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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Jan 18. 2021

낡은 서사의 귀환은 왜 환영받는가

멜로 서사의 비현실성이 갖는 매력

네덜란드 영화 <블라인드>는 2007년 작품이다. 제작 당시에도 현대를 배경으로 하지 않았던 데다 2000년 이후 작품들은 필름 상태만 멀쩡하면 소품으로 등장하는 핸드폰을 제외하고는 작금의 영화와 제작 시기를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미쟝센이 잘 구현된 경우가 많다. 특히 <블라인드>는 흑과 백을 극렬하게 대비한 미술이나 동화 눈의 여왕을 모티프로 구현한 설원 등 꽤나 세련된 미쟝센을 자랑한다. <블라인드>가 2007년 작품이라는 것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부분은 미쟝센이나 필름의 질감이 아닌 서사다. 미녀와 야수 계열의 기존 성 역할을 뒤집었다는 점에서 신선한 서사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지만 <블라인드>의 기본적인 플롯은 지고지순한 사랑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고전적이다. 흥미로운 점은 <블라인드>를 스크린에서 보고 싶어한 관객이 많았기에 무려 14년이 지나 극장에서 이 낡은 서사가 부활했다는 점이다. 미쟝센이 세련됐다고는 하나 훨씬 뛰어난 미술을 자랑하는 영화는 널렸고 주연 남배우가 크게 매력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이 낡은 서사가 관객에게 소구했다는 점은 되짚어 볼만하다. 영화를 중간까지만 봐도, 아니 처음부터 보지 않아도 결말까지 충분히 예측이 가능한 이 영화는 왜 스크린에 당도해야만 했을까. 단순히 코로나 사태로 인한 창고영화 개봉이라기엔 <라라랜드>가 사골이 되도록 우려먹히는 극장 생태계에서 <블라인드>는 그 나름의 생명력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서사는 간단하기 그지없다. 맹인인 루벤(요런 셀데라흐츠 분)은 스포일드 키드로 자랐고 어느 날 책을 읽어줄 마리(헬리너 레인 분)가 찾아온다. 알비노 증후군으로 태어나 평생 부모로부터 미움받고 자란 중년의 마리는 루벤을 휘어잡지만 어느 순간 둘은 사랑에 빠지고 만다. 하지만 루벤이 어느 날 눈을 뜨게 되고.. 뭐 그렇고 그런 얘기다. 스크린에서는 두 시간에 달하는 이야기지만 요약하면 두세 줄로도 충분히 묘사가 가능하다. 디즈니의 <미녀와 야수> 서사를 뒤집은 것만 같은 이야기지만 마리는 마법에 걸린 것이 아니기에 진실한 사랑이 마리의 외양을 바꿔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잠깐, 정말로 미녀/벨에 대응되는 인물이 루벤이고 야수/왕자에 대응되는 인물이 마리인가. 마법에 걸렸다가 풀리는 야수처럼 루벤은 잃었던 시력을 되찾으며 벨처럼 루벤을 사회화시키는 인물이 마리다. 단순히 사회적인 미의 기준에 맞는 외양을 가진 것만으로 성 역할이 뒤바뀌었다고 하기엔 벨도 마리도 사회적인 약자이며 루벤과 야수는 마법에 걸렸든 시력을 잃었든 막대한 재력을 가진 부잣집 도련님이다. 야수와 루벤은 모두 스포일드 키드로 묘사되고 이들에게 사회화 및 돌봄노동을 제공하는 것이 벨과 마리라는 점에서 결국엔 <블라인드> 또한 디즈니 계열의 동화라고 볼 수도 있다. 성 역할은 뒤바뀌지 않았으며 단순히 벨이 가지고 있던 사회적인 기준에 맞는 미가 마리에게서 박탈되었을 뿐이다. 진정 성 역할이 바뀌려면 마리는 부를 물려받았든 본인이 사업을 했든 돈으로 사람을 부릴 만한 레벨이었어야 하며 재력으로 루벤을 휘어잡았어야 한다. 물론 사회적인 미의 기준이 일반적으로 여성에게 훨씬 엄격하게 적용된다는 점에서 기준에 맞지 않는 마리와 기준에 적합한 루벤이 사랑하게 된다는 설정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마리가 약자라는 사실은 서사를 과거로 후퇴시키는 요인 중 하나다.



<블라인드>에서 외려 가장 신선했던 설정은 미움받고 자란 마리의 과거다. 어린 시절 읽고 자란 수많은 동화들은 사랑받지 못한 소녀가 어떻게 마녀가 되는지를 잘 보여주곤 했다. 소녀들은 본인이 타고난 아름다움으로 모두에게 사랑받거나 아름답지 못하더라도 고운 마음씨를 지니면 언젠가 미녀로 변신한다(심한 경우 미녀로 환생한ㄷ...). 즉 소녀들은 사랑받고 자라야만 하는 존재인데 이 사랑은 본인이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 상이었다. 어린 시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프로이트가 들었다면 황당할 만한 이야기다. 아동들이 받아야 하는 사랑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이다. 존재 자체로서 받았어야 할 사랑을 마리는 존재 자체로서 부정당한다. 그리고 그 결과 신체에 남은 수많은 흔적으로 인해 거울조차 바라보지 못하고 천으로 전부 가린다. 이런 마리를 아마도 생애 최초로 사랑한 사람이 루벤이다. 마리는 루벤을 사회화시켜주지만 루벤은 마리가 받았어야 할 사랑을 늦게나마 주는 부모의 역할을 대행한다. 누구에게나 차갑게 대하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던 마리는 루벤과 사랑에 빠지고서야 거울을 보고 미소짓기 시작한다. 학대받았던 증거인 마리의 상처는 루벤에게는 아름다운 얼음꽃이다. 아마도 관객이 스크린에서 보고 싶어하는 환상이란 이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하던 나의 단점이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장점으로 비춰지는 환상. 그리고 누구나 겪었을 법한, 어린 시절 받은 상처까지도 사랑해주는 누군가. 


