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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Jul 19. 2021

오필리아가 돌려받은 것들

시각을 달리하면 보인다

영화 <오필리아>는 제목부터 햄릿의 이야기를 오필리아(데이지 리들리 분)의 이야기로 각색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영화다. 오필리아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음에도 자신만의 시각이나 주체성을 가지지 못했다. 존 에버렛 밀레이의 그림 <오필리아>는 실성한 오필리아가 익사하기 직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영화에서는 이 그림의 미적인 측면을 빌려오면서도 전혀 다른 시각을 부여했다. 남성 캐릭터 위주의 서사였던 <햄릿>은 오필리아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면서 색다른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오필리아>에는 유명한 햄릿의 대사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도 등장하지 않고, 성장한 햄릿(조지 맥케이 분)은 영화가 시작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등장한다. 오필리아에게 죽음의 상징이었던 물은 완전히 다른 매개체로 변신하고 오필리아의 실성은 수동적인 삶의 결과가 아닌 전략으로 바뀐다. 최근 기존의 이야기를 주인공이 아닌 캐릭터, 특히 여성 캐릭터의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서사 자체를 재해석하는 경향이 많아졌는데 그 중에서도 <오필리아>는 오필리아에게 특히 많은 주체성을 부여한다. 오필리아는 햄릿의 이야기를 자신의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여성 동지, 미래 그리고 자유를 돌려받는다.


최근 개봉한, <피터팬>을 재해석한 <웬디>를 보면서 어딘가 아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흑인 피터팬이나 후크 선장의 재해석, 적극적인 웬디의 모습은 새로웠지만 결국 남자아이들의 모험 이야기로 귀결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웬디는 자신이 주인공인 이야기에서조차 남자아이들에게 왜 여자아이를 데려왔냐는 핀잔을 들어야 하고, 자신만의 모험을 즐기기보다는 피터와 두 오빠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에 더 충실하다. 오필리아는 자신의 삶을 남자를 포함한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으려 애쓴다. 특히 오필리아가 위험에 처했을 때 도움을 청하는 이들은 대부분이 여자다. 로맨스의 중심에 여성 캐릭터를 놓음으로써 해당 캐릭터의 생사를 결정지었던 기존의 서사와는 다르게 오필리아는 자신의 삶을 선택하려고 하고, 서사가 진행될수록 주체성은 강해진다. 햄릿을 사랑하지만 오필리아는 자신의 삶을 더욱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햄릿과의 관계에서도 햄릿에게 끌려다니기보다는 주도권을 쥐고 햄릿을 이끌어 가려고 하고, 오필리아와는 다르게 자신의 과거를 포기하지 못하는 햄릿을 본 오필리아는 자신의 삶을 햄릿보다 우선한다.



서사의 주체가 바뀌면서 오필리아가 가장 먼저 돌려받은 것은 여성 동지다. 햄릿의 연인으로 등장해 서사의 비극성을 강화시키는 역할 이외에는 하지 못했던 오필리아는 대신 폴로니어스의 딸로 목소리를 내면서 등장한다. 어린 오필리아는 광대들의 연극에 의견을 개진하며 식탁 아래에서 나타나고 거트루드 왕비(나오미 왓츠 분)의 눈에 들어 시녀로 발탁된다. 그런 오필리아를 시기하는 시녀들이 있기는 하지만 오필리아에게는 든든한 뒷배인 거트루드 왕비가 있어 생존의 안위를 보장받는다. 거트루드의 비밀을 목격하고도 다른 이들과 나누어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대신 침묵으로써 신의를 지킨 오필리아는 거트루드의 도움으로 마지막까지 생존한다. 거트루드 이외에 거트루드를 통해 알게 된 거트루드의 언니 메틸드(나오미 왓츠 분) 또한 오필리아의 동지 역할을 수행한다. 메틸드는 자신의 비밀을 오필리아에게 알려주지만 오필리아는 이 비밀 또한 결정적인 순간이 오기 전까지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는다. 오필리아의 성격조차 알기 어려웠던 원작에 비해 <오필리아>는 단호하고 충직한 오필리아의 주체성을 확고히 하면서 여성 캐릭터의 성격을 묘사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일갈한다.


