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 Dec 17. 2020

DC의 세대교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DC 드라마를 보는 이유

슈퍼히어로물 가운데 현재 단연 선두를 달리고 있는 건 마블 스튜디오의 히어로들입니다. DC가 뒤를 바짝.. 쫓고 있다기엔 영화계에서는 영 힘을 못 쓰고 있죠. 반면 드라마계에서는 DC도 활약상이 꽤 괜찮은 편입니다. 사실 드라마 쪽에서는 마블 드라마보다 DC의 드라마가 더 인기가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실제 시청률로 비교해본 적은 없지만 필자 및 지인피셜 마블 드라마는 영 재미가 없습니다(<데어데블> 1시즌 보다가 못견디고 끈 자..). 영화가 잘 나가는 것에 비하면 신기할 정도죠. 헌데 DC의 드라마는 영화계에서 영 맥을 못 추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시즌이 갈수록 막장으로 치닫는 미드의 관례(?)를 DC드라마라고 피해갈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DC 드라마는 생각보다 봐줄 만합니다. 디즈니가 디즈니 플러스를 런칭하면서 마블의 작품들은 이제 대부분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서만 볼 수 있지만 감사하게도 DC 드라마는 대부분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이 가능합니다(아쉽게도 <콘스탄틴>은 서비스가 안됩니다). 아직 아쉬운 점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DC에서 받아들이는 소수자의 폭이 꽤 넓은 편임을 감안하면 넷플릭스에 안착한 것이 당연해 보이기도 하는군요.


개별 히어로 드라마 시리즈가 많아지면서 DC도 마블처럼 크로스오버를 기획했습니다. 영화에서는 저스티스 리그를 창단했지만 망했습니다드라마에서는 매 시즌 한 번씩 크로스오버 이벤트를 만들어 돌아가면서 DC의 히어로들이 다같이 힘을 합쳐 빌런을 물리치곤 합니다. 처음에는 꽤 신선하기도 했고 시리즈끼리 겹치는 재미도 있어 볼만했습니다. 크로스오버를 위한 크로스오버로 인해 종종 막장으로 치닫긴 했습니다만(지지난 시즌에서 결국 빌런이 외계인인 건 너무했죠) 이번 시즌의 크로스오버는 꽤 의미가 있었다고 봅니다. 우선 이제 8시즌이나 된 애로우의 은퇴를 자연스럽게 마무리했습니다. 또한 나름 각 드라마에서 크로스오버의 후유증(?)을 잘 이어간 편이기도 합니다. 특히 크로스오버 사건 이후 배트우먼이 겪어야 했던 일들은 배트우먼의 비극을 한층 강화해 새로 등장한 배트우먼이 DC에 안착하는 데 큰 공을 세웠죠. DC 드라마 대부분이 어둡거나 비극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는 데 반해 밝은 편이라 매 크로스오버마다 붕 뜨다가 급기야 지난 크로스오버는 건너뛴 <DC 레전드 오브 투모로우>팀은 이번 크로스오버에서는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습니다. 거기다 이번 크로스오버는 단순 크로스오버를 넘어서서 <스몰빌>, <저스티스 리그> 등 과거와 현재 DC의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했던 배우들이 해당 배역을 실제로 다시 맡아 추억팔이로까지 이어지기도 했죠(에즈라 밀러도 나왔는데 키아누 오빠는 왜 안나왔어요ㅠ?). 많은 히어로가 은퇴한 시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많은 히어로를 한 번에 볼 수 있었던 시즌이라는 점에서 2019년 말~2020년에 걸친 DC 드라마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드라마별로 한 편씩 글은 써볼 생각입니다만 그 전에 전체적으로 이번 시즌이 어땠는지 짚고 넘어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 해당 시리즈는 <애로우 8>, <플래시 6>, <슈퍼걸 5>, <DC 레전드 오브 투모로우 5>, <배트우먼 1>입니다. 언급한 대로 애로우는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고 배트우먼이 새롭게 합류했습니다. 다만 배트우먼/케이트 케인을 연기한 루비 로즈는 첫 시즌이 마지막 시즌이 되었고 <배트우먼 2>부터는 새로운 배우가 배트우먼으로 합류한다고 합니다. 루비 로즈의 배트우먼이 여러가지로 상징성이 강했고 배우 본인과도 굉장히 잘 어울렸기에 아쉽습니다. <애로우>로 데뷔했다가 <DC 레전드 오브 투모로우> 팀으로 옮겨갔던 아톰/레이 팔머도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모양새입니다. 애초에 레이 팔머를 연기한 브랜든 라우스는 영화 <슈퍼맨 리턴즈>로 명성을 얻었고 이번 크로스오버에서 실제 다시 한번 슈퍼맨을 연기하기도 했죠. <슈퍼걸> 시리즈는 다음 시즌인 6가 마지막 시즌이고 <슈퍼맨과 로이스 레인>이 새롭게 DC라인에 등장한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슈퍼걸> 리뷰에서 다시 한번 이야기하겠지만 사실 섭섭합니다. DC 드라마 최초 솔로 여성 히어로 시리즈였던 <슈퍼걸>이 <애로우>만큼의 시즌 수를 채우지 못하고 은퇴하는 것도, 그 자리에 슈퍼맨이 돌아오는 것도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가는 의문이 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굳이 남성 히어로를 데려올 거였다면 콘스탄틴을 부활시키는 것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콘스탄틴 시청률 왜그랬어..)..


