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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Jul 12. 2021

자신과 마블의 역사를 반추하는 거울

<블랙 위도우>가 짊어진 과업과 성취

팬들이 그토록 염원해온 1대 블랙 위도우, 나타샤 로마노프(스칼렛 요한슨 분)의 처음이자 마지막 솔로 무비 <블랙 위도우>는 한정적인 시간과 예산에 비해 해결해야 할 과업이 많은 작품이다. 한 번도 제대로 묘사된 적이 없는 나타샤의 과거를 그리는 한편 시기는 인피니티 워 어딘가쯤이어야 하고, 대부분의 관객이 나타샤의 운명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서사를 이어가야 한다. 거기다 나타샤의 정해진 운명 때문에 블랙 위도우의 자리를 누군가에게 물려주어야 할 처지가 되는 바람에 2대 블랙 위도우로 점쳐지는 옐레나 벨로바(플로렌스 퓨 분)의 데뷔까지 떠안았다(심지어 코로나 시기에 개봉..). 다른 어벤져들, 특히 남자 어벤져들의 경우 헐크처럼 판권 문제가 복잡하게 얽힌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이 드라마든 영화든 자신만의 솔로 시리즈로 변명 서사를 만들어준 데 반해 나타샤는 활약상에 비해 마블에서 천대받아온 캐릭터에 속한다. 팬들의 오랜 염원에도 DC의 원더우먼 솔로 무비가 나올 때까지도 마블은 단 한편의 여성 히어로 솔로 무비를 내지 않았으며 첫번째 여성 어벤져 솔로 무비의 자리마저 캡틴 마블이 가져가고 말았다. 구글에서 블랙 위도우 영화의 예산을 검색해 보면 세번째 스파이더맨 솔로 무비보다 적은 예산이 책정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래저래 팬들에게는 씁쓸한 현실이지만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블랙 위도우>가 이룬 성취는 놀라운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풀어야 할 매듭이 한둘이 아닌 상황에서 <블랙 위도우>가 택한 방식은 나타샤의 과거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캐릭터들 이외에는 어벤져스조차도 서사에 포함시키지 않으면서 현재를 과거를 비추는 거울로 만들어 버리는 방식이다. 실제로 태스크마스터를 묘사하는 대사에서 상대방의 동작을 거울처럼 따라한다는 내용이 나오기도 하지만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거울 소품을 활용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이미 <닥터 스트레인지>에서 미러 디멘션을 묘사하면서 거울 이미지를 엄청나게 소모했기에 <블랙 위도우>에서 거울 소품을 함부로 차용했다가는 비교될 위험성이 있어서일 것이다. 대신에 영화 곳곳에 배치된 물이 거울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나타샤와 맞붙는 인물 대부분이 나타샤의 동작을 거울처럼 따라하며 나타샤의 과거와 현재를 비춘다. 거울 대신 물이 소품으로 활용됐다는 점은 나타샤의 과거를 비추는 이들이 때로는 이를 일그러지게 묘사한다는 뜻이기도 하며 돌만 던져도 퍼져 나가는 파동처럼 나타샤의 과거가 현재에 적나라하게 영향을 주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타샤가 마주한 자신의 과거는 자책이기도 하고 실수이기도 하지만 나타샤는 이를 회피하다가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으려 애쓴다. 특히 나타샤의 자책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인물인 태스크마스터가 등장하는 장면은 상공에 위치한 레드룸을 제외하면 거의 항상 물과 함께 등장한다. 그리고 나타샤가 자신의 실수를 사과하고 과거를 바로잡는 순간 물은 화면에서 사라진다.



나타샤의 동작을 거울처럼 따라하는 건 태스크마스터 이외에도 옐레나가 있다. 특히 옐레나와 나타샤가 처음 맞붙는 순간의 액션신은 가히 장관이라 할 정도다. 옐레나의 액션은 나타샤와 얼핏 매우 비슷해 보이지만 이 장면을 제외하면 복사 액션을 수행하지 않는데 태스크마스터와는 달리 옐레나와 나타샤가 서로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영화 중반까지도 서로에 대한 불신이 어느 정도 남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옐레나와 나타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자매애가 남아 있다. 나타샤의 시그니처 포즈를 비웃던 옐레나가 어느 순간 이 포즈를 오글거린다면서도 따라하는 데는 블랙 위도우의 자리를 물려받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나타샤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옐레나는 나타샤의 인생을 복사한 것 같으면서도 한 발짝 더 나아가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데 특히 영화 후반부 드레이코프(레이 윈스턴 분)를 죽이기 위해 하는 행동은 나타샤의 운명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블랙 위도우를 연기하기 전까지만 해도 통통한 몸매를 유지했던 스칼렛 요한슨은 영화를 찍으며 액션이 둔해보인다는 이유로 결국 다이어트를 감행했다고 하는데 상대적으로 통통한 편인 플로렌스 퓨는 다이어트를 하지 않고 액션신을 진행했다. 시대의 변화가 반영된 동시에 그만큼 스칼렛 요한슨을 포함한 여성 배우들이 다양한 신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온 것이 빛을 발한 것이다. 이렇듯 스칼렛 요한슨과 블랙 위도우가 남긴 유산은 영화 안팎으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