즉 <블라인드>를 단순히 젊고 잘생긴 남성과 중년의 못생긴 여성의 판타지 멜로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 반대로 맹인이라는 루벤의 단점은 사회적인 미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마리에게는 장점으로 다가온다. 수많은 커플 가운데 상대방의 단점을 끌어안는 정도가 아니라 장점으로 받아들이는 커플이 얼마나 될까. <블라인드>의 진정한 판타지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존재할 거라는 서사다. 수많은 멜로 영화에서 우려먹어온 환상이지만 <블라인드>처럼 설득력이 있기도 쉽지 않다. 이런저런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한다는 서사가 대부분이다(<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가장 대표적이다). 심리학적으로 반대되는 성격을 지닌 커플보다는 유사한 성격을 지닌 커플의 이혼율이 더 낮다고 하는데 대부분의 멜로/로맨틱 코미디 영화들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을 어떻게든 커플로 엮으려 들곤 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단점을 사랑으로 극복한다는 낡은 서사를 재탕한다. <블라인드>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가진 단점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장점으로 소구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블라인드>가 비현실적인 이유는 이런 상대를 현실에서 만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단점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단점이거나 개의치 않는 부분일 수는 있지만 장점이 되기는 어렵다. 현실적인 연애 관계가 서로 튀어나온 부분을 깎아가며 함께 하는 관계라면 마리와 루벤의 연애는 퍼즐조각이 맞춰지는 관계에 가깝다.



순수한 사랑이 서로를 구원할 거라는 믿음이 상당히 순진하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지 스크린에서는 소구력이 상당하다. 동화 눈의 여왕을 모티프로 한 작품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흥행한 작품은 <겨울왕국>이다. <겨울왕국>이 헤테로 로맨스를 바탕으로 하는 대신 안나와 엘사의 자매애를 기반으로 한 이유는 애니메이터들이 진정한 사랑은 헤테로 로맨스가 아닌 자매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근의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들은 순수한 사랑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연인관계에서 현실적인 설정을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블라인드>의 시대배경이 현대가 아닌 이유는 순수한 사랑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현실적인 문제점들을 가려줄 배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핸드폰이나 TV와 같은 미디어 매체를 배제하고 루벤에게 유일한 유희라 할 수 있는 독서를 마리가 제공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사와 주제 모두 진부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만큼 관객이 변하지 않고 보고 싶어하는 서사가 바로 순수한 사랑이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가 은퇴한 방식 또한 관객이 원하는 순수한 사랑에 기초한다. 플레이보이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마저도 결국엔 페퍼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지 않았던가. <블라인드>는 아직까지도 현대 관객이 원하지만 현실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판타지를 설원을 배경으로 극대화해 스크린으로 불러들인 이야기다.


관객이 보고 싶었던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하고, <블라인드>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장면은 어떤 장면일까. 사람마다 의견은 분분하겠지만 눈을 뜬 루벤이 도서관에서 마주친 마리를 보고도 실망하지 않는 장면이 순위에 들어야 하지 않을까. 붉은 머리에 녹색 눈(서양에서 녹색 눈은 그 희소성으로 인해 미의 상징 중 하나로 취급된다), 스물 한 살의 아가씨를 상상했던 루벤은 백발에 검은 눈을 가진 중년 여성을 보고도 목소리로 마리임을 알아채지만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영화라 아름다워 보이는 장면이지 성 역할을 바꾸어 박보검이나 서강준을 상상하고 눈을 떴다가 유해진을 만났다고 현실에서 생각해 보면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영화의 결말은 그래서 여러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루벤의 결단은 마리를 위한 것인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인가. 한편 씁쓸한 것은 사회적인 미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여성은 결국 시야에서 지워져야만 하는 것인가에 관한 논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마리는 루벤을 만나 부모의 역할을 대행해줄 누군가는 만났지만 끝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는 못했다. 마리와 루벤은 나름의 성장을 거쳤지만 함께 하기 위해서는 결국 정신적, 신체적으로 퇴행해야만 하는 셈이다. 지극히 동화스러운 엔딩이고 영화의 분위기에도 어울리지만 곱씹을수록 안타까운 엔딩이기도 하다. 결국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마리가 붉은 머리에 녹색 눈을 가지고 스물 한 살로 돌아가는 마법이 필요했던 것일까?



<블라인드>는 진부하고 낡은 서사를 기반으로 한 비현실적인 멜로 영화지만 설원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젊고 잘생긴 루벤은 검은 머리에 빛을 싫어하는 어둠으로 대변되는 동시에 중년의 상처투성이 마리는 백발을 가지고 하얀 눈 속에서 찾아온 빛처럼 표현된다. 마리는 눈길을 걸어와 루벤이 있는 곳에서 커튼을 걷어 루벤에게 빛을 선사하지만 사라질 때도 마찬가지로 빛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 이야기도 환상적이라고 줄곧 이야기했지만 루벤에게 마리야말로 환상이었던 건 아닐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동화책을 읽어주고 자신을 돌봐주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환상의 여인 마리. 루벤의 결정은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대신 환상을 돌려받기로 한 결단이었을지 모른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블라인드>가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모두가 문을 걸어잠근 이 시대, 그렇게 <블라인드>는 14년만에 스크린에서 설원의 마법을 펼쳐 보였다. 조금은 관객의 마음에 쌓인 눈이 녹았기를 바라면서.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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