<애로우>를 처음 보기 시작했을 때가 기억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시즌 1은 아주 잘 만든 시리즈는 아니었습니다. 히어로의 탄생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에 급격한 전개보다는 서서히 배경을 설명하는 정도에 그쳤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무래도 슈퍼히어로물은 영화의 호흡에 익숙하다보니 방탕아였던 올리버 퀸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오랜 에피소드에 걸쳐 자신의 전사를 설명하는 게 좀 지루했습니다. 그럼에도 매 화마다 액션신도 있었고 올리버의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는 재미가 있었죠(물론 미드답게 비밀 하나가 밝혀지면 다른 비밀 수십개가 줄줄이 딸려오긴 했습니다만). 이후 시즌 2부터는 올리버의 전사를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좀더 드라마에 탄력이 붙었습니다. 그리고 배트맨처럼 초능력은 없고 근육만으로 빌런을 상대하던 DC의 세계에 드디어 초능력자인 플래시가 합류합니다. 플래시는 <애로우>를 통해 데뷔했고 다음 시즌 정식으로 자신만의 라인을 런칭하게 되죠. 플래시와 애로우의 크로스오버로 재미를 본 DC는 이어서(아마도 <맨 오브 스틸>과 <배트맨 대 슈퍼맨>의 처참한 실패로 슈퍼맨 대신) 여성 솔로 히어로인 슈퍼걸을 데뷔시킵니다. 이와 동시에 <애로우>시리즈와 <플래시> 시리즈에서 남아돌던(?) 캐릭터들을 그러모아 <DC 레전드 오브 투모로우> 라인을 선보이죠. 이래저래 <슈퍼걸> 시즌 1, 2는 여러가지로 애증의 시리즈였습니다만.. 망시즌을 등에 업고 <슈퍼걸>은 시즌 3부터는 보다 안정된 서사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DC 레전드 오브 투모로우> 시리즈는 애초에 컨셉이 병맛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시즌 2부터 캡틴으로 활약한 화이트 카나리/사라 랜스의 비극적인 과거를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분위기가 밝고 종종 우스꽝스럽습니다(비보를 아는 자 웃지말라). 그리고 막장으로 치닫던 이 시리즈들을 의리로 볼 때쯤 배트우먼이 등장했습니다.



