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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Dec 19. 2020

방탕아 출신 히어로의 조촐한 은퇴

애로우를 떠나보내며

DC의 드라마 라인을 시작하게 한 히어로 <애로우>가 시즌8을 끝으로 종영했습니다. MCU에 아이언맨이 있었다면 DC 드라마 유니버스, 속칭 애로우버스에는 애로우가 있었죠. 애로우가 있었기에 이후에 플래시가 등장할 수 있었고 연이어 슈퍼걸, 레전드팀, 콘스탄틴, 배트우먼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중간에 조기종영으로 퇴장할 뻔한 콘스탄틴에게 카메오 출연으로 인공호흡을 시켜 <DC 레전드 오브 투모로우> 팀으로 편입시켜준 것도 애로우였죠. 마지막 시즌이어서인지, 아니 마지막 시즌인데도 에피소드는 10화 정도로 간략하게 마무리되었는데 그러다보니 애로우에 관련된 떡밥들이 모두 정리되지 않은 점은 아쉽습니다. 거기다 대체 드라마를 끝낸건지뭔지 애로우의 자녀들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하려는 모양새인데 어디서 받아주는 건지 열린 결말인지도 모르겠고.. 이래저래 마무리가 덜된 느낌은 있습니다만 애로우를 떠나보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네요.결말만 놓고 봤을 때 MCU에서 애로우와 비슷한 히어로는 아이언맨보다는 울버린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차기 세대를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장렬하게 (지구에서의) 삶을 마무리지은 애로우가 언젠가 애로우버스(이제는 이름이 플래시버스로 바뀌려나..)에 카메오로라도 다시 등장해주길 기대하게 됩니다.


코믹스 시절부터 서로 영향을 받아온 DC와 마블에는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떨어지는 히어로들이 있습니다. 혹자는 퀵실버와 플래시를 비교하기도 하지만 현 MCU와 애로우버스에서 플래시와 매칭되는 건 스파이더맨입니다. 초능력자라는 점, 여타 히어로들에 비해 과학적인 기반이 강하다는 점, 비교적 밝은 면모가 있고 연인에게 죽고 못산다는 점 등등이 비슷하죠. 슈퍼걸에 매칭되는 캐릭터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 외계인이 등장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MCU에서는 캡틴 마블이 있겠네요(의상 컬러도 뭔가 유사..). 신화를 기반으로 한 히어로들은 각각 MCU에 토르, DC에 원더우먼이 있죠. 아직 완전히 MCU에 합류하진 않았지만 엑스맨 팀에 병맛을 첨가하면 DC 레전드 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헌데 매칭시켜 나가다 보면 의외로 애로우에 매칭되는 MCU의 캐릭터를 찾기가 힘듭니다. 사실 애로우는 같은 DC 소속인 배트맨과 가장 유사한 인물입니다. 어둡고 비극적인 전사를 가지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는데 자경단원 역할을 자처하는 데다 경찰의 불신으로 빌런과 공권력을 동시에 상대하죠. 둘 다 초능력이 없다는 점도 같습니다. 거기다 배트맨의 원래 신분인 브루스 웨인은 재벌 n세인데 애로우/올리버 퀸 또한 퀸 그룹의 후계자(중간에 말아먹지만)입니다. 숙적이자 스승인 라즈 알 굴 또한 배트맨과 애로우가 가진 공통점이죠. 애로우버스가 전반적으로 어두운 색채를 띠는 건 애초에 시작한 애로우의 어둠에서 기인합니다(배트맨버스로 시작했으면 어땠을지..).



