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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Dec 28. 2020

가장 사랑받는 히어로의 위기

플래시는 다시 달릴 수 있을까

어쩌면 애로우버스 내에서 가장 편안한(?) 제작과정을 거친 것은 <플래시>가 아닐까요. <애로우>가 기반을 잡아 놓은 애로우버스에서 안정적으로 데뷔한 플래시는 대부분의 시즌에서 일정 이상의 완성도를 자랑해왔습니다. 실제 원작 코믹스에는 쓸 만한 내용이 별로 없다는 의견도 있는데 그런 것치곤 <플래시> 시리즈의 완성도는 놀라운 수준입니다. 아직까지 DCEU에서는 제대로 된 솔로 무비도 없는 마당에 드라마판에서는 몇 년째 말 그대로 질주하고 있죠. 이번 시즌을 끝으로 애로우가 은퇴하면 플래시는 애로우버스 내 최고참 슈퍼히어로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이런 플래시를 매력적으로 만든 데에는 배리 앨런을 연기한 그랜트 거스틴의 몫이 컸습니다. 거스틴은 원작에서는 말 많고 시끄러우며 발랄한 플래시를 한층 진지하게 소화하며 로맨티시스트이자 선한 면모를 강조해 그야말로 히어로의 표본으로 만들었죠. 때로는 이 때문에 답답한 에피소드도 있긴 합니다만 그게 배리 앨런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선한 플래시이지만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판단을 내릴 때가 많고 이로 인해 자기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는 경우도 허다하죠. 이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살해당하고 그 누명을 쓴 아버지의 감옥행으로 인해 범죄자의 자식으로 자라야 했던 배리 앨런의 감정적 결핍에서 기인합니다. 아버지 헨리 앨런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죠 웨스트 서장이 배리를 입양해 친아들처럼 키우지만 친부모의 빈자리는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플래시>의 서사는 유독 배리의 가족에서 시작해 가족으로 마무리되는 경향이 짙습니다. 플래시의 주된 숙적인 리버스 플래시/이오바드 쏜이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는 지구정복이 아닌 플래시에 대한 복수입니다. 그리고 부수적인 피해는 플래시가 아닌 플래시의 가족을 향하게 되죠. 가족을 잃은 배리는 가족이라는 존재에 상당히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랜 짝사랑 상대인 아이리스는 어쩌면 배리가 그토록 얻고자 했던 가족과 가장 닮은 존재이기에 집착의 대상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범죄자의 자식으로 학교에서 따돌림당하는 배리에게 유일하게 말을 걸고 친하게 지내준 것이 아이리스였고 배리에게는 이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믿고 지지해줄 기반이 필요했습니다. 이는 반대로 이번 시즌에서 배리가 자신에 대한 불신을 표하는 아이리스를 보고 진짜 아이리스가 아님을 알아차리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아이리스와 법적인 가족이 되는 순간 배리를 친아들처럼 키워준 죠 웨스트와도 법적인 가족이 되어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는 것도 아이리스와 가족을 이루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아이리스의 친동생 월리가 어느 날 나타나자 배리가 떨떠름하게 대하는 것도 자신이 지금껏 차지해왔던 자리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 배리는 월리를 받아들이고 종국에는 같은 스피드스터로서 활약상을 나누게 되죠. 애로우버스의 타 히어로들과는 다르게 플래시가 스타 연구소라는 공식적인 민간 연구소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것도 가족에 대한 플래시의 그리움에 기반합니다. 스타 연구소에 재직하는 시스코 라몬과 케이틀린 스노우, 해리슨 웰스는 배리에게 대체 가족으로 기능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플래시에게 있어 가장 큰 공포는 가족을 잃는 것이며 이는 이번 시즌 아이리스의 납치로 비극성을 극대화시킵니다. <플래시> 시리즈의 가장 큰 한계는 아이리스가 플래시를 각성시키거나 비극성을 극대화시키는 희생양으로서 기능하는 경우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입니다. 아이리스는 뛰어난 기자이며 자신만의 신문사를 런칭할 만큼 배짱도 있지만 전체 서사에서 아이리스의 역할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이를 의식한 탓인지 해리슨 웰스가 종종 부재하는 스타 연구소의 리더로서 아이리스의 활약상이 드러날 때도 있지만 실질적으로 스타 연구소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는 것은 과학자인 해리슨 웰스, 시스코 라몬, 케이틀린 스노우입니다. 심지어 아이리스가 리더 역할을 할 때조차 아이리스는 사랑하는 배리가 다칠까봐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애로우>, <DC 레전드 오브 투모로우>에서는 여성 캐릭터 대부분을 히어로로 격상시켰고 <슈퍼걸>이나 <배트우먼>에서는 히어로가 아니라도 뛰어난 기량을 가진 직업여성들로 여성 캐릭터를 활용하는 데 반해 플래시의 연인 아이리스는 그 무엇으로서도 거의 기량을 선보이지 못하죠. 결국 아이리스는 사기가 떨어진 배리를 북돋아 주거나 배리에게 빌런을 물리칠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보조적인 역할에 그칩니다. 어떻게 보면 아이리스는 선한 배리에게 자상한 남편이라는 한 가지 키워드를 더 추가해주는 객체이기도 한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연인 납치라니 2000년대 초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서나 보던 설정을 2020년에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와 더불어 이번 시즌 비극성을 강화시키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배리의 스피드포스 유실입니다. 입자가속기 폭발로 인한 사고로 얻게 된 것으로 알려진 배리의 스피드는 사실 스피드포스에 기반한 것으로 사고가 아닌 스피드포스의 선택으로 얻어진 것이었습니다. 가족에 집착하는 배리를 배려(?)한 것인지 스피드포스는 주로 배리의 가족의 형태로 발현됩니다. 즉 스피드포스는 보이지 않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대행함으로서 스피드포스라는 힘의 근원을 가족의 존재로 치환해 유실의 순간 배리에게 최악의 악몽을 선사합니다. 지금까지도 배리가 스피드를 잃어버린 적은 있었지만 스피드포스가 무너진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배리는 자신의 감정적인 결정으로 인해 스피드포스를 오염시키고 그 결과 스피드포스가 무너지게 되죠. 이로 인해 같은 스피드포스로부터 원동력을 얻는 키드 플래시/월리 웨스트로부터도 핀잔을 듣습니다. 애초에 초능력이 없는 애로우와 배트우먼, 마력을 타고난 콘스탄틴, 태생이 외계인인 슈퍼걸과는 달리 플래시의 초능력은 후천적으로 얻은 것입니다. 때문에 플래시는 애로우버스 세계관 내 유일하게 평범한 삶과 초능력자로서의 삶을 모두 경험한 히어로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애초에 타고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배리는 스피드스터로서의 정체성을 쉽게 놓지 못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줍니다. 이는 아마도 애로우버스 내 플래시가 가장 사랑받는 히어로라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경찰들과 척을 진 애로우와 배트우먼, 외계인이라는 이유로 안티가 존재하는 슈퍼걸,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레전드팀과는 달리 플래시는 센트럴 시의 확고한 마스코트이자 히어로입니다. 플래시는 상을 받은 적도 있고 카페 지터스에는 플래시 메뉴가 있을 정도죠(샷이 많이 들어가나..?). 모두에게 미움받던 어린시절을 고려해 보면 배리가 시민 전체에게 사랑받는 플래시라는 정체성을 버리기가 어려운 것도 당연합니다.



