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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Jan 03. 2022

선악을 가르는 선택

피터 파커는 왜 과학자인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하 <노 웨이 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리뷰를 쓰면서 스포일러가 될 이야기를 활용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가 될 만큼 어떤 이야기들은 글에 아주 중요합니다.


미국에서 마블 코믹스의 인기 캐릭터 순위를 매기면 높은 확률로 1위를 차지하는 캐릭터가 스파이더맨이다. 스파이더맨을 상징하는 키워드이자 별칭인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은 억만장자인 아이언맨이나 비현실적인 캐릭터인 캡틴 아메리카보다 스파이더맨이 일반 관객층에 더 소구됨을 반증한다. 피터 파커는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지만 가난하고, 신분이 공개되지 않지만 친절한 이웃을 표방한다. 선한 피터 파커의 본성은 조실부모하고 자신을 키워준 벤 삼촌과 메이 숙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20여년이 지난 지금 개발자가 각광받는 직업으로 자리잡고, 세계 부호의 순위에 석유 재벌 대신 이공계 출신들이 자리하면서 과학자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히 개선되었다. 하지만 초대 스파이더맨인 토비 맥과이어의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개봉할 때만 해도 공대생은 너드 이상의 이미지를 갖지 못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도 헐리웃의 셀러브리티나 석유 재벌만큼의 인지도와 영향력이 없어 열등감이 생겼다는 설정인지는 몰라도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빌런들은 대부분 과학자나 기술자 출신이다. 어벤져스의 숙적들이 외계인이나 테러리스트, 마법사 등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스파이더맨의 빌런들은 현실적인 편이라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피터 파커 그 자신도 뛰어난 과학자라는 것이다.


기술자 출신이지만 플레이보이 이미지와 외향적인 성격으로 너드 이미지를 타파하고 셀러브리티 이미지를 구축한 아이언맨 이후로 MCU에는 수많은 기술자들이 입성했다. 아이언맨의 숙적들 또한 과학자나 기술자 출신이 많았지만 대부분이 토니 스타크보다 실력이 떨어지거나 신념에 의한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이 입성하면서 순수 기술자 출신의 빌런이 대거 유입되기 시작했다. 첫 빌런이었던 벌처(마이클 키튼 분)부터 기술자였고, 다음으로 등장한 빌런 미스테리오(제이크 질렌할 분) 또한 기술을 가지고 스파이더맨과 대결했다. 그리고 <노 웨이 홈>에서 멀티버스의 차원이 열리면서 이전 시리즈에 산재해 있던 수많은 기술자/과학자 빌런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흥미롭게도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 차원에 있던 빌런들은 기술을 얻기 전에 악의를 지닌 이들이었던 데 반해 다른 차원에서 온 빌런들은 기술로 인해 빌런이 된 케이스가 많다. 닥터 옥타비우스(알프레드 몰리나 분)는 촉수로부터 영향을 받는 칩을 개선하자마자 선인으로 돌아온다. 노먼 오스본(윌렘 데포 분)은 애초에 오스코프를 살리기 위한 기술을 자신의 신체에 시험했다가 이중인격을 얻고 빌런이 됐다. 앤드류 가필드의 스파이더맨에 따르면 일렉트로 맥스(제이미 폭스 분)는 전기뱀장어 수조에 떨어지기 전만 해도 아주 다정한 사람이었다.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 세계관으로 리부트되기 전까지, 과학은 쿨하고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닌 잘못된 이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세상을 파멸시킬 무기가 되는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던 셈이다.



그리고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이 신상 노출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아간 곳은 놀랍게도 과학이 아닌 마법의 영역인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의 생텀이다. 공대를 지망하는 과학자 피터 파커는 자신과 친구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성적인 해결책보다는 감정적인 해결책에 매달리는 반면 비현실적인 세계를 다루는 마법사 닥터 스트레인지는 냉혹할 정도로 이성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차원의 문이 열리고 이세계의 빌런들이 쏟아지자 닥터 스트레인지는 그들이 죽거나 말거나 돌려보내야 한다고 말하지만 피터는 선한 메이 숙모(마리사 토메이 분)의 명을 받들어 이들에게 두번째 기회를 주고 싶어한다. 자신이 지배하는 공간이라는 거울 차원에서조차 기하학에 재능을 지닌 피터에게 발목이 묶여 갇혀버린 닥터 스트레인지의 모습은 옳은 일을 하려는 선인에게는 그 어떤 이성도 통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 댓가로 피터는 이세계의 피터 파커들이 그랬듯 소중한 가족을 잃게 되고,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기도 한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말대로 문제는 미스테리오가 아니라 두 개의 삶을 살려는 피터일지도 모르지만 (돈이 없어) 히어로를 전업으로 할 수 없는 피터는 두 개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다른 히어로들과는 달리 피터는 언제나 개인의 삶과 히어로의 삶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철학적인 딜레마를 과학도의 심장으로 풀어야 하는 히어로인 셈이다.


