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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Dec 21. 2020

마이너리티를 향한 건배

배트우먼을 맞이하며

애로우버스에서 쉽게 손대지 못하던 성지는 아마도 고담 시가 아닐까 합니다. 배트맨의 고향이자 무법천지의 대명사 고담 시에는 무려 아캄 정신병원이 존재합니다. 물론 다른 도시에도 범죄자를 가두기 위한 공간은 존재합니다만(대표적으로 아이언 하이츠, 스타 연구소) 정신병원asylum이라는 단어가 붙는 장소가 있는 곳은 고담 시 하나뿐입니다. 지난 시즌 배트우먼이 크로스오버 파일럿 에피소드에서 첫 등장할 때 배경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지요. 개인적인 원한이나 트라우마 혹은 나름의 철학으로 인해 범죄를 저지르는 다른 도시의 범죄자들과는 달리 고담 시는 쌩(?) 사이코패스 범죄자가 넘쳐납니다. 그리고 이런 범죄자들을 상대하던 자경단원은 지금까지 배트맨이라는 이름으로 거대한 덩치의 부잣집 출신 이성애자 백인 남성으로 묘사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애로우버스에 등장한 고담 시에는 더 이상 어둠의 수호자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자경단원 생활을 해온 애로우와 플래시에게조차 배트맨은 생면부지의 전설입니다. 그리고 이 때 브루스 웨인의 사촌 케이트 케인이 고담 시로 돌아옵니다. 케이트 케인은 보통 180cm 이상의 거구로 묘사되는 배트맨에 비하면 작은 몸집을 가진 동성애자 백인 여성입니다. 배트우먼은 시작부터 범죄자, 그리고 자신을 향한 편견에도 맞서 싸워야 합니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배트 수트를 본 시민들은 배트맨이 돌아왔다며 환호하지만 케이트가 붉고 긴 가발을 쓰고 나타나는 순간 배트우먼의 기량에 의문을 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잠시 배트우먼이 자리를 비우자(실제로는 납치됨) 배트우먼 어디 갔냐며 찾아나서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죠.


배트우먼을 연기한 루비 로즈는 이전에도 밝혔듯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여성으로 짙은 색의 숏컷으로 등장합니다. 여러가지 면에서 배트우먼은 기존에 데뷔한 여성 히어로인 슈퍼걸과 대척점에 놓인 인물입니다. 자신의 얼굴을 당당하게 드러낸 채 이성애자 금발 여성으로 묘사되는 슈퍼걸/카라 조르-엘(혹은 카라 댄버스)은 태생부터가 강력한 물리적 힘을 가진 외계인이죠. 빠른 스피드와 타고난 체력으로 인해 위장신분(?)인 신문기자 카라 댄버스로서의 삶과 슈퍼걸로서의 삶을 병행하는 데도 큰 지장이 없습니다(취재하다가 일터지면 옷만 갈아입고 날아가면 됨). 반면 케이트 케인은 얼굴을 못 드러내는 자경단원인 것도 서러운데 히어로로서의 삶을 개인의 삶과 병행하다가 결국 사적인 인생을 포기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거기다 시민들에게 환영받고 아예 국가 기관과 협조하는 슈퍼걸과는 달리 배트우먼은 친아버지로 대표되는 공권력으로부터 배척당합니다. 배트우먼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는 슈트가 벗겨지는 일입니다. 아무리 케이트 케인이 신체적으로 평균적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해도 슈퍼걸처럼 총알을 막지는 못하니까요. 또한 카라에게는 믿고 따르는 친언니 알렉스가 있습니다. 하지만 케이트의 쌍둥이 자매 베스는 어린 시절 사고로 실종되었고, 케이트가 고담 시로 돌아오는 동시에 극악한 범죄자 앨리스가 되어 나타납니다. 히어로 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을 경우 슈퍼걸은 사촌 슈퍼맨/클라크 켄트에게 조언을 구하지만 케이트는 그럴 수 없습니다. 사촌 배트맨/브루스 웨인은 실종된 지 오래니까요. 이렇게 대비되는 두 여성 히어로의 이야기는 햇빛 가득한 내셔널 시와 우중충한 날씨 그리고 대부분 밤시간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고담 시의 드라마 톤에서 극명하게 차이를 보입니다. 그리고 마치 빛과 그림자와도 같은 슈퍼걸과 배트우먼은 크로스오버에서 맞닥뜨리며 서로를 지지하는 동시에 저지하는 수단을 보유하기로 약속하죠.



