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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Jan 04. 2021

병맛의 매력은 어디까지인가

DC's 레전드 오브 투모로우가 향하는 곳

애로우버스 내에서 가장 독특한 색채를 지닌 시리즈는 <DC's 레전드 오브 투모로우(이하 <레전드>)>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타 시리즈들은 각각의 특징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무겁거나 최소한 진중한 색채를 띱니다. 반면  <레전드> 시리즈는 전반적으로 밝은 색채를 띠고 있고 스스로도 슈퍼히어로라기엔 조금 부족한 이들이 모였다고 이야기합니다. <레전드> 시리즈는 애로우버스 세계관의 유산이자 잔재이기도 합니다. 첫 시즌에서는 립 헌터를 제외한 대부분의 프로타고니스트 캐릭터들이 애로우버스 출신인데다 안타고니스트들도 기존 빌런의 부활 형태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기존 애로우버스 시청자들의 반가움을 사기도 하지만 쟤는 언제 죽나.. 싶을 정도로 민망한 재탕도 많습니다. 다만 초반 시즌에서는 분위기가 덜 잡힌 탓에 슈퍼히어로물도 코믹물도 아닌 어정쩡한 분위기였지만 다섯 시즌째 이어진 지금은 확실하게 병맛 미드로 자리잡힌 모양새입니다. 때문에 지난 시즌에서는 애로우버스 드라마 중 유일하게 크로스오버를 건너뛰기도 했지만 이번 시즌에서는 어둠의 중심축을 담당하고 있는 콘스탄틴 덕에 자연스럽게 크로스오버에 녹아들었습니다. 애로우버스 시리즈 가운데 유일하게 원작이 없이 DC코믹스의 캐릭터들만 가져와 제작한 드라마다 보니 정말 밑도끝도 없이 근본없는 시리즈가 되었지만 그게 매력이기도 합니다.


<레전드>는 애로우버스의 타 시리즈들과는 달리 한두명의 히어로를 메인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 아닌 다수의 히어로들을 내세워 팀업한 시리즈라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시간사무국에서 온 립 헌터가 중심이었던 시즌 1을 제외하면 화이트 카나리/사라 랜스가 중심축을 이루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캐릭터가 비중을 비등하게 나눠가집니다. 서사 특성상 다양한 시간대를 오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양한 이슈를 다룰 수 있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병맛이라는 드라마 코드의 특성상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등의 이슈를 다루더라도 깊이 들어가기보다는 가볍게 다룬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때로는 툭툭 던지는 대사들에 뼈가 있기도 합니다(시즌 1에서는 현대로 온 과거의 캐릭터가 이쯤 되면 완전 성평등이 이루어졌을 줄 알았다는 말을 하기도 했죠). 애로우버스 중에서도 <애로우> 시리즈에서 온 캐릭터가 주축이 되다보니 시즌 1에서는 조금 어두운 분위기가 있기도 했으나 갈수록 오리지널 캐릭터가 추가되고 분위기도 밝아져 현재는 다른 시리즈들과 크로스오버하기가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진중한 분위기가 사라져서 아쉬울 때도 있지만 그만큼 가볍게 즐기기에 나쁘지 않다는 점이 <레전드> 시리즈의 장점입니다. 또한 다양한 시간대를 오가다 보니 시대배경을 나름 고증(?)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다만 현대에 와서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지고 있는데(마리 앙투아네트는 실제로는 매우 검소한 왕비였다고 합니다) 사치스러운 모습으로 해석하는 등 아쉬운 점이 있기는 합니다.



<레전드> 시리즈가 다양한 차별을 아무렇지 않게 다룰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서사 상에서 그 어느 시간대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캡틴으로 활약하는 사라 랜스는 양성애자이고 중반 시즌에서 합류한 에이바 샤프와 공식적으로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배트우먼>에서, 고담시의 식당에서 케이트와 소피가 여자끼리 손잡았다고 쫓겨난 에피소드를 생각해 보면 상대적으로 사라와 에이바는 굉장히 자유롭게 연애하는 축에 속합니다. 이런 자유는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수많은 차별들은 어쩌면 현실에서 기반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장치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레전드로 활약하는 것은 자유롭고 즐겁지만 돈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이들이 타임쉽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현실에 존재하는 제약을 알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시즌 1에서 캡틴으로 활약했던 립 헌터가 타임쉽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가족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현실에 발을 내딛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은 <레전드> 시리즈를 통틀어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입니다. 자리는 시즌 4의 마지막에서 네이트를 살리기 위해 어려운 선택을 하고 그 결과 동생까지 살려내지만 현실에서 지워집니다. 그리고 이번 시즌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돌아오지만 결국 다시 선택을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죠. 문제는 자리의 선택이 모든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인데 이들 모두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합니다. 정작 현실에는 발을 딛고 살지 못하는 이들이 자신의 현실은 힘들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역설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죠.


