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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May 31. 2021

통제를 위한 통제가 낳는 비극

인문학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어쩔 수 없이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됩니다.


지금은 없어진 규정이라고 하지만 학창시절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 두발 규제였다. 선진국에서는 학생들의 머리 길이를 통제하는 것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들 하는데 유독 한국에서는 오래도록 두발규정이 지속되어왔다. 졸업한 후 선생님들에게 두발규제 규정은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더니 너처럼 말 잘듣는(?) 학생은 괜찮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을 통제하려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학생들을 통제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 자체도 구시대적인 발상인데 왜 하필 그 대상이 두발인지,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한 선생님의 비약으로는 머리를 기르면 껄렁껄렁해져서(?) 오만 단계를 거쳐 결국 마약까지(..?) 하게 된다고 했었는데 그렇다면 대학생들은 죄다 마약해야 정상 아닌가. 애초에 교복을 비롯한 학교의 온갖 알 수 없는 규칙을 만들어낸 국가는 영국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비합리적인 규칙마저도 따르도록 함으로써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런 교복이나 학교의 규칙 등은 시간이 지나며 어느 정도 낭만성이 가미되어 호그와트의 배경이 되었다고 하는데, 대한민국에서는 해리 포터만한 콘텐츠가 나온 적이 없으니 이제 불합리한 통제 규정은 없앨 때가 되었다. 실제 많은 선진국들에서는 두발 규정을 포함한 비합리적인 규칙은 많이 사라지고 학생의 자율권을 인정하기도 하고..


다만 학생의 인권을 인정하고 규정을 완화하는 과정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이들은 성장하는 청소년이며 충동을 관장하는 전전두엽이 온전히 성숙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전전두엽은 일반적으로 20대 초반까지 성장하며, 20대 후반까지도 성장이 멈추지 않기도 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성인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때로는 위험한 행동도 청소년은 전지전능성이라는 특징으로 행하곤 한다(실제 심리학계에서 연구된 사항이다). 그렇기에 단체로 살아가는 이 사회에 풀어놓기(?) 전에 사회의 규칙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사회의 규칙은 복도에서 뛰면 안된다는 단순하고 사소한 것부터 타인의 신체에 동의 없이 접촉을 하면 안된다는 것까지 고차원적인 부분을 망라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규칙을 전수할 인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해 지도 인력이 물리적인 위협을 당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보이저스>는 이런 상상을 우주로 옮겨 놓은 영화다. 애초에 30명의 아이들만을 우주로 보낼 계획이었던 인류는 리처드(콜린 파렐 분)의 자원으로 한 명의 양육자이자 교육자를 탑승시킨다. 어릴 때는 그저 리처드를 잘 따르기만 했던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호기심이 발달하고 당연한 일상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더욱 큰 문제는 이들은 우수한 유전자를 기증받아 인공적으로 탄생된, 지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우수한 청소년들이라는 사실이다. 



