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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Dec 07. 2020

노래 한 곡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글리>는 현실적이었다

뮤지컬은 영화화하기에 매혹적인 장르다. 특히 무대에 이미 올려진 적 있는 뮤지컬을 영화화하는 경우 무대에서는 구현할 수 없었던 것들을 CG나 편집으로 구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뮤지컬과 영화 사이의 간극이 그만큼 메워지지 않는 경우가 간혹 발생하기도 한다. 각 장르의 특성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대에서 스크린으로 넘어오면서 각 장르의 단점을 보완하는 동시에 장점이 같이 사라지는 경우다. 아마도 이런 연유로 원작이 있는 뮤지컬 영화들은 그럭저럭 호평은 받는 편이지만 평론가들로부터 최고점을 받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뮤지컬의 최대 장점인 관객과의 교감 및 호흡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편집과 CG가 대체하면서 생긴 간극을 메우는 데 능한 감독은 드물기 때문이다. 애초에 뮤지컬의 현장성은 관객과의 호흡, 공연 당일 분위기 등에 의해 좌우되고 같은 작품이라도 매 공연이 차이점을 갖는 데서 매력을 갖는데 영화라는 장르로 옮겨오는 순간 이 장점은 필연적으로 포기해야 한다. 반면 영화라는 장르는 무대에서는 클로즈업 할 수 없는 것들을 확대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데 그만큼 현실성과 세밀함이라는 장점을 갖게 된다. 하지만 뮤지컬 장르에서는 크게 필요로 하는 장점이 아니기에 렌즈의 장점은 뮤지컬이라는 맞수를 만나 무너지고 만다.


뮤지컬을 보러가는 관객의 심리는 일반적으로 어두운 현실세계를 목도하거나 사회적인 의제의 현안을 파헤치는 데 있지 않다. <스위니 토드>와 같은 예외적인 작품들을 제외하면 뮤지컬 장르는 대개 밝고 화려하다. 국내에는 의외로(?) 수입되지 않은 편견인데,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장르의 팬은 주로 게이로 대표되는 소수자들이라는 편견이 있다(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뮤지컬 미드 <글리>에서 남성 글리클럽 멤버들이 공격당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게이스럽다'는 것이다). 뮤지컬처럼 인싸스러운(?) 산업의 덕후가 성 소수자라는 편견이 상당히 아이러니하기는 하나 웨스트엔드나 브로드웨이에서 유명한 작품 가운데 소수자를 다룬 작품이 종종 보이기에 생겨난 편견일 수도 있다(단편적인 예로 <헤드윅>). 밝은 음악과 화려한 의상, 현란한 안무는 사회적인 문제를 친근하게 다루며 해당 문제가 가진 어두운 단면을 아름답게 포장하여 관객의 눈을 하룻밤 가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와 동시에 우리 모두는 하나쯤 마이너리티 정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다같이 화합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자는 희망찬 메세지를 던져주기도 한다. 문제는 이 장르가 렌즈 앞에 섰을 때다. 현실 문제를 확대해서 보여주는 현미경을 형형색색의 화려함으로 가렸을 때 두 장르는 불협화음을 일으키곤 한다. 넷플릭스 뮤지컬영화 <더 프롬>은 기어이 여기서 삑사리를 낸다.



자신의 파트너를 데리고 졸업파티인 프롬에 가고 싶어하는 레즈비언 소녀 엠마(조 엘런 펠먼 분)의 이야기 <더 프롬>은 많은 부분 미드 <글리>에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엠마의 여자친구 알리사(아리아나 데보스 분)는 패션부터 <글리>의 레이첼(레아 미첼 분)과 매우 닮아 있고 성 소수자 이야기는 <글리> 전 시즌 내내 닳고 닳도록 다룬 이야기다. 동성애자인 자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모 이야기는 구시대의 유물 수준이고 <글리>는 더 나아가 다양한 인종과 가족형태, 장애인, 미혼모까지 감싸안았다. 하지만 <글리>와 <더 프롬>이 갈라지는 부분은 현실성이다. 러닝타임이 제한된 <더 프롬>과는 달리 무려 6시즌에 걸쳐 시간이 있었던 <글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이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다 세밀하게 보여주었다. 물론 <글리>마저도 드라마이기에 주연 캐릭터 대부분이 해피엔딩을 맞는 판타지로 막을 내렸지만 최소한 그들은 노래 한 곡으로 세상이 바뀔 거라고 믿지는 않았었다. 레이첼은 뉴욕 드라마스쿨의 오디션에 낙방했다가 재도전하고 우여곡절 끝에 뮤지컬 주연도 맡지만 해고당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글리>의 원년멤버들(레이첼, 핀, 커트, 퀸, 머세이디스, 티나, 산타나, 브리트니 등)은 졸업할 때까지 고등학교 뮤지컬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중간에 학교에서 예산을 편성해 주지 않아 글리클럽이 사라질 위기에까지 처했었다. 이에 비하면 <더 프롬>은 순진할 만큼 서사를 쉽게 끌어나간다. 