가장 자유롭게 서사를 활용할 수 있는 <레전드> 시리즈는 아쉽지만 종종 한계를 보여줍니다. 흑인 캐릭터까지도 다양하게 활용하면서도 아시아인 캐릭터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못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입니다. 애로우버스 내에 아시아인 자체가 그다지 많지 않기는 하지만 수많은 캐릭터가 들락날락하는 <레전드> 시리즈에서조차 아시아인의 비율이 적다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겨우 합류할 수 있었던 시간사무국 출신의 모나 우가 묘사되는 모습은 아시아인으로서 불쾌할 정도입니다. 모나는 많은 활약을 하고도 레전드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괴물과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괴물에게 물려 같은 괴물의 처지로 전락하죠. 마블 시리즈에서도 한국계 프랑스인인 폼 클레멘티에프가 벌레의 형상을 한 맨티스로 등장했을 때도 이와 같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흑인까지도 같은 미국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아시아계는 결국 이방인으로 바라보는 미국의 시선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결국 모나는 레전드 멤버로 거의 활약하지 못하고 하차합니다. 레전드들이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아시아 국가를 다녀올 때에도 유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오가는 시간대는 일본과 중국, 홍콩 정도이고 그마저도 전형적인 국가 이미지를 반영합니다. 이들에게 있어 (한국 말고도) 베트남 등의 동남아시아는 아시아가 아닌 제 3세계일지도 모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고증조차 하지 않고 묘사한 것처럼 아시아를 묘사하는 방식도 발전이 없다면 제작자의 게으름을 탓해야 합니다.



런칭 초에는 기존 애로우버스의 어두운 분위기와 레전드팀 특유의 병맛이 잘 어우러지지 않아 어정쩡한 분위기가 있었지만 시즌 5가 되면서 확실히 분위기가 잡힌 것은 인정할 만한 부분입니다. 이는 콘스탄틴의 합류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존 <콘스탄틴> 시리즈는 오컬트적 분위기가 강해 어두운 걸 넘어서서 기괴할 정도였지만 콘스탄틴의 괴팍한 성격이 의외로 레전드와 맞는 부분이 있었죠. 지상과 지옥을 오가는 콘스탄틴의 본래 분위기가 다양한 시간대를 오가는 레전드팀과 합이 맞은 것입니다. 또한 레전드 대부분은 과거에 대한 회한이나 죄책감을 안고 사는데 퇴마를 하며 수많은 이들을 잃어온 콘스탄틴이 제공할 소스는 매우 충분하죠. 특히 이번 시즌은 콘스탄틴이 과거 퇴마 의식에서 구하지 못해 지옥으로 끌려간 소녀 아스트라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었습니다. 현실에서 사람이 바뀌기는 정말 어렵습니다만 <레전드> 시리즈에서는 유독 선인으로 돌아서는 빌런이 많습니다. 아스트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성장기를 지옥에서 보냈으면 영원히 지옥의 여왕으로 살 법도 한데 레전드 팀에서 지내다가 금방 마음이 돌아서죠. 이런 부분들이 억지스럽기도 합니다만 컨셉이 병맛인 만큼 그러려니 하고 보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고,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레전드> 시리즈가 가장 중심으로 다루는 주제는 가족이기도 합니다. 애초에 레전드 팀을 창설한 립 헌터가 시간사무국을 이탈한 이유는 자신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라 랜스의 비극적인 가족사는 질릴 정도로 우려내고, 에이바 샤프는 반대로 가족이 없다는 점이 끊임없는 트라우마로 등장합니다. 시즌 1에서는 동생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던 아톰/레이 팔머의 가족사가 에피소드로 활용되고 그나마 멀쩡해 보였던 네이트 헤이우드도 아버지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았죠. 결국 네이트의 부자간 관계는 한 시즌을 통채로 우려먹을 수 있는 에피소드들을 창출해 냈습니다. 이번 시즌에서는 존 콘스탄틴과 아스트라의 가족사가 전 시즌을 지배합니다. 아스트라가 돌아서는 이유도 어머니에 대한 추억 때문입니다. 어쩌면 <레전드> 시리즈는 다양성을 표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미국적인 가치인 가족중심 사회를 지향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레이 팔머가 레전드팀을 떠나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도 노라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데미안 다크는 자신의 딸이 레전드팀과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레이를 꼬드겨(?) 정착하게 만듭니다. 사라와 에이바가 레전드팀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미국 사회가 다양성을 인정하기 시작했음에도 전통적이지 않은 가족에는 아직까지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지도 모릅니다.



<레전드> 시리즈는 고평점을 주기는 어려운 드라마입니다. 그럭저럭 보는 재미는 있지만 퀄리티가 높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보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곤 합니다. 어두운 고담시의 배트맨으로 대표되던 DC가 이렇게 다른 색채의 드라마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 가끔은 놀랍습니다. 아쉬운 지점도 있기는 하지만 현실의 제약에서 벗어나 다양한 사람들의 서사를 담아낼 수 있는 자유를 지향하는 한 <레전드> 시리즈는 지속될 것입니다. 애로우가 떠난 애로우버스의 히어로들은 이제 자리를 잡았고 레전드팀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작도 없는 드라마가 여기까지 올 줄 누가 알았을까요. 다음 시즌에서는 또 한발짝 도약한 모습으로 나타나주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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