플래시가 등장하면서 입자가속기 사고로 DC 세계관 전반에 메타휴먼들이 퍼져버렸고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DC는 많은 히어로들을 초능력자로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담 시에는 입자가속기의 영향이 없었던 건지 아직까지 초능력자 빌런은 없고 그냥 싸이코패스들의 무법천지입니다. 이 와중에 등장한 배트우먼은 애로우나 배트맨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초능력은 없는 히어로입니다. 게다가 DC는 처음부터 커밍아웃을 한 여배우를 물색했고 이에 등장한 배우가 바로 루비 로즈였습니다(루비 로즈는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입니다). 배트우먼 티저가 등장하자마자 유튜브에 많은 악플이 달리기도 했고, DC가 아무래도 <슈퍼걸>도 그렇고 여성 히어로물에는 돈을 좀 덜 쓰는 티가 나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트우먼>은 꽤 잘 만든 드라마입니다. 물론 이제는 빌런조차도 자신의 철학에 따라 움직이는 마블과는 달리 DC가 아직도 조커의 멱살을 잡고 있는 만큼 고담시의 범죄자들은 심하게 1차원적입니다. 시즌 1의 최종보스로 군림한 앨리스가 자신의 트라우마로 인해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다는 설정도 범행 동기가 사회의 부패나 악습을 다루는 대신 사적인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또한 배트우먼 자신의 서사를 만들어낸다기보다는 배트맨의 유산을 물려받은 느낌이 강합니다. 배트맨과 조커처럼 배트우먼의 숙적인 앨리스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최근작 <조커>에서 실제 조커가 브루스 웨인과 형제지간일 가능성이 암시되기도 했는데 앨리스와 케이트는 실제로 쌍둥이 자매죠. 브루스는 조실부모했는데 케이트 또한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 사고로 어머니와 자매를 잃었습니다. 애초에 케이트가 배트우먼이 된 건 케이트와 브루스가 사촌지간이기 때문이니 뭐 어쩔 수 없나 싶기도 하네요. 잘 만든 드라마라고 해놓고 나 왜 이렇게 부정적으로..


