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 Jul 26. 2021

보통은 현실적이지만 때로는 감정적인 당신

당신처럼 나도 그렇습니다

최근 유행인 MBTI 성격검사는 사람을 16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MBTI 검사의 신뢰도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이 많지만 한때 유행했던 혈액형별 성격 유형이나 별자리 성격 유형보다는 훨씬 신빙성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일단 성격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물리적인 성질이 아닌 그야말로 성격 특성을 가지고 분류한 체계이기 때문이다. MBTI 검사가 신빙성이 없다기보다는 사람을 16가지 성격 유형으로 분류할 수는 있지만 인류가 워낙 다양한 까닭에 각각의 유형 안에서도 다양한 인간군상이 나타난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기본적으로 MBTI는 인간의 성격 특질을 네 가지로 분류하고 각 특질의 양 극단 중 개개인이 어느 쪽에 더 치우쳐 있는가를 나타내는 지표다. 예를 들어 MBTI의 마지막에 위치하는, 주로 계획성과 임기응변성으로 대변되는 J와 P 중 한 쪽에 극단으로 치우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당히 계획을 세우며 살아가는 동시에 매일 부딪히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응한다. 영화나 소설 속 캐릭터들을 MBTI에 대응시켜 자신이 어떤 캐릭터에 해당하는지 보기도 하는데 가상 인물들은 MBTI의 특질을 좀더 양 극으로 끌고 가는 경향이 있다. 현실에는 타노스와 같은 빌런이 존재하지도 않고 간달프와 같은 현자 역시 극히 드물다(참고로 두 캐릭터의 MBTI는 모두 이 글을 쓰는 나와 같은 INTJ로 분류된다).


헌데 가상의 이야기가 아닌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조차 실존 인물을 다룰 때 인물의 명과 암 중 한 쪽에만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현실의 인간은 복잡다단하며 생각보다 행동에 개연성이 없지만 (영화의 경우) 대략 두 시간 안에 이야기를 마치려면 이 모든 걸 구구절절 설명할 수가 없는 데다 관객을 지루하게 만들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실존 인물을 다룬 이야기들은 이런 연유로 비판받기도 한다. P.T. 바넘의 삶을 다룬 <위대한 쇼맨>은 바넘의 악행을 일언반구도 하지 않아 빈축을 샀고 커스틴 던스트 주연의 영화 <마리 앙뚜아네트>를 비롯해 많은 매체에서 그려지는 마리 앙뚜아네트는 실제로는 매우 검소했으며 그 유명한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라는 막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실존 인물이나 실제 사건을 다루는 일은 그래서 위험하지만 영화보다 영화같은 현실이라는 소재로 인해 많은 창작자들을 고민에 빠뜨린다. 특히 많은 사람들의 트라우마가 된 사건 혹은 사고는 양날의 검과도 같다.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을 다루면서 개연성을 확보할 수 있지만 자칫 잘못하다가는 관객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 사건을 다룰 때는 한국영화 <귀향>이나 <생일>처럼 감정적인 접근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이게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이는 사건에 대한 (대체로 부정적인) 감정을 자극함으로써 사건이 망각되는 것을 방지해주는 효과가 있지만 동시에 한 발짝 물러서서 봐야 하는, 사건의 원인에 대한 파악이나 현실적인 대처를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워스>의 포스터를 갖다놓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두 단락씩이나 <워스>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이야기들을 하게 되었는데 <워스>는 사건 자체보다는 사건의 후폭풍과 휘말린 인물을 다루면서 이런 부분들을 영리하게 피해간 이야기다. 911테러는 미국인들에게 잊지 못할 트라우마를 남겼고 그 상처는 현재진행형이다. 테러 이후 피해자들을 위한 보상기금이 마련되었지만 많은 피해자들은 기금을 받고 마무리하는 대신 누군가에게 자신의 가족, 친구, 연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고 싶어한다. 이 기금을 피해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고자 나선 이는 로펌의 대표 켄 파인워스(마이클 키튼 분)다. 피해자들에게 기금을 분배하는 공식이 적힌 종이를 나눠주고 보상금을 받는 대신 고소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받아야 하는 켄은 피해자들에게 빌런처럼 비춰진다. MBTI에서 세번째 성격특질에 해당하는, 감정과 사고를 나누는 T와 F에서 켄은 T에 해당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피해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인간의 목숨값이 수치로 환산될 수 없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기금이 피해자에 따라 다르게 분배되는 현실을 받아들인 켄은 모든 예외적인 케이스를 일일이 반영해줄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켄의 대척점에 선 이는 보상금 분배 체계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웹사이트를 개설한 찰스 울프(스탠리 투치 분)다. 찰스는 보상금 분배가 피해자를 입막음하려는 수단으로만 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종이 위의 글자 혹은 숫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적대할 수도 있는 두 인물은 제한된 시간이라는 현실에서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도와가며 상황을 타결해 나간다.