배트맨과 애로우는 이렇듯 형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점을 공유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영웅으로서의 탄생 비화입니다. 배트맨의 기원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브루스 웨인이 가지고 있는 박쥐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에서 비롯됩니다. 반면 애로우가 히어로가 된 것은 퀸즈갬빗 호가 표류하다가 도착한 섬 리안 유에서 철이 들었기 때문이죠. 이전까지 가문의 부를 토대로 방탕한 생활을 지속하던 올리버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비상용 탈출보트에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를 죽이고 자살한 아버지를 보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리안 유에서 만난 중국인 부녀에게서 각종 서바이벌 스킬을 익히는 동시에 언젠가 스탈링 시로 돌아가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받기로 결심하죠. 브루스 웨인의 부모는 브루스가 어린 시절 죽었기에 별 정보도 없고 그저 브루스에게 따듯하고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올리버의 부모는 어두운 비밀을 가지고 있었고 올리버의 아버지는 바로 그 비밀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애로우의 탄생은 부모의 죄악에서 기원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올리버는 두 자녀를 두었고 자신의 부모와는 달리 자녀에게 보다 건강한 유산을 물려주고 은퇴합니다.


드라마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배트맨은 전사나 가족관계가 상대적으로 적게 묘사되었고 사실 애초에 혈육이 별로 없습니다. 브루스 웨인에게 가장 가까운 가족은 땡땡 웨인이 아니라 집사인 알프레드 페니워스입니다. 하지만 여덟 시즌에 걸친 시간이 있었던 애로우는 가족관계를 자세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이부동생(인줄 몰랐던) 테아, 이복동생 에미코를 포함해 죽은 아버지와 어머니, 많은 전여친(..)과 아내 그리고 두 자녀 윌리엄과 미아가 모두 드라마 상에 등장하죠. 흥미롭게도 아버지로부터 퀸가 성을 물려받은 올리버는 자신의 자녀들에게는 성을 물려주지 못합니다. 올리버 퀸의 자식이라는 점을 숨기기 위해 윌리엄과 미아 모두 모계 성을 따랐는데 호주제 폐지에 관해 아직도 후유증을 겪는 대한민국의 시각에서는 흥미로운 점입니다. 재미있는 건 IT천재인 펠리시티 스모크의 피를 이어받은 건 미아인데 미아는 전사로 성장하고 오히려 윌리엄이 IT천재로 성장했다는 점이죠. 부모 세대와 성 역할이 바뀌었다는 점 또한 애로우의 마지막 시즌에서 볼 수 있는 시대적 변화였습니다. 사실 <애로우>는 시즌에 걸쳐 서서히 성 역할의 구분을 하나씩 지워온 드라마입니다. 초창기에는 애로우와 함께 필드를 뛰는 건 남성 멤버들인 스파르탄/존 디글, 아스널/로이 하퍼였고 IT 천재인 오버워치/펠리시티 스모크가 후방 지원을 하는 형태였습니다. 그러다 퀸즈갬빗 호에서 살아남아 리그오브어쌔씬에서 전사 훈련을 받은 화이트 카나리/새라 랜스가 등장하고 변호사인 로럴 랜스도 카나리로 성장하죠. 이후 테아도 말콤 멀린의 훈련을 받아 스피디로 거듭납니다. 뿐만 아니라 <애로우>는 양성애자, 동성애자가 모두 등장했고 시즌이 갈수록 다양한 인종을 받아들인 드라마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애로우>가 있었기에 후발주자 DC 드라마들이 거리낌없이 다양성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애로우는 초능력을 단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만큼 인간적인 면모가 매력적이었던 히어로입니다. 제목에서도 언급했듯 방탕한 과거를 가지고 있고 신체적으로는 강인하지만 플래시처럼 머리가 좋지는 않아 펠리시티 스모크에게 기대는 부분도 많죠. 실제로 펠리시티와 잠시 헤어져 펠리시티가 현장을 떠나 있을 때 불운하게 멤버를 잃기도 했습니다. 선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으로 결코 살인하지 않는 플래시와는 달리 애로우는 토미와 약속하기 전까지는 범죄 소탕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습니다. 이후 여러가지 사건과 에피소드를 통해 애로우는 자신만의 원칙을 세우고, 서로 적대적이었던 공권력과 손을 잡기도 합니다.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애로우는 펠리시티의 조언을 받아들여 새로운 멤버인 와일드독, 아르테미스, 블랙 카나리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또한 평범한 삶과 자경단원으로서의 이중생활을 이어가는 다른 히어로들과는 달리 직접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시장에도 출마하죠. 시즌 초창기 애로우가 막으려 했던 주된 범죄가 약물인 버티고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생각보다 현실적이기도 합니다. 데스스트록이 활약하던 초반에 비해 후반 시즌에는 빌런들의 매력이 심하게 감소하긴 했습니다만 데미안 다크만 해도 나쁘지 않은 빌런이었고 결국 데미안 다크는 <DC 레전드 오브 투모로우>에서도 활약을 이어가게 되죠(전 근데 이 분만 보면 <위기의 주부들> 이디 남편만 생각나요). 막시즌에서는 무매력이었던 빌런들을 모두 정리하고 애로우의 은퇴 서사에 집중해서 짧고 굵게 시즌을 마무리했습니다.