<오필리아>에서 볼 수 있는 희한한 특징 중 하나는 메틸드와 거트루드의 이름이 거의 불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수도 없이 불리는 남성 캐릭터들의 이름은 이들이 그 자신으로서 존재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등장 지분이 거트루드보다도 적은 레어티스(톰 펠튼 분)조차도 누군가가 그를 지칭할 때는 오필리아의 오빠, 폴로니어스의 아들 대신 이름으로 불린다. 상대적으로 클로디어스(클라이브 오웬 분)가 이름으로는 적게 호칭되기는 하지만 이는 서사 초반에 이미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으로 군림하며 오히려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결례인 환경이 조성되기 때문이다. 거트루드는 여왕(Queen) 대신 왕의 아내를 의미하는 왕비(King's wife)로 불린다. 결국 거트루드는 오필리아의 서사에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를 택했고, 그렇기에 삶의 안위를 보장받지 못한다. 메틸드 또한 지난 연인을 잊지 못하고 거트루드의 약을 제조해주면서 거트루드의 자매로서 존재하는 삶을 택한다. 거트루드와 메틸드는 자신의 위치를 보장해주는 타인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위치를 스스로 택하면서 오필리아와는 다른 결말을 맞게 된다. 반면 끊임없이 이름으로 호칭되는 오필리아는 서사 안에서 오롯이 그 자신으로서 존재하며 스스로의 생존을 책임지면서 파멸을 맞은 덴마크 왕국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오필리아와 다른 캐릭터들이 갖는 가장 큰 차이점은 이들의 시선이 향하는 시간대다. 햄릿을 비롯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과거에 집중한다. 오필리아와 비밀리에 혼인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겠다던 햄릿도 자신의 왕좌가 빼앗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복수심에 불탄다. 오필리아와 함께 하는 미래 대신 아버지와 왕좌를 잃은 과거에 집착하는 햄릿은 덴마크 왕국과 함께 무너진다. 이는 거꾸로 오필리아가 자신에게 없었던 미래를 돌려받은 셈이라고 볼 수도 있다. 기존 햄릿의 서사 속 모든 인물들의 시선은 과거를 겨냥한다. 햄릿의 아버지인 선왕조차 죽은 후에 살해당한 과거를 놓지 못하고 햄릿의 주변을 맴돈다. 왕좌와 거트루드를 차지한 클로디어스도 햄릿이 주도한 연극에서 과거의 흔적을 발견하고 크게 화를 낸다. 새롭게 만들어진 인물인 메틸드조차 과거의 연인을 잊지 못하고 거트루드의 곁에서 서사의 마지막을 보낸다. 새로운 서사에서 미래를 선사받은 이는 주연의 자리로 돌아온 오필리아 뿐이다. 사랑했던 이들의 곁에서 과거를 놓지 못하고 최후를 맞이한 햄릿과는 다르게 오필리아는 미래를 바라보며 홀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데 그런 오필리아의 곁에 새로운 인물이 자리하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들을 연기한 배우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새로운 <스타워즈> 시리즈의 히로인 역할로 유명세를 탄 데이지 리들리는 톰 홀랜드와 함께 했던 <카오스 워킹>에서도 시종일관 신세계를 뛰어다니며 로맨스의 주인공 자리를 거부했다. 데이지 리들리가 연기한 오필리아는 명화 속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지만 물이라는 공간을 죽음이 아닌 재탄생의 공간으로 이용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물 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던 오필리아는 후반부에서는 마치 <스타워즈>의 레이가 그러했듯 자유로운 복장으로 갈아입고 대자연을 누빈다. 한편 햄릿을 연기한 조지 맥케이는 언제나 시대의 상황에 휩쓸리는 와중에도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왔다. <캡틴 판타스틱>에서는 부모님이 만들어 놓은 환경을 사랑하면서도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첫째 보를, <런던 프라이드>에서는 성 소수자를 배척하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이들로 모인 집단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조를, 출세작이기도 한 <1917>에서는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멈추기 위해 끝도 없이 달리는 병사 스코필드를 연기했다. 고뇌에 괴로워하는 기존의 햄릿 대신 자신이 급작스럽게 맞닥뜨린 상황에 적응해 보려고 하는 혼란한 햄릿에 조지 맥케이는 묘하게 어울린다. 신의가 있으면서도 언제나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는 레어티스는 순수혈통 가문에서 태어나 마지막까지 선악을 오가는 선택을 했던 슬리데린 기숙사의 대표 캐릭터 말포이를 연기한 톰 펠튼이 분했다. 햄릿과 사랑에 빠진 동생을 챙기면서도 아버지로 대표되는 가문에 더욱 충실한 레어티스는 어딘지 말포이 가문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다. 출연한 배우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미래를 경험한 데이지 리들리는 이런 이유에서도 오필리아 역에 적격인 셈이다(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한 <칠드런 오브 맨>에 출연했던 클라이브 오웬이 클로디어스를 연기했기 때문에 '거의'.).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필리아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자유를 돌려받는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존재감조차 희미했으나 수많은 (아마도 남성) 예술가들에게 비극적인 최후만으로 영감을 주었던 오필리아는 현대에 이르러 여성 감독을 만나 주체성을 지닌 존재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원작에 없었던 여성 동지들을 만나 생존을 도모한 오필리아는 자유를 얻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간다. 단 한명의 후계자도 남기지 못한 기존 서사의 인물들과는 다르게 오필리아의 곁에 새로운 이가 자리하는 것은 비극적인 운명을 스스로 이겨낸 오필리아가 쟁취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오필리아에게 주연의 시각을 주고 서사를 부여한 것 이외에도 햄릿을 재해석한 의의는 다방면에서 빛을 발한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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