돌이켜 보면 <플래시> 내 빌런들이나 센트럴 시의 위기는 대부분 플래시 자신에게서 비롯된 경우가 많습니다. 숙적인 리버스 플래시야 미래에서 온 미래의 플래시의 주적이니 현재의 배리에겐 억울하긴 하겠지만.. 부모님을 되살리겠다고 과거로 돌아가 플래시포인트를 만들었다가 그 여파로 스타 연구소 전체가 (개)고생한 시즌 3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번 시즌만 해도 스피드포스가 무너지게 된 건 배리의 감정적인 결정에 의한 결과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래시에게는 끊임없는 변명 서사가 주어집니다(배트우먼이 보면 울고 갈듯..). 화를 내는 모습조차 보기 어렵고 타인에게서 선한 면모를 보고자 하는 배리 앨런은 현실에서는 극히 드문 인물 유형입니다. 플래시에게 변명 서사를 부여하는 것은 여타 히어로들에게 공정성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존재 자체로 차별을 받는 슈퍼걸, 배트우먼 등의 히어로들과는 달리 배리 앨런은 장신의 이성애자 백인 남성이며 플래시가 되기 전에도 이미 경찰에서 법의학자로 근무하던 수재입니다. 초반 시즌에서 심지어 배리가 노래도 곧잘 하는 것을 발견한 케이틀린이 넌 빠지는 게 뭐냐고 불평한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죠(글리 출신...). 하지만 이런 인물의 실수가 단순히 캐릭터의 매력을 발판삼아 끊임없이 이어져 간다면 플래시는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게 됩니다. 실수와 실패에서 끊임없이 배웠던 애로우나 배트우먼과는 달리 플래시는 자신이 내린 감정적인 결정의 결함을 여섯 시즌이 지나도록 깨닫지 못합니다. 배리 앨런이 흔하지 않은 순수한 마음씨를 지닌 건 사실입니다만 스피드포스가 플래시를 고를 때는 보다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을 골랐어야 하는 건 아닐까요. 한 번도 너를 고른 걸 후회한 적이 없다는 스피드포스의 유언은 그래서 허무하게 들려옵니다.