애로우가 성장하는 히어로일 수 있었던 건 어떻게 보면 이성애자 백인 남성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슈퍼걸> 시즌 1만 해도 슈퍼걸이 조금만 실수해도 문제가 많은 히어로인 것처럼 묘사하고, <배트우먼> 시즌 1의 경우 배트우먼의 실수는 언제나 언론에서 비꼬는 데 반해 애로우의 실수나 실패는 성장 서사의 일부로 그려집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로우버스의 창단자이자 (아직까지는) 최장 시리즈 보유자이고 애로우버스 내 히어로들을 탄생 및 결집시킨 히어로라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올리버를 보내는 장면에 모인 수많은 캐릭터들을 보면 알 수 있죠. 올리버가 성장했다는 점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모니터와 거래를 했던 시즌 7입니다. 올리버는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서라도 친구들의 삶을 보호하고자 모니터와 거래를 맺습니다. 그리고 이 거래의 댓가로 자신의 자녀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놓치게 되죠. 애로우는 8년간 많은 실수를 하고 실수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며 애로우버스의 전설로 남았습니다. 때로는 동료들을 위해 감옥행도 불사하고, 때로는 친구들을 위해 지구 1에서의 삶도 포기한 채 모니터의 수하로 살면서도 올리버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시즌 1에서 타인을 쉽게 믿지 못하고 자신이 선택한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정체를 공개하고, 토미의 연인이었던 로럴과 바람을 피던 모습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죠. 무려 8년이나 되었는데도 제가 이런 에피소드들을 기억하는 걸 보면 그만큼 저도 <애로우>에 정이 든 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부모의 원죄를 등에 업고 시작한 <애로우>는 새로운 지구라는 유산을 후세대에게 물려주고 마무리합니다. 10여개의 짧은 에피소드가 아쉽지만 크로스오버의 설정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 같기도 하네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못하는 어둠의 수호자였던 시즌 1의 애로우는 마지막 시즌에 이르러 자신의 정체를 스타 시에 드러내고 영웅으로서 지구에서의 삶을 마무리합니다. 세상 모든 히어로가 이렇게 장대한 최후를 맞을 수 있지는 않겠지만 진녹색의 후드를 걸치고 지구의 수호자로 레벨업(?)한 애로우에게는 꽤 어울리는 결말이 아니었나 싶네요. 언젠가 애로우버스 아니, 플래시버스에 카메오로라도 애로우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그리고 애로우의 자녀들 또한 스타 시에서 활약하기를, 카나리 네트워크가 유지되기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올리버가 펠리시티와 평안한 나날을 보내기를 바랍니다. 혹시 <애로우>를 아직 보지 못한 분이라면 시즌 1, 2는 다른 드라마와 섞이지 않고 쭉 이어볼 수 있으니 한번 도전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시즌 3부터는 <플래시>와 연동됩니다). 애로우버스의 매력에 빠져 다른 히어로들까지 챙겨보시게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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