다음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하는 슈퍼걸은 보내주기가 아쉬운 히어로입니다. 슈퍼걸 또한 배트우먼과 마찬가지로 사촌인 슈퍼맨의 영향을 상당히 강하게 받았죠. 시즌 1에서는 슈퍼걸이 빌런을 물리치다가 힘에 부쳐 결국 메트로폴리스에 있던 슈퍼맨이 도와주러 오는 굴욕(?) 에피소드도 있었습니다. 애로우나 플래시는 데뷔하면서 본인의 기량 부족으로 다른 히어로의 도움을 받는 일이 극히 드물거나 보조적인 도움을 받는 정도였는데 배트우먼과 슈퍼걸은 유독 기량부족으로 묘사됩니다. 케이트 케인은 사관학교 남녀 통틀어 압도적인 전체 1등 아니었던가요. 하지만 시즌이 갈수록 슈퍼걸은 자신만의 장점과 철학을 가진 히어로로 거듭났고 조력자와 친구 대부분이 여성 캐릭터들로 채워지면서 여성들이 철학적인 논쟁을 넘어 전쟁을 벌이는 진풍경을 보여주었습니다. 시발점이 됐던 사건이 시즌 3에서 경찰인 사만다가 범죄자들을 설득하는 중에 슈퍼걸이 건물을 다 부수고 범죄자를 잡아간 건에 대한 논쟁입니다. 사만다는 더 큰 피해를 입히지 않고 범인들을 제압할 수 있었지만 슈퍼걸이 굳이 피해를 입혀가면서 영웅이 되려고 했다고 하죠. 반면 슈퍼걸은 자신의 방식이 과격했지만 신속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런 논쟁은 이후 시즌들에서 레나 루터와의 우정과 전쟁으로 발전합니다. 슈퍼걸 또한 결국 궁극적인 빌런이 렉스 루터가 되고 말았다는 점이 아쉽기는 합니다만 당분간 이만큼 여성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슈퍼히어로 드라마를 보기도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작품성이 매 시즌 어느 정도 보장됐던 <플래시>는 드디어 막장으로 가는 느낌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간 플래시/배리 앨런의 원동력이었던 조실부모한 트라우마를 이제 사골이 되도록 우려먹어 더 쓸 수가 없게 되기도 했고, 이 와중에 비극의 진원지를 아내가 된 아이리스에게 억지로 옮기다 보니.. 지난 시즌에서는 미래에서 온 딸에게 비극적인 사건이 있기도 했죠. 그러고 보니 플래시는 유독 가족이 변을 많이 당하는 편이군요. DC 세계관에 속한 히어로의 가족들은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본인도 히어로가 되든가 그냥 연을 끊는 게 나아보일 지경입니다. 빌런들이 히어로들의 가족을 인질삼는 일이 하루이틀은 아닙니다만 플래시 집안은 그 중에서도 심각합니다(엄마는 살해당하고 아빠는 아내 살인 누명쓰고 감옥갔는데 그 뒤에도..., 미래에서 온 딸도... 아이리스는 과연...). 무한 지구의 위기 에피소드에서도 플래시가 사랑의 화신이었던 걸 감안하면 지금까지 여성이 주로 감정적으로 그려졌던 것과는 반대로 백인 남성이 감정적인 모습으로 주로 등장하는 것이 신선하긴 했습니다. 플래시보다 더 감정적인 건 어쩌면 레전드 팀으로 편입(?)해서 활약 중인 존 콘스탄틴일지도 모르겠네요. 시즌 1만에 조기종영했다가 <애로우> 깜짝 출연으로 부활하는가 싶더니 결국 <DC 레전드 오브 투모로우> 팀의 휘하로 들어간 콘스탄틴은 이번 시즌 전체를 이끄는 중심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성 캡틴인 사라 랜스의 말 한마디에 팀 전체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여성 상관만 등장했다 하면 반말 찍찍에 개무시가 기본인 한국 서사에 익숙한 저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습니다. 병맛 서사에 아시안을 그리는 방식(예 부정적이라는 뜻이죠)에도 불구하고 제가 DC 드라마를 놓지 못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누군가 저에게 그래서 DC 드라마를 보라고 추천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그렇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일단 크로스오버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려면 세계관을 공유하는 모든 드라마를 방영 순서대로 봐야 하기에 따라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기다 캐릭터들을 한번 설명해 볼까요? 애로우는 배트맨 흉내를 내는 불효막심 방탕아, 플래시는 쓸데없이 착한데다 감정에 기반해 종종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답답이, 슈퍼걸은 외계인과 유행지난 슈트 때문에 적응난이도 최상, 콘스탄틴은 조기종영 굴욕에 오컬트 기반이라 공포물에 가깝고 레전드팀은 그냥 병맛입니다. 배트우먼은 몇몇 지점이 아쉽기는 해도 베이스 서사는 나쁘지 않았는데 분위기가 심하게 어두운데다(고담시 살면 우울증 걸릴 것 같아요..) 루비 로즈의 조기 퇴장이라는 변수가 생겨버렸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아직 DC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방탕아 애로우는 세상을 구하고 퇴장했고, 플래시는 완벽한 남편의 귀감이고, 슈퍼걸은 언제나 보고 싶었던 여성들의 우정을 깊고 넓게 보여주고, 콘스탄틴은 까칠하지만 성장하고 있고, 레전드팀은 저를 기분좋게 해줍니다. 배트우먼은 소수자임에도 강인한 여성의 표본이고요. 자세한 이야기는 앞으로 한 편씩 나누어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DC 드라마를 만날 준비가 되지 않으셨다면 한번 읽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추신 : 넷플릭스에서 시리즈별로 서비스하기 보다는 방영일 순서대로 묶은 패키지가 있으면 참 좋겠네요.


*이미지 출처 : GIQUE, polygon.com, looper.com, tvfanatic.com

작가의 이전글 세관을 통과하지 못한 정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