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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Jul 05. 2021

인간이 진정으로 죽는 순간

죽음은 타인의 기억으로써 삶의 연장선이 된다

<블라이스 스피릿>을 뻔하며 단순한 블랙 코미디로 읽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 영화가 죽음을 그리는 방식은 되짚어볼 만하다. 강령술이라는 소재를 사용해 죽음과 삶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들고 코미디로 포장한 <블라이스 스피릿>은 기실 죽음과 삶 사이에 큰 차이를 두지 않는다. 죽은 이들은 영매 마담 아카티(주디 덴치 분)를 통해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어 돌아와서는 죽기 전과 다름없이 지낸다. 마담 아카티에 따르면 강령술을 통해 누군가가 유령이 되어 돌아오는 경우는 산 사람이 그와 강력하게 감정적 교류를 할 때다. 시나리오를 한 글자도 쓰지 못하던 찰스(댄 스티븐스 분)는 사별한 엘비라(레슬리 만 분)를 떠올리며 글을 써보려고 하다가 강령술에서 소환하고 만다. 엘비라는 육체적으로는 죽은 상태였지만 찰스의 집착으로 살지도 죽지도 못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고 볼 수 있다. 죽은 이는 산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는 낭만적인 말은 <블라이스 스피릿>을 통해 누군가에 대한 기억이 결국 그 사람의 신뢰를 결정한다는 무서운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한국에서야 사자에 대한 미화가 강한 편이지만 범죄자가 사망하면 잘 죽었다고 하는 서양 문화에서 타인의 기억은 평판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보여준다.


영화 내내 찰스는 재혼한 아내 루스(아일라 피셔 분)와 엘비라를 오가며 빌붙는 인생을 시전한다. 찰스는 그 자신으로서는 생존할 수 없으며 아내들에 기생해서 살아온 존재다. 찰스가 엘비라를 유령으로 소환할 만큼 엘비라에게 집착했던 이유는 사랑이 아닌 생존 본능에 가깝다. 엘비라가 찰스에게 물리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는 시점은 찰스가 작가로서의 생존을 엘비라를 통해 구현한 때다. 찰스의 기생력은 루스에게서 일시적으로 엘비라에게 옮겨갔다가 다시 루스에게 돌아온다. 이 때 찰스의 죽어버린 남성성이자 생명력은 브래드번 박사가 건네주는 암페타민을 통해 드러난다. 브래드번 박사는 정력을 준다며 암페타민을 찰스에게 권하는데 찰스가 엘비라를 본다는 말을 하자 암페타민을 끊으라고 지시한다. 이 때까지도 한 글자도 쓰지 못하던 찰스는 엘비라가 나타나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하면서 엘비라에게 물리적인 영향력을 건네준다. 그리고 루스에 대한 의존성을 엘비라에게 옮겨가면서 루스 대신 엘비라와 잠자리를 암페타민 없이 해낸다. 살아있을 때도 찰스와 침대에 들어가면 하루종일 나오지 않았다던 엘비라는 그 자신의 생명력을 찰스에게 그대로 전달했던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죽어서도 찰스에게 생명력을 돌려주던 엘비라는 어느 순간 그 생명력을 말 그대로 찰스에게서 빼앗아 버린다.



브래드번 박사에게서 암페타민을 빼앗아 루스의 술에 넣은 엘비라는 자신의 영향력을 찰스에게서 루스에게로 옮겨간다. 루스가 자는 바로 옆에서 찰스와 관계하는 엘비라는 죽은 후에도 자신의 생명력을 루스에게 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후 엘비라를 통해 끝내 시나리오를 완성한 찰스는 의존의 대상을 엘비라에서 루스로 다시 옮겨오고 엘비라는 물리적인 영향력을 잃는다. 찰스에게 의존할 대상이 언제나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엘비라는 루스를 의존 불가능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이제 의존할 대상이 사라진 찰스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엘비라가 루스의 영향력을 제거한 시점에서 찰스는 숙주 없는 기생충으로 전락한다. 찰스가 간과한 것은 숙주 역할을 해주던 이들이 이제 기생충을 박멸하려 들었다는 것이다. 찰스는 생존을 위해서는 새로운 숙주를 찾는 동시에 기존의 숙주들을 몰살했어야 했다. 숙주 제거에 실패한 찰스는 그 여파를 예측하지 못하고 홀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한이 맺힌 숙주들은 기생충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루스와 엘비라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죽음과 삶의 경계를 지속적으로 넘나드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명예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엘비라는 루스의 조문객 수를 두고 비웃지만 장례식에서 양만큼 중요한 것이 질이다. 비록 엘비라가 몇차례 훼방을 놓긴 하지만 루스는 극 내내 명예를 잃지 않는다. 애초에 루스가 찰스의 숙주가 된 이유는 찰스는 가질 수 없는 명예를 루스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찰스가 엘비라에게 의존하다가 화를 내는 이유는 새로운 숙주를 잃었기 때문인데 이는 찰스가 껍데기나마 빌려 가지고 있던 명예를 잃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루스라는 숙주를 잃은 찰스는 루스의 친인척으로 숙주를 옮겨가려 시도하지만 역시나 엘비라의 방해로 실패한다. 흥미롭게도 찰스의 기생 대상은 언제나 여성이며 숙주를 남성으로 옮기는 순간 기생에 실패한다. 찰스가 여성에게 기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성에게 매력적인 어필이 가능했기 때문인데(꽃뱀) 대상이 남성으로 변경되는 순간 자신의 매력을 잃는다. 즉 찰스는 자신의 생존 수단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기에 기생하는 삶에 막을 내린 것이다.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 주요 인물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서 사회적인 죽음의 의미에 다다른다. 기생으로써 얻어냈던 명예를 잃어버린 찰스는 진정한 죽음을 맞이한다. 반면 루스와 엘비라의 명예는 더럽혀지지 않았기에 세상에 대한 물리적인 영향력을 잃지 않은 채 사회적인 죽음에서 벗어난다. 공교롭게도 한국어의 사회적인 죽음을 이르는 표현은 '매장당한다'다. 자신의 명예를 잃은 이들은 살아 있어도 죽은 상태로 변모하는 것이다. 찰스는 '매장당하는' 신세가 되고 숙주를 옮겨갈 수도 없는 상황을 맞이한다. 루스나 엘비라와는 달리 세상에 물리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신세가 된 찰스는 보이지 않는 기생충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찰스와 감정적으로 교류하길 원하는 이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찰스는 사회적인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제는 찰스가 명예를 잃었기에 누구도 찰스와 교류하길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루스와 엘비라는 찰스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함께 자동차를 타고 떠난다.


사회적인 교류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 인간이지만 누군가에게 기생해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블라이스 스피릿>은 블랙 코미디로 설파하고 있다. 엘비라는 여성이기에 인정받지 못하는 삶에 익숙해져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거꾸로 성별만 아니었다면 엘비라가 충분히 홀로 살 수 있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루스 또한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찰스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었을 인물이다. 기실 극 초반에서 찰스는 루스에게 어필하던 매력조차 잃어버린 존재로 묘사되는데 이미 루스는 홀로 살고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다. 엘비라와 루스는 찰스 없이 살 준비가 된 이들이었고 찰스는 기생할 대상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타인에게 기대어 살던 찰스는 사회적인 매장을 겪고, 홀로 생존이 가능했던 엘비라와 루스는 타인의 아름다운 기억을 통해 삶을 연장하는 마지막 장면은 관객에게 짙은 여운을 남긴다. 홀로 생존할 수 있어야 타인의 기억에서도 죽지 않을 수 있는 역설적인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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