브로드웨이의 스타들이 신작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인디애나 시골까지 내려와 레즈비언 소녀가 프롬에 참가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설정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이게 문제라면 <오페라의 유령>은 오페라 극장 지하에 사람이 산다는 전제가 문제제기되어야 마땅하다. 문제는 그 이후다. 뮤지컬 배우 디디(메릴 스트립 분)와 배리(제임스 코든 분), 앤지(니콜 키드먼 분), 트렌트(앤드류 라넬스 분)가 노래하는 순간 듣는 이들은 모두 이들의 마법에 빠진다. 특히 쇼핑몰에서 트렌트가 10대들을 설득하는 수용송(번역이 하.. acceptance song) 한 곡으로 전교생이 엠마와 알리사를 받아들인다는 설정은 가히 해리포터 시리즈보다 더한 판타지에 가깝다. 학교폭력이 노래 한 곡으로 해결될 것이었다면 이 세상은 이미 사랑과 평화로 차고 넘칠 것이다. <글리>의 응원단 단장이자 학교 최고의 퀸카였던 퀸(다이애나 애그론 분)은 임신한 사실이 밝혀지자 바로 응원단에서 쫓겨나고 글리클럽의 정식 멤버가 되면서 퀸카 자리를 잃는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학교에서 소위 말하는 잘나가던 멤버들조차 자신의 소수자성이 드러나고 글리클럽에 있던 학교서열 최하위 소수자들과 어울리는 순간 서열이 함께 추락한다. 하위서열의 학생들이 교내에서 받아들여지고 인기스타로 거듭나는 일은 <글리> 내에서는 결코 벌어지지 않는다. 이들은 졸업할 때까지 얼굴에 슬러시를 맞았고 사회로 나가 성공하기 전까지는 결코 위로 올라설 수 없었다. <더 프롬>은 이 과정을 잔인하게 생략하고 엠마와 알리사가 모두에게 인정받는 판타지를 스크린에 그려올린다.



유튜브나 트위터가 발달하고 SNS에서 튀는 발언으로 주목받은 이들이 방송가에 진출하는 일은 한국에서도 드문 일은 아니게 되었다. 따라서 엠마가 우연한 계기로 세간의 주목을 받고 방송에 나갈 기회를 잡는 것은 그다지 비현실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진짜 비현실적인 부분은 엠마의 노래 영상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내는 장면이다. 현실이었다면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이들이 이미 댓글테러를 한차례 하고 지나갔을 것이며 엠마를 거리에서 알아본 이들이 린치나 안했으면 다행이다. <글리>의 커트(크리스 콜퍼 분)는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아 뉴욕 드라마스쿨에 합격했지만 여전히 거리에서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이들에게 구타당한다. 글리클럽과 애증관계에 있는 체육선생 수(제인 린치 분)는 전 시즌이 막을 내릴 때까지 글리클럽을 향한 적대적인 태도를 쉽게 바꾸지 못한다(희한할 정도로 커트와 블레인(대런 크리스 분) 커플을 응원하기는 한다). 그만큼 사람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다. 퀸은 임신 사실을 들키자마자 집에서도 쫓겨난다. <더 프롬>을 본 성소수자 청소년이 세상에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긍정적인 면이 더 클까, 아니면 세상의 밝은 면만 보고 세상으로 나갔다가 상처받을 부정적인 면이 더 클까. 연예인 최초로 커밍아웃을 한 홍석천은 사실 커밍아웃을 권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그만큼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이 소수자들에게는 더 큰 피해로 돌아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데 영화에서는 이를 지나치게 밝게만 묘사한다.


소수자들의 삶이 어떤 식으로든 세상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들은 보이든 보이지 않든 존재하며 다수자만큼이나 미디어에 노출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소수자를 다루는 데는 그만큼 신중함이 필요하다. 더군다나 <더 프롬>에서 구원자로 나타나는 이들은 수려한 외모 혹은 인기를 가진 헐리우드 연예인들이다. 많은 소수자의 삶은 화려한 구원과는 거리가 있으며 실질적으로 이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방법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장기적인 의식과 제도의 개선이다. 비록 시즌이 갈수록 막장으로 치닫기는 했으나 <글리> 제작진은 이를 분명히 알고 있었고 6년이 지나도록 세상이 크게 변화하지는 않았다는 점도 드라마에 반영했다. 동성애자 자녀를 받아들이지 못하던 부모가 브로드웨이 스타들의 노래 몇 곡을 듣고 변화할 수 있을까? 만천하에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드러낸 엠마는 과연 안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엠마가 통과한 프롬은 성인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 아닌 소수자로서 거쳐야 할 고난의 여정 중 첫 번째 관문이었을 뿐이다. 앞으로 엠마는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직장에서 거절당하거나 차별받을 것이며 최악의 경우 생존권을 위협받을 것이다. <더 프롬>은 이런 부작용은 가볍게 눈감고 화려한 조명으로 감싸버린다(..).



<더 프롬>이 다루는 주제가 결코 가볍지는 않다. 많은 예술인들이 그러했듯 <더 프롬>도 차별에 반대하며 더 넓고 다양한 세상을 포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정말 우연히도 구원자 임무를 띠고 온 이들은 어째서 전원 백인이며, 여성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걸까. 고등학교의 퀸카와 킹카가 전원 백인인 이유는 현실반영인가, 비백인 인종이 인기인일 가능성을 무시하는 것인가. 차별을 배격하는 이들치곤 지나치게 어설픈 <더 프롬>은 이미 5년 전 종영한 <글리>보다도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아니, 프롬에서 따돌림당하는 이야기는 1976년 <캐리> 쪽이 더 현실적일지도 모른다. 나 또한 노래 한 곡이 세상을 구원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러기엔 세상이 너무나 타락했다는 걸 <더 프롬>은 그저 모르고 싶었던 걸까.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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