과학자들은 우주선이라는 좁은 환경에서, 사회의 규칙을 알려줄 이가 극도로 부족한 점을 고려하여 선발된 아이들에게 블루라는 파란 물약을 먹인다. 아무렇지 않게 블루를 복용하던 크리스토퍼(타이 쉐리던 분)와 잭(핀 화이트헤드 분)은 어느 순간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그리고 블루가 자신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충동을 억제해 쾌락을 금지하는 약물이라는 것을 알고 리처드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크리스토퍼와 잭의 행동은 여기서 갈라진다. 크리스토퍼는 리처드를 믿고 블루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잭은 리처드를 믿지 못하고 잭에게 복수하려고 한다. 영화에서 크리스토퍼는 이성, 잭은 충동을 상징하는 것처럼 연출되었지만 사실 잭의 행동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이미 아이들을 믿지 못하고 충동을 억제해 쾌락을 금지한 어른들에게 잭이 불신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잭은 사실 과학자들이 선발된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과정에서 인간이 아닌 인류를 보존할 유전자로 규정하고 인문학적 지식을 전수하기 않았기에 발생한 부작용에 가깝다. 잭의 충동적인 행동에 대해 그래선 안된다고 지적하는 크리스토퍼에게 잭은 끊임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대답한다. 크리스토퍼가 이에 대해 할 말이 없는 이유는 실제로 아무도 그들에게 '그래선 안되는'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블루 복용을 멈추고 가장 먼저 셀라(릴리 로즈 뎁 분)에게 이성적인 매력을 느끼고 셀라의 허락 없이 셀라에게 신체적인 접촉을 폭력적으로 행사하는 잭이 리처드로부터 가장 먼저 듣는 말은 "신체 접촉 금지야"다. 잭이 리처드에게 배신감을 느낀 이유는 리처드는 셀라에게 가벼운 스킨십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하기 때문이다. 리처드는 할 수 있지만 잭이 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성적인 충동을 제어하는 약만 줄창 먹이고 성교육은 하나도 안 한 것인가 싶어 황당할 지경이었는데, 선진국에서는 수업시간에 콘돔 사용법을 알려주고 학교에 콘돔 자판기도 둔다는 마당에 2063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맞나 싶었다. 잭의 충동은 결국 타인을 배려해야 한다는 사회의 규칙을 전수하지 않아 발생한 범죄다. 셀라를 자신과 같이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로 인식하고 신체접촉이든 뭐든 상대방의 허락 없이는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도덕교육 없이 행동 자체만을 금지시켰을 때 억눌렸던 충동은 더욱 거세게 반동한다. 리처드가 셀라에게 접촉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암묵적으로) 셀라에게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실제 리처드의 스킨십은 어깨에 살짝 손을 올리는 등 애정이 담긴 가벼운 선에서 그치지만 잭의 스킨십은 셀라의 거부에도 폭력적인 수준까지 나아간다. 하지만 잭은 두 행동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며 그렇기에 리처드를 신뢰하지 못한다.



인문학 교육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을 이끌 사회생활 선배도 없는 좁은 우주선에서 결국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성을 잃는다. 그렇게나 우수하다는 유전자를 지닌 이들이 근거도 빈약한 잭의 거짓말을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 선체에 외계인이 잠입했다는 잭의 거짓말은 그럴듯해 보이는 정황으로 뒷받침되지만 잘 생각해 보면 황당한 주장이다. 실체도 보이지 않는 외계인을 본 건 잭 뿐이고 외계인이 촬영되었다는 영상은 잭이 시스템실에 홀로 들어간 이후로 대부분이 삭제되었다. 애초에 위험하거나 귀찮은 임무는 모두 타인에게 맡기려 드는 잭이 외계인이 있을지도 모르는 시스템실에 홀로 들어간 것 자체가 이상한데 아무도 잭의 행동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심지어 크리스토퍼가 리처드의 죽음에 관한 진실이 녹화된 영상을 보여줘도 아이들은 여전히 잭을 따른다. 현실에서도 고학력자가 자신이 고집하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증거를 발견해도 높은 지성을 지닌 자신이 잘못된 판단을 내렸을 리 없다는 사고로 인해 기존 사고의 틀을 쉽사리 변경하지 못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고 한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확인하는 사회과학적 입증의 틀을 배우지 못한, 전전두엽이 미성숙한 아이들이 더군다나 귀찮은 규칙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잭에게서 등을 돌리기란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크리스토퍼가 나선 시점에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잭의 팀에 합류해 크리스토퍼의 팀이 소수자가 된 상황은 판단을 어렵게 만든다.


 <보이저스>는 헐리우드의 유망주로 대표되는 젊은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청소년의 광기와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영화이지만 한편으로 사회적인 규칙을 알려주는 일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서도 말한다. 단순히 아이들을 통제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규칙이 만들어지고 지켜져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은 청소년을 성인과 같은 인격체로 본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두발규제 규정이 없어져야 하는 이유는 모발의 길이에 대한 통제가 청소년에게 유익한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결과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와 셀라는 영화 내내 잭을 보며 저런 충동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이 인간의 본성일까 고민하지만 이내 스스로를 돌아보고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잭을 따르던 아이들은 규칙을 어기고 마음대로 행동하던 잭이 사라지자 지도해줄 성인이 없이도 기존의 평화와 질서를 회복한다. 영원히 성숙하지 않을 것만 같던 전전두엽도 언젠가는 성장을 멈추듯 신행성에 도달하지 못할 것만 같던 아이들도 결국 행성을 발견하고 환호한다. 모든 성인들은 청소년기를 거쳤음을, 그렇기에 청소년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고 교육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인문학이 하는 역할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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