크로스오버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번 크로스오버의 후유증을 가장 진하게 겪은 히어로는 배트우먼이 아닐까 싶습니다. 애로우/올리버 퀸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스펙터로 생명을 연장하면서 안티 모니터의 우주정복계획(?)을 저지하는 동시에 새로운 통합 지구를 탄생시킵니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케이트의 소원을 들어주게 되죠. 평행 지구로부터 사고에서 실종되는 대신 케이트가 구해주어 케이트와 함께 성장한 과거를 가진 또다른 베스 케인이 등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원래 케이트가 알고 있었던 베스/앨리스와 새로 등장한 베스가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케이트는 두 베스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흑화하지 않은, 그 누구도 죽여본 적 없는 새로운 베스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해 보이기는 하지만 케이트는 고민에 빠집니다. 어린 시절 케이트가 베스를 구했더라면 베스는 애초에 범죄자 앨리스가 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이 극명해졌기 때문입니다. 즉 케이트는 단순히 베스와 베스 사이에서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과거를 지울 수단과 속죄할 수단 사이에서 고민하는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앨리스에게 모친을 잃은 또다른 자매 메리의 울먹거리는 얼굴을 본 순간 케이트는 누구를 선택할지 결정을 내립니다. 불쌍한 우리 케이트, 세상사 본인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문제지만 말이죠..


케이트가 두 베스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 이외에도 <배트우먼>에는 수많은 딜레마가 등장합니다. 아버지 제이콥의 재혼으로 생긴 케이트의 새로운 자매 메리 또한 자신과 어머니의 목숨 사이에서 갈등하죠. 심지어는 앨리스조차 홀로서는 삶과 남매처럼 지내온 마우스와 함께하는 삶 사이에서 갈등의 기로에 놓입니다. 물론 가장 많은 고뇌와 딜레마로 (개)고생하는 건 주인공인 케이트입니다만.. 케이트는 극이 시작하기 전 사랑했던 소피가 두가지 길 사이에서 내린 결정으로 인해 고담 시를 떠났고 돌아와서 배트우먼이 된 이후 거울처럼 같은 결정을 놓고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소피가 내렸던 것과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되죠. 결국 <배트우먼>은 극이 시작하기 전, 즉 케이트가 배트우먼이 되기 전 겪은 삶을 배트우먼이 된 후 거울처럼 그대로 비추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당시 타인들이 내린 선택의 결과로 괴로움을 겪어야 했던 케이트는 그들과 같은, 혹은 비슷한 결정을 내리면서 그들이 자신을 괴롭게 했던 결정을 내려야만 했던 이유를 이해하게 됩니다. 가장 단적인 예로 제이콥과 어린 케이트에게 베스가 죽었다는 거짓 정보를 흘린 캐서린 해밀턴을 케이트와 메리는 결코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후 일순간의 분노로 카트라이트 박사를 죽인 케이트는 그 사실을 루크에게 쉽게 말하지 못하죠. 동시에 극악한 범죄자가 된 앨리스를 이해하지 못하던 케이트는 카트라이트 박사로부터 베스가 흑화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을 듣고 카트라이트 박사를 죽여버립니다. 케이트가 성장하는 과정은 다른 히어로들에 비해 훨씬 잔혹하고 가슴아프지만 조커레벨의 범죄자로 살아돌아온 친자매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 만큼의 괴물이 되어야 함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케이트의 쌍둥이 자매인 앨리스는 선과 악이 한끗 차이임을 보여주는 빌런입니다. 이 설정은 배트맨에게서 받은 유산과도 같은데 조커와 배트맨이 형제일 가능성이 영화 <조커>에서 암시된 바 있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도 조커는 배트맨에게 "You complete me(너는 나를 완성시켜)"라고 이야기하죠. 앨리스는 대놓고 배트우먼의 쌍둥이 자매이기에 배트우먼이 된 케이트도 앨리스를 쉽게 죽이지 못합니다. 배트우먼이 상징색으로 붉은 색을 고른 까닭은 자신과 생일을 공유하는 앨리스가 1월생이며 1월의 상징석이 붉은 색의 가넷이기 때문입니다. 기원이 불분명하고 악한이라기보다는 루시퍼의 인간형상에 가까운 조커는 비현실적인 빌런이지만 앨리스는 그 기원이 명확하고 흑화한 계기까지 철저하게 드러납니다. 그렇기에 배트맨을 죽이는 대신 계속 같이 놀고 싶어하는 조커와는 달리 앨리스는 결국 배트우먼을 죽이고 싶어하죠. 배트우먼이 배트맨으로부터 독립하는 지점은 어쩌면 바로 여기일지도 모릅니다. 배트맨은 웨인 가문의 유일한 일원이 되는 대신 범죄자를 소탕하는 데 사적인 감정으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배트우먼은 케인 가문의 잔당으로 인해 돌아갈 가족을 얻는 대신 끊임없는 딜레마에 시달립니다. 케이트는 시리즈 초반 브루스에게 답신이 없는 편지를 쓰며 브루스라면 어떻게 했을지 고민하지만 설령 브루스가 돌아온다 해도 케이트의 딜레마를 대신 해결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케이트는 자신의 짐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눠 지기로 결심합니다. 이는 배트우먼이 결국 배트맨의 여성 버전이 아닌 배트우먼 그 자체로 독립적인 히어로임을 선언하는 셈입니다.