닥터 스트레인지 또한 마법사가 되기 이전에는 외과 의사였다는 점도 하나의 포인트다. 제 잘난 맛에 살았던 의사이긴 하지만 닥터 스트레인지의 사명은 언제나 사람을 살리는 것이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자신의 세계에 존재하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차원에서 온 이들이(특히 그들이 빌런이라면 더더욱) 죽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다. 마법으로도 고칠 수 없는 손가락을 부여잡은 채 의사를 포기하고 온전히 마법사가 되어버린 닥터 스트레인지는 두 개의 삶을 굳이 살려 하지 않는다. 의사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눈에 두 개의 삶을 살려는 피터 파커는 얄미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노 웨이 홈>은 성인의 문턱에 서 있는 톰 홀랜드의 피터 파커가 성장의 관문에서 닥터 스트레인지와 신념의 대립을 통해 진정 옳은 결정에 대해 깨닫는 이야기다. 다른 차원의 빌런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전까지 아이언맨의 후계자로 여겨졌던 톰 홀랜드의 피터 파커에게 과학은 쿨한 것이고 기술은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과학이 잘못된 이들의 손에서 변질되는 것을 본 피터 파커의 굳은 신념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노 웨이 홈>에서 과학이라는 소재는 단순히 빌런의 기술 혹은 세상을 구하는 어떤 재료만이 아닌, 피터 파커의 세상에 대한 신념을 비추는 것이기도 하다.



<노 웨이 홈>의 메이 숙모가 사망하는 장면은 그래서 이야기의 큰 전환점이 된다. 닥터 스트레인지로부터 마법을 빼앗고 자신의 신념대로 빌런을 선하게 돌릴 수 있다고 믿었던 피터는 자신이 믿었던 과학 기술조차 그린 고블린을 돌리지 못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와 동시에 죽음을 맞이하는 메이 숙모는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명대사를 읊조린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이 대사가 벤 삼촌이 아닌 메이 숙모의 입을 통해 피터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은 <노 웨이 홈>이 이전 스파이더맨 시리즈와는 다른 길을 걷기로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토비 맥과이어의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언제나 인질이거나 연애의 대상으로서 피터 파커의 약점으로서만 기능했다. 앤드류 가필드의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 그웬 스테이시(엠마 스톤 분)는 똑똑한 과학도로 한층 진화하기는 했지만 피터 파커의 성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비극을 더해주는 역할로 기능할 뿐이었다. 하지만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 시리즈에 이르러 벤 삼촌은 사라지고 메이 숙모만 남아 피터의 고운 심성을 키워준 양육자로 거듭난다. 유사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던 유산은 여성을 그 길목에서 지워버렸다. 하지만 메이 숙모는 스파이더맨의 명대사를 뱉으면서 여성이 남성의 롤모델이 될 수 있음을 천명한다. 메이 숙모는 피터의 성장에 놓인 비극의 매개체로서만 기능하는 것을 넘어 피터에게 스파이더맨의 정신을 물려주는 유산의 주인으로 자리한다. 그리고 메이 숙모는 놀랍게도 과학자가 아닌 사회복지사다.


메이 숙모를 잃은 톰 홀랜드의 피터 파커가 다른 차원의 피터 파커를 만나는 방법은 또 흥미롭게도 마법이다. 역시 공학도인 친구 네드(제이콥 배덜런 분)는 우연히 마법을 사용해 다른 차원의 피터 파커들을 불러온다. 톰 홀랜드의 피터 파커가 온전한 과학도라면 네드는 마법과 과학의 사이를 잇는 가교가 된다. 톰 홀랜드의 피터 파커가 복수의 길로 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결국에는 마법이라는 사실은 피터 파커와 닥터 스트레인지가 신념을 놓고 대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증거로 세 명의 피터 파커가 과학을 이용해 빌런들을 선하게 돌려놓는 것을 목격한 닥터 스트레인지는 스파이더맨이 지닌 선한 마음씨의 힘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스파이더맨이 내린 결정에 닥터 스트레인지는 피터 파커가 철없이 이상에 매달리는 아이가 아닌, 자신과는 다른 신념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는 히어로라는 것을 인정한다. 자신을 박사라고 부르라던 닥터 스트레인지는 그렇게 스파이더맨을 하나의 독립된 히어로로 인정하고 대등하게 이름으로 부를 것을 요청한다. 의사와 박사를 모두 의미하는 닥터가 피터 파커의 호명 명칭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자신은 의사로서의 삶을 온전히 놓아주는 동시에 두 개의 삶을 살고자 하는 피터 파커를 이해하게 되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그렇게 비극적인 서민 영웅 피터 파커는 메이 숙모의 정신을 이어받아 과학으로 세상을 구한다.


 


지난 시리즈를 모두 품고 팬서비스를 훌륭하게 해낸 <노 웨이 홈>은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을 초기화함으로써 새로운 삼부작을 쓸 토대를 마련했다. 아이언맨의 유산을 포기하고 어벤져스의 일원이 되었던 일을 과거로 돌려 새로운 삶을 맞이하는 톰 홀랜드의 피터 파커는 순수 과학자로 돌아온다. 선배 스파이더맨들은 톰 홀랜드의 피터 파커에게 닥친 비극을 목격하고 흑화하는 것을 막아줌으로써 세상을 구하는 과학자로서의 사명을 일깨워준다. 이와 동시에 톰 홀랜드의 피터 파커가 존재하는 차원에서 과학이 수많은 생명을 구했고, 그 기술이 자신들의 차원에 있는 빌런들을 돌려놓음으로써 선배 스파이더맨들에게도 두 번째 기회를 주었다는 것은 과학의 양면성을 다시금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며, 피터 파커가 과학자인 이유는 과학이 선한 이의 손에 들어갔을 때 세상을 선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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