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 Jun 07. 2021

환경과 유전의 전쟁

크루엘라를 만든 건 양육인가 유전인가

*영화의 스포일러가 쬐끔..(?) 포함됩니다.


인간의 성장에 있어 타고난 유전적 요소와 끊임없이 주어지는 외부적인 자극은 평생에 걸쳐 성격을 결정짓는다. 노력도 유전이라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유전으로 결정된다는 설이 최근에는 힘을 얻고 있는 양상이지만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사람이 확 변하는 등의 사례도 주변에서 간혹 볼 수 있다. 또한 사이코패스 유전자를 타고나더라도 어린 시절 친사회적인 양육을 받으면 친사회적 사이코패스로 성장한다는 나름 꽤 증명된 가설도 있다(궁금한 분들에게는 도서 <괴물의 심연> 추천). 결국에는 타고난 유전자가 환경의 특정 요소를 만나면 발현된다는, 시쳇말로 '없는 걸 만들 순 없다'는 가설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크루엘라(엠마 스톤 분)의 전사를 멋드러지게 만든 <크루엘라>는 환경적인 요소와 유전적인 요소를 모두 소개하고 우리가 알고 있던 크루엘라를 만든 것이 무엇인지는 관객의 판단에 맡긴다. 다정한 캐서린(에밀리 비첨 분)의 손길 아래 자란 에스텔라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하고 캐서린이 죽은 후 정이 많은 호레이스(폴 월터 하우저 분)와 재스퍼(조엘 프라이 분)와 지내며 타인의 애정을 아는 존재로 자라난다.


영화의 반전이 드러나기 전까지 관객들은 에스텔라가 흑화한 계기를 남작 부인(엠마 톰슨 분)의 악행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에스텔라가 몰랐던 출생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왜 에스텔라가 그토록 패션계를 동경했는지, 그리고 왜 흑화한 순간 누구보다도 잔인해질 수 있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한국 드라마였다면 꽤나 진부했을 이 출생의 비밀은 에스텔라와 크루엘라라는 두 캐릭터를 오가며 흥미롭게 변주된다. 크루엘라를 만든 것이 남작 부인이었다면 에스텔라를 만든 건 캐서린이다. 오랜 체로키 인디언의 이야기처럼 선한 늑대와 악한 늑대가 내면에서 싸울 때 이기는 건 먹이를 받는 쪽이다. 오랫동안 크루엘라를 억누르던 에스텔라는 남작 부인의 착취를 견디다 못해 크루엘라를 소환한다. 매일매일 시험당하며 노동착취를 일삼는 패션계에서 뛰어난 재능으로 남작 부인의 자존심을 아무렇지 않게 짓밟을 수 있는 건 크루엘라 뿐이기 때문이다. 크루엘라가 등장하는 순간 관객들은 환호하면서도 에스텔라를 그리워했겠지만 사실 에스텔라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크루엘라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크루엘라가 없었다면 에스텔라는 우울증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정신과 치료를 받거나 자살했을지도 모른다.



즉 에스텔라는 크루엘라를 억누르며 산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크루엘라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남았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크루엘라 또한 에스텔라의 도움으로 성인이 될 때까지 사회에서 배척당하지 않고 생존할 수 있었다. 에스텔라가 아니었다면 크루엘라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소년원을 여러 번 들락날락하고 전과 n범이 되어 디자이너로 채용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학교에서도 퇴학당할 정도로 복수를 일삼았던(사실 영화를 보면 크루엘라가 그렇게 잘못한 것도 없어 보이긴 하지만) 어린 크루엘라는 캐서린없이 런던에 도착해 크루엘라로서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크루엘라를 감추기 위해 머리를 염색하고 에스텔라를 전면에 내보낸다. 물론 생존을 위해서는 에스텔라를 잠시 접어두고 크루엘라를 등장시켜 소매치기도 마다하지 않고 술에 취해서는 일하던 백화점의 쇼윈도를 자기 맘대로 바꾸는 것도 서슴지 않기도 한다. 재스퍼는 에스텔라가 생존을 위해 크루엘라를 이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크루엘라보다는 에스텔라로서 살아가길 바랐기에 소매치기를 멈추고 백화점에 취직할 수 있도록 수를 쓴다. 하지만 백화점에 취직한 에스텔라는 결국 내면의 크루엘라로 인해 해고 위기에 처하는 동시에 크루엘라를 발현시키는 남작 부인의 회사로 전직한다. 


