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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Dec 27. 2021

당신을 구원하러 왔어요

연극 밖의 연극을 구현하는 미사키는 누구인가

*영화의 주요 내용들이 포함됩니다. 가후쿠의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스포일러를 하지 않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수많은 우연으로 가득하지만 관객이 이를 눈치채기는 쉽지 않으며 이 우연들은 적재적소에서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 분)를 구원으로 이끈다. 서사 초반, 아직 아내인 오토(키리시마 레이카 분)가 살아있을 때 가후쿠는 연극 <바냐 아저씨>에서 바냐 아저씨를 힘겹게 연기한다.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지만 가후쿠는 이를 빌미로 아내와 헤어지거나 다툴 생각이 없다. 가후쿠와 오토의 가정은 굳건해 보이는 와중에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다. 이 기이한 이중성은 가후쿠의 교통사고에서 비유적으로 드러난다. 가후쿠는 녹내장으로 한쪽 눈의 시야가 점점 좁아지고 있지만 운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가후쿠와 오토의 가정에는 빈 틈이 있지만 무너질 정도는 아니며 가후쿠의 좁아지는 시야는 이 빈 틈을 못본 척하는 가후쿠의 의도적인 시야로 비유된다. 조금만 늦게 발견했더라면 가후쿠는 실명했을지도 모르지만 때마침 발생한 교통사고로 가후쿠는 녹내장을 발견한 것이다. 이 첫번째 우연은 가후쿠의 삶을 지탱해 주는 지속적인 운전으로 이어진다. 가후쿠의 삶에서 운전 중 아내의 목소리로 녹음된 <바냐 아저씨>의 대본을 들으며 바냐 역의 대사를 숙지하는 것은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는 아내가 외도를 하거나 심지어 죽더라도 이어진다. 하지만 언젠가 가후쿠는 운전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이런 삶의 루틴을 잃는 것은 가후쿠를 절망시킬 것이다.


아내의 외도와 사망 이후에도 가후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삶을 이어간다. 아내의 장례식에서 외도 상대를 보고도 조문객 중 하나로서 태연하게 맞이하는 가후쿠는 흐트러지는 법이 없다. 멀끔하게 차려입고 다시금 연극 <바냐 아저씨>를 연출하지만 이 때의 가후쿠는 바냐 역을 연기할 수 없을 만큼 무너진 상태다. 가후쿠는 바냐 역을 거절하고 아내의 외도 상대였던 다카츠키 코시(오카다 마사키 분)에게 바냐 역을 맡겨버린다.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긴 하지만 아내의 외도 상대가 오디션을 보러 오는 이 사건은 다카츠키의 입을 빌려 또 한번의 우연임을 알려준다. 다카츠키는 종종 가후쿠를 검색해 보는데 불미스러운 사건 이후 소속사 없이 활동하다가 마침 가후쿠의 이름을 검색하고 가후쿠가 히로시마에서 <바냐 아저씨>의 연출을 맡아 오디션을 진행하고 있으며, 그 날이 서류 제출 마감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죽은 아내와 아내의 외도를 연상시킬 수밖에 없는 인물임에도 가후쿠는 거리낌없이 다카츠키를 캐스팅하고 심지어 자신이 연기하던 바냐 역을 맡겨버린다. 가후쿠의 의중이 확실히 드러나지 않는 이 장면까지 관객은 가후쿠가 다카츠키에게 물을 먹이려는 것인지 공과 사를 구분해 다카츠키를 캐스팅한 것인지 아리송하다. 그리고 가후쿠가 다카츠키와 재회하기 전 가장 중요한 우연이 발생한다. 한쪽 시력을 잃어 가는 가후쿠에게 반강제로 운전수 미사키(미우라 토코 분)가 맡겨진 것이다.



미사키는 여러모로 가후쿠에게 희한한 존재다. 가후쿠와 오토 사이에서 태어나 죽은 딸과 동갑이며 가후쿠의 오래된 차를 능숙하게 운전하는 뛰어난 운전수이지만 가후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운전 중에는 가후쿠에게 말을 거는 법이 없다. 서사 초반 미사키는 인물이 아니라 배경처럼 작동한다. 미사키의 서사는 가후쿠가 미사키에게 마음을 열 때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미사키는 결코 가후쿠를 앞서나가는 법이 없다. 항상 가후쿠를 맴돌지만 가후쿠가 허락할 때까지 연극 연습을 보러 오지도 않고 가후쿠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의상조차 거의 갈아입지 않는 미사키는 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결국 가후쿠와 함께 저녁을 먹긴 하지만) 하루 정도는 자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미사키라는 우연은 가후쿠에게 벌어지는 다른 우연과는 결이 다르다. 가후쿠가 마주치는 대부분의 우연은 살아있는 인물임이 분명한 사람들과의 마찰에서 발생하지만 미사키는 인물이라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다. 미사키의 고향으로 향하는 페리에서 잠들 때조차 미사키는 환한 불 아래에서 잘만 잠드는데 코고는 소리나 숨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다. 그렇다면 가후쿠에게 미사키라는 존재는 배경인가, 우연인가, 혹은 인간을 가장하고 가후쿠에게 내려온 어떤 신적인 존재인가.