25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7천명이 넘는 피해자 유족들의 서명을 받아야 하는 켄은 고소를 피하려는 기업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본가처럼 보이지만 실은 무급으로 일을 맡은 상황이다. 부시 대통령의 집권 시기였던 당시 민주당을 위해 일한 전력이 있던 켄은 이를 역이용해 업무를 맡는다. 목표인 80%를 채우는 데 혹여 실패하더라도 이는 야당의 실패로 기록될 것이고, 성공하게 되면 여당이 911테러라는 전대미문의 재난을 수습하는 데 있어 편견없이 인재를 등용했다는 이미지를 줄 수 있다. 영화의 초반에 짧게 언급되는 이 에피소드는 켄이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수많은 인명이 목숨을 잃은 테러 상황에서 정치가 끼어드는 것이 가당키나 하냐고 하겠지만 인간의 모든 행동이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 사회라면 차라리 의미있는 일을 하는 데 있어 정치를 활용하는 것이 낫다. 켄 파인워스라는 인물은 이렇게 감정과 사고를 오가는 행동을 보여주며 인간의 복잡다단함을 표현한다. 반면 찰스 울프는 슬픔에 잠식당한 피해자 유족들을 대표하지만 보상 기금을 분배하는 첫 모임에서 켄이 방해 없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이들을 진정시키기도 한다. 소송을 할 게 아니라면 보상금이라도 받아야 할텐데, 그러자면 어쨌든 켄의 제안을 들어봐야 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피해자들은 켄이 하는 모든 말이 악덕 기업을 대변하는 변명처럼 듣지만 찰스는 그렇지 않다는 걸 인지한다. 켄은 MBTI에서 T를, 찰스는 F를 상징하는 인물이지만 반대 성향 또한 어느 정도 받아들인 인물들이다.



서명률이 현저히 낮던 초반 켄은 피해자들이 종이 위의 숫자로만 언급될 수 없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현실적인 상황을 가장 먼저 고려한다. 주방 보조였던 사망자와 회계사였던 사망자의 목숨값을 환산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유족들이 받는 보상금의 공식은 둘의 목숨값이 다르다고 말한다. 사망자와 연은 끊었지만 법적으로 가족인 사망자의 부모는 보상금을 받을 수 있지만 사망자의 마지막 전화를 받은 동성 연인은 보상금을 받을 수 없다. 건물에 있다가 사망한 이들의 유족은 보상금을 받을 수 있지만 테러로 인해 현장에 투입되었다가 몇 달이 지나 흡입한 석면으로 인해 건강상의 문제를 겪는 소방관은 보상금을 받지 못한다. 켄이 고려해야 하는 예외 케이스는 끝이 없으며 시간 제한이 걸려있다. 켄이 돌파구를 찾는 시점은 종이 위의 숫자로 존재하던 이들을 실제로 대면하면서부터다. 직원들에게 유족 상담을 맡기던 켄은 어느 날 늦은 시간 찾아온 소방관 닉 도나토의 유족들을 맞이한다. 닉의 형 프랭크를 비롯한 닉의 아내 캐런은 서명을 거부하면서도 닉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보상금을 분배하는 공식에 인성은 포함되는 변수가 아니지만 닉은 켄의 업무에 전환점을 마련한다. 서명이 늦어지더라도 예외케이스를 최대한 고려하도록 방향을 튼 켄은 머리로만 이해하던 유족들의 슬픔을 가슴으로 받아들인다.


한편 망자인 닉을 미화하며 서명을 미루던 캐런이 마음을 바꾸는 계기는 놀랍게도 현실에 대한 인정이다. 좋은 아빠이자 남편이었다던 닉에게는 내연녀(..)와 심지어 내연녀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개색기)까지 있었으며 이는 캐런과 프랭크 모두 알고 있었지만 삶을 살아가기 위해 모른척하던 현실이었다. 오히려 잔인한 현실을 유족들에게 최대한 알리지 않고 서명을 받으려는, 보다 감정적인 결정을 했던 이는 켄이다. 하지만 닉의 내연녀 측으로부터 보상금으로 인한 연락을 받고 미룰 수 없는 시점이 되자 켄은 결국 캐런에게 직접 알려주는 방법을 택한다. 현실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 된 캐런은 결국 닉이 자신이 원했던 남편이 아니었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관객으로서는 놀랄 만한 결정을 내린다. 켄이 온전한 T형 인간이 아닌 것처럼, 찰스가 온전한 F형 인간이 아닌 것처럼 감정적으로만 보이던 캐런 또한 현실을 지각하는 면이 있다. 다만 전대미문의 재난이라는 상황 앞에서 잠시 현실 직시를 미루었을 뿐이고 상황을 고려할 때 이런 묘사는 일견 타당하다. 현실을 똑바로 마주한 캐런은 슬픔에 잠기는 대신 용감하게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결심을 한다. <워스>는 한두 명의 중심 인물만을 입체적으로 그리는 쉬운 길 대신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그리는, 어렵지만 현실감을 살리는 방식을 택해 공감의 깊이를 한층 넓혀나간다.



세상에는 이해하지 못할 일들로 가득하며 예측하지 못한 자연재해와 불특정 다수를 향한 개인들의 분노가 초래한 테러도 마찬가지다. 국가적인 재난 상황이 지나간 이후에도 삶은 이어지며 누군가는 보다 현실에 집중함으로써, 누군가는 망자에 대한 미화로써 상황에 적응해 나간다. 적응 방식이 서로 다르다고 해서 누군가는 맞고 누군가는 틀린 것이 아니며 서로 다른 집단들이 화합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개개인은 서로 다르지만 또 비슷하기도 하다. 그렇기에 16가지 유형으로 나뉘면서도 그 안에서 다양성을 내포하는 것이다. 911테러를 그린 이야기는 많았지만 사후 대처에 관한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다룬 이야기는 드물었다. <워스>는 미국이 마주했던 역사적인 재난 상황에 대처하는 수많은 인간 군상을 복잡다단하면서도 따스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오필리아가 돌려받은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