캐서린은 에스텔라에게 크루엘라라는 방어기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다른 사람과 어울려 지내라고 매번 속삭인다. 그러는 동시에 에스텔라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지지대가 되어 에스텔라가 사라지지 않도록 독려했다. 에스텔라의 흔적은 오래도록 크루엘라에게 남아 남작 부인과는 다르게 재스퍼와 호레이스를 비롯해 에스텔라를 돕는 이들이 떠나가지 않도록 돕는다. 남작 부인과 크루엘라가 동일한 유전성을 공유함에도 결말을 공유하지 못하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남작 부인의 전사가 거의 드러나지 않기에 분석에 한계가 있지만 남작 부인의 주변 인물들로 미루어 볼 때 성장기에 친사회적인 성향을 발달시켜 줄 만한 이들이 없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심복인 보리스(마크 스트롱 분)는 아마도 남작 부인이 어느 정도 지위에 올라 사이코패스 성향을 온전히 발전시킨 후 업무 관계로 만났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리스가 영향을 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남작 부인 정도 되는 사이코패스는 주변인을 오래 곁에 두지 못하는 경향이 강한데 보리스는 에스텔라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거나 남작 부인 곁에서 사무적으로 대하며 월급을 받는 생활에 만족했을 수도 있다. 이래저래 에스텔라는 캐서린, 재스퍼와 호레이스, 보리스 그리고 아니타(커비 하웰 바티스트 분)와 같은 주변 인물들이 친사회적인 성향을 보존시켜 준 셈이다.



남작 부인에게 복수를 하고 패션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크루엘라를 소환했던 에스텔라는 크루엘라가 믿었던 친구들마저 밀어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에스텔라를 도로 불러낸다. 에스텔라를 그리워하던 재스퍼는 크루엘라에게서 에스텔라를 발견하고 크루엘라에게 돌아온다. 사이코패스의 반사회적인 성향은 놀랍게도 생존에 도움이 되기에 인간 사회에서 소수로나마 유전되어 오는 것인데, 현대 사회에 이르러 친사회성이 배제된 사이코패스는 생존이 어려워져 친사회적인 모습이 학습되도록 진화했다. 사이코패스는 감정에 휘둘리는 일이 적어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본인에게 이득이 되는 쪽을 선택하길 서슴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기에 현대 사회에서 주식이나 게임을 하는 데 있어 유리하다고도 할 정도다. 친구들의 감정은 생각하지 않고 싫으면 나가라던 크루엘라는 마지막 작전에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경찰서로 돌진해 삐친 친구들을 구해온다. 친사회적인 면모를 가진 에스텔라가 정신을 차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크루엘라 또한 생존과 복수에 재스퍼와 호레이스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관객이 감정 이입하기에 쉽지 않은 크루엘라는 그래서 매력적인 캐릭터로 거듭난다. 에스텔라와 크루엘라를 오가는 희대의 악녀는 크루엘라로서는 쾌감을, 에스텔라로서는 연민을 선사한다. 한편으로는 천재 사이코패스 유전자와 친사회적 양육의 환상적인 만남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보조 출연자라고 해도 될 정도의 화려한 의상, 엠마 스톤과 엠마 톰슨의 눈을 뗄 수 없는 케미와 연기는 관객의 시선을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내내 집중시킨다. 영화 말미 에스텔라는 이제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크루엘라에게 유산을 남겼다는 나레이션을 통해 에스텔라의 유산이 크루엘라에게 이어질 것을 암시한다. 속편 제작이 확정되었다는 크루엘라의 이야기는 에스텔라를 통해 살아남아 크루엘라를 누구보다 화려하게 빛낼 것이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통제를 위한 통제가 낳는 비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