많은 서사에서 구원자는 대개 감정을 표현하는 인물로 드러난다. 구원의 대상이 되는 인물은 구원자 앞에서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쏟아내고 구원자는 이를 따듯하게 감싸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쇠락해가는 일본 영화계에서 구닥다리 교훈을 주는 감정적인 클리셰는 영화를 망작으로 만드는 주요 요소다. 반면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대부분의 인물이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다. 유일하게 충동성을 지닌 인물인 다카츠키는 서사 안팎으로 감정적인 행동을 하는 것으로 암시되지만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없다. 심지어 연극의 제작자들은 마치 로봇처럼 연극을 중단할 만한 사건이 벌어지고도 바로 가후쿠에게 연극을 중지할지 여부를 결정하도록 독촉한다. 가후쿠는 단 한번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거나 쏟아낼 기회를 부여받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후쿠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외려 가후쿠의 마음을 열고 마침내 가후쿠가 미뤄온 어떤 업적을 수행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사연을 무덤덤하게 이야기하는 미사키다. 미사키의 사연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을 정도이지만 정작 그 자신은 자신의 사연에 대해서는 무서울 만큼 초연하다. 미사키의 고향으로 가후쿠와 함께 향하는 장면에서, 미사키와 가후쿠는 자신들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저지른 일에 대해 고해성사하듯 이야기하는데 두 인물이 표현하는 감정의 농도는 짙지만 과장되지 않다는 점에서 거울상처럼 보인다.



미사키는 가후쿠의 연극에 대해 끼어들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더욱 미지의 인물이다. 많은 서사에서 구원자들은 주인공의 서사에 영향을 끼치려고 하는 의도가 다분하다. 하지만 미사키는 가후쿠가 직접 내려야 할 그 어떤 결정에도 관여하지 않으며 마지막 연극에서도 관객의 위치에 머무른다. 다카츠키는 오토가 만들던 미완성의 서사를 가후쿠에게 완성해 보임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지만 이내 극에서 사라진다. 미사키는 이 과정을 모두 보고 듣지만 그에 대해 가후쿠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는 법이 없다. 미사키가 운전해 데려다준 호텔 바에서 가후쿠와 다카츠키가 담소를 나누고 돌아가는 길에서 다카츠키는 가후쿠의 서사에서 사라지는 원인을 끝내 스스로 만들고야 만다. 미사키는 여기서도 배경처럼 작동하지만 모든 서사가 진행된 이후 이 장면을 다시금 곱씹어 보면 다카츠키는 어떤 힘에 이끌려 사건을 저지르고 가후쿠의 서사에서 자연스럽게 퇴장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가후쿠의 치유 서사에서 미사키는 언제나 사건의 주변부에 머무르지만 이는 동시에 사건의 일부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미사키의 서사는 아주 조금씩 드러나고, 영화 후반부에서야 미사키가 절대자가 아닌 작중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미사키의 고향이 나타나지만 화면에 보이는 것은 미사키의 존재를 증명해줄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 무너진 집뿐이다.


가후쿠의 주변을 맴도는 미사키는 직간접적으로 가후쿠에게 영향을 주지만 증명할 방법이 없다. 이런 면에서 미사키는 가후쿠가 연출하는 연극 <바냐 아저씨> 밖의 연극인 가후쿠의 삶을 연출하는 연출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사키는 가후쿠에게 직접적으로 디렉션을 주지 않지만 가후쿠가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길 유도하며, 종국에는 가후쿠를 무대로 돌려보낸다. 미사키가 가후쿠에게 직접적으로 의견을 피력하는 장면은 단 한 장면뿐이다. 무너진 자신의 집 앞에서 가후쿠에게 죽은 아내를 외도마저 끌어안고 인정해줄 수는 없겠냐고 묻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가후쿠에게 강압적으로 지시를 내리는 것이 아닌 사고의 유도를 이끌어내는 질문에 가깝다. 가후쿠가 아내에 대한 생각을 바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후 이어지는 장면에서 가후쿠는 결국 무대에서 다카츠키를 대신해 바냐를 연기하고 있다. 그리고 연습을 보는 것조차 꺼리던 미사키는 마치 연출자처럼 객석에 앉아 가후쿠를 응시한다. 미사키는 자신이 연출한 가후쿠의 치유라는 극에서 가후쿠를 무대로까지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고 치유극에 막을 내린다. 가후쿠는 자신이 연극의 일부인 줄도 모른 채 연극을 마무리하지만 그것이 결코 비극이 아니기에 미사키에게 삶의 일부를 내어준다.



미사키가 다른 인물과는 확연히 다른 존재였음을 알려주는 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사실 가후쿠의 이야기는 연극 <바냐 아저씨>가 끝난 시점에서 마무리되며 이후 이어지는 장면은 사족처럼 보인다. 하지만 미사키의 정체는 여기서 들통난다고 볼 수도 있다. 분명 한국과 일본 모두 코로나 시기였을텐데 일본에서는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마스크를 쓰지 않았던 미사키는 한국의 마트에서는 마스크를 쓰고(직원을 비롯한 다른 인물들도 마스크를 쓰고 등장한다)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물건을 계산한 후 가후쿠의 차에 탄다. 수술할 생각이 없다던 미사키의 흉터는 마스크를 벗자 사라진 것으로 드러나고, 차에는 한국인 제작자 윤수의 집에 있었던 강아지가 자리하고 있다. 자신이 연출한 연극에서 가져온 소품들을 가져온 연출자 미사키는 가후쿠 없이 새로운 세상에서 발을 내딛는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떠오른 생각은, 어쩌면 미사키는 가후쿠를 치유하기 위해 연출한 극에서 자기 자신도 치유받은 것이 아닐까. 미사키의 흉터는 연출이었을까, 스스로 지운 상처의 흔적이었을까. 여러모로 미사키는 미스테리한 존재지만 대부분의 관객에게는 그런 궁금증조차 남기지 않을 만큼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서사를 빠져나간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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