따라서 시청자는 이제 배트맨을 바라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배트우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케이트는 배트맨의 옷을 빌려입었지만 전부 자신에게 맞게 재조정합니다. 하지만 고담 시의 시민들은 배트우먼을 볼 때 배트맨의 그림자를 함께 봅니다. 이는 그만큼 지금까지의 세상에선 남성이 기본값이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미술관에 침입한 보석도둑을 잡는 사건입니다. 보석도둑을 제압하다가 브루스가 쓰던 배터랭을 그대로 던진 배트우먼은 미술품을 파손합니다. 루크는 배터랭에는 문제가 없고 케이트가 배터랭을 잘못 던진 거라고 주장하죠. 하지만 케이트는 나는 제대로 던졌고 배터랭이 이상한 거라고 맞섭니다. 그리고 루크는 배터랭이 케이트의 손 크기에 맞게 재조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금까지 애로우나 플래시처럼 덩치가 큰 히어로에게 익숙한 시청자는 상대적으로 체구가 작은 케이트 케인이 어떻게 고담 시를 수호할 수 있겠냐고 의문을 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배트우먼은 이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범죄자를 잡고 도시를 수호하지만 몇 번을 해도 정작 자신의 친아버지에게는 인정받지 못하죠.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히어로를 보는 시각을 바꾸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케이트는 물리적인 힘 대신 지략을 사용하여 앨리스를 아캄 정신병원에 가두는 데 성공합니다. 드라마 후반부 배트우먼보다 훨씬 덩치가 크고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빌런을 상대하는 에피소드에서 배트우먼의 한계를 너무 쉽게 드러내어 아쉽긴 했습니다만.. 저는 분명 케이트라면 방법을 찾았을 거라고 믿습니다. 크로우와 협공하는 대신 말이죠.



<배트우먼>의 다른 한 축을 구성하는 것은 케이트의 피가 섞이지 않은 자매 메리입니다. 이전까지 애로우버스는 아시아인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 상당히 제한적인 접근을 해왔습니다. <애로우>에서는 동양의 무림고수 등 전형적인 방식으로 그려진 경우가 많았고 <슈퍼걸>, <콘스탄틴>에서는 아예 거의 등장하지 않았으며 <플래시>에서는 일부 배역을 나눠주긴 했지만 비중이 크지 않거나 일회성이었죠. <DC 레전드 오브 투모로우>에서 거의 유일한 아시아인이었던 모나 우를 다룬 방식은 심각한 수준입니다. 레전드 팀의 제대로 된 멤버로 대우해 주지도 않았을 뿐더러 말도 통하지 않는 괴물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어 같은 수준으로 격하시켜버렸기 때문이죠. 무한 지구의 위기에서 지구를 구하기 위해 선발된 화신(paragon) 가운데 아시아인이 고작 한 명이라는 점은 아직까지 미국 사회가 아시아인을 사회의 일원으로 쉽게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반영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고담 시의 아시아인은 많은 부분에서 전형성을 탈피하고 서사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캐서린 해밀턴은 대기업의 사장이고 딸인 메리는 의대생이지만 전형적인 너드 이미지를 탈피한 인플루언서로 등장하죠. 이를 통해 뒤늦게서야 데뷔한 <배트우먼>은 시대적인 변화를 가장 많이 반영했음을 천명합니다. 그리고 모든 메인 히어로가 백인이었던 애로우버스는 다음 시즌의 배트우먼으로 흑인을 지명했습니다. 이전까지 애로우버스가 한 시즌을 넘어갈 때마다 한 걸음씩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동안 <배트우먼>은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한 번에 도약한 것입니다. 


<배트우먼>은 지금까지의 애로우버스 전체를 통틀어 가장 어두운 이야기입니다. 심지어 지옥을 배경으로 하는 <콘스탄틴>보다도 잔혹합니다. 케이트 케인은 애로우버스 내에서 역대급으로 비극적인 배경을 가진 인물이고, 앞으로도 케이트는 수많은 편견을 헤쳐나가야 하겠죠. 케이트 케인이 떠난 <배트우먼>은 상상이 잘 되지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배트우먼> 시즌2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리고 슈퍼걸이 애로우버스를 떠나면 <배트우먼>은 유일한 여성 솔로 히어로 시리즈가 됩니다(<스타걸>이 있긴 합니다만 애로우버스에 포함되는지 정확하게 모르겠네요). 저는 애로우가 그러했듯 배트우먼이 새 시대의 여성 히어로들을 끌어오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올리버 퀸이 그러했듯 케이트가 언젠가 어디선가 평안을 찾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브루스 웨인의 도움 없이 오로지 케이트 케인으로서 존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더불어 루비 로즈가 케이트 케인으로 돌아오는 날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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