나타샤가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고 사과하며 보다 발전한 유산을 후대에 물려주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세뇌당한 위도우들과 1대 다로 대치하는 장면이다. 영화 초반 하얀색 수트를 입고 있던 나타샤는 서사상의 이유로 검은색 수트로 갈아입는다. 그리고 똑같이 검은색 수트를 입고 나타난 어린 위도우들은 나타샤의 과거를 상징하는 동시에 나타샤를 둘러싸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는 진풍경을 만들어낸다. 어린 위도우들은 나타샤의 과거이기도 하지만 나타샤가 구하러 가지 않았던 후대이자 나타샤의 회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들과 대치하다가 결국 위도우들에게 포위당한 나타샤를 구하러 온 것은 하얀색 수트를 입은 나타샤의 미래 옐레나다. 일반적으로 주인공이 1대 다로 대치하는 장면은 주인공을 눈에 띄게 하는 동시에 선악을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 의상의 색을 대비되도록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타샤가 위도우들과 동일한 색의 수트를 입었다는 것은 이들이 선악으로 갈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나타샤 또한 위도우이며 어린 위도우들도 나타샤의 구원으로 나타샤와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이 위도우들은 나타샤의 은혜를 잊지 않고 나타샤와 옐레나를 다시 구하기 위해 재등장하여 같은 운명을 겪어온 여성에 대한 연대를 표하기도 한다.



<블랙 위도우>는 나타샤의 과거와 미래를 비추는 거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를 연상시키는 대목이 많다. 레드 가디언 알렉세이(데이빗 하버 분)는 끊임없이 자신을 캡틴 아메리카와 비교하며 영웅담을 늘어놓는데 실상 수트도 컬러를 제외하면 꽤 모양새가 비슷하다. 거기다 태스크마스터가 사용하는 방패는 누가 봐도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다. 서사 상으로 보더라도 세뇌당한 과거의 동지가 나타난다는 점과 이들이 주연 히어로의 과거를 상기시키며 다음 서사로 이어지는 건널목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블랙 위도우>는 유독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의 거울상처럼 보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크리스 에반스 분)의 서사는 윈터 솔져 버키(세바스찬 스탠 분)의 구원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버키를 위해 스티브가 대의와 동료마저 저버린 데 반해 나타샤는 옐레나를 구원함으로써 수많은 위도우를 구하는 동시에 자신의 과거를 청산했다는 점이다. 결국 시빌 워의 단초가 되었던 버키는 스티브에게 있어 유일하게 남은 과거의 조각인 동시에 미래로 가는 장애물이기도 했다. 그간 캡틴 아메리카로서 보인 행보와는 다르게 스티브는 오랜 친구를 버리지 못했고 어벤져스에 균열을 일으켰다. 반면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집단이었던 레드룸의 위도우들은 서로를 구원하고자 했고 옐레나를 처음 구속에서 풀어준 것도 다른 위도우였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스티브와 나타샤가 선택한 각자의 운명은 솔로 무비에서 이미 점쳐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나타샤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기라도 하듯이 위도우들과 함께하는 대신 어벤져스 멤버들에게로 향한다. 나타샤가 어벤져스를 끌고와 레드룸을 부숴주길 원했던 옐레나는 나타샤와 화합함으로써 스스로 목표를 달성했고 나타샤는 자신에게 가족이 둘이나 있었다며 미소짓는다. 나타샤의 유산은 옐레나를 비롯한 수많은 위도우들에게로 이어질 것이며 이는 후계자를 찾는 데 실패하거나 한두명 정도의 후계자밖에 양산해내지 못했던 다른 어벤져들로부터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언젠가 부활할지도 모르지만 우선 자신의 유일한 솔로 무비로써 서사에 일단락을 지은 나타샤 로마노프는 옐레나와 마주하는 마지막 순간 다시 한번 거울처럼 동일한 자세를 취한다. 옐레나는 어쩔 수 없이 2대 블랙 위도우로 성장할 것이며, 나타샤와는 달리 옐레나의 뒤에는 수많은 위도우 군단이 위치할 것이다. 그리고 와칸다의 군대와는 달리 이들은 성별 이외에는 어떠한 유전적인 공통점도 없지만 자매애로서 연대할 것이다. 나타샤 로마노프는 은퇴했지만 여성 연대의 가능성이라는 무엇보다 위대한 유산을 남기고 자신의 과거를 비추는 거울을 모두 부순 채 정의롭게 미래를 향해 달려나간다.



*이미지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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