지 출처는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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