사실 이런 감정적인 면은 사랑꾼으로서의 면모를 부각시켜 배리 앨런의 매력도를 증가시키는 데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드라마 상에서 주요 역할을 맡았던 여성 캐릭터 대부분과 사귀었던 올리버 퀸, 양성애자로 남녀 가리지 않고 연애하는 존 콘스탄틴 등 애로우버스 내 히어로들은 다양한 연인관계를 경험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슈퍼걸이나 배트우먼의 경우 연애 서사 자체가 기본적인 플롯에서 크게 중요한 역할을 하질 않습니다. 반면 배리는 유독 아이리스와의 연인관계가 중심으로 서사가 이어집니다. 시즌 1, 2에서는 몇몇 다른 인물들과 교제를 하기도 했지만 배리의 궁극적인 연인이 아이리스임을 모르는 시청자는 없었습니다. 즉 최근에는 그닥 흔하지 않은, 운명의 상대라는 걸 믿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는 순애보 캐릭터가 시청자에게 소구하는 바가 컸던 것입니다. 특히 아이리스와 이어지지 않던 시즌 초반에는 가슴아파하는 배리의 모습에 공감할 수 있는 모습이 많았죠. 하지만 아이리스를 아내로 맞이한 배리는 이제 투닥거리는 연애를 서사로 활용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에 따라 아내가 된 아이리스를 인질로 잡는 낡은 서사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죠. 가장 먼저 애로우버스를 시작한 <애로우>에서도 로럴이나 펠리시티가 인질로 잡힌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몇 번이고 위기에 빠지고, 무엇보다도 플래시 혹은 여타 인물의 도움 없이는 상황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더욱 안타까운 건 <플래시> 내 다른 여성 캐릭터 대부분은 홀로서기가 가능한 능력치의 소유자로 그려진다는 점입니다. 케이틀린 스노우는 유능한 과학자인 동시에 킬러 프로스트이기도 하고 죠 웨스트의 아내 세실 호튼은 검사이자 마인드 리딩이 가능하죠. 가장 최근에 합류한 알레그라도 초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직 아이리스만이 플래시의 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떠한 능력도 부여받지 못했습니다.



<플래시>는 아직까지 많은 매력포인트를 보유한 드라마입니다. 애로우버스에서 최초로 평행우주 개념을 도입해 슈퍼걸이 합류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평행우주 개념으로 인해 이번 시즌 크로스오버에서 DC 역사상 가장 많은 추억팔이에 성공했죠. 과학을 시각화하여 꽤 어려운 내용을 다루고 있음에도(대부분 보면서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긴 하지만) 재미있게 소화해 낸 점도 칭찬해줄 만합니다. 또한 초능력자 빌런들로 인해 액션신이 CG 덧칠로 화려해지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원작과는 다르게 웨스트 가문을 흑인으로 설정해 인종다양성을 받아들인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이 설정은 영화에서도 이어진다고 하죠. 무엇보다도 타인에게서 좋은 면모만을 보고자 하는 배리 앨런이라는 캐릭터는 현실성이 없는 만큼 매력적입니다(사실 이런 남편 하나 있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하지만 시즌이 갈수록 서사는 반복되고, 플래시와 아이리스는 성장하는 모습을 보기 어렵습니다. 스피드포스는 무너지고 다시금 아이리스는 거울 뒤에 갇혀 사라진 지금 플래시가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기대 반 걱정 반입니다. 다음 시즌에서도 배리는 아이리스를 향해 달릴 수 있는 걸까요. 달려, 배리, 달려Run, Barry, R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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