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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Feb 28. 2022

언어가 가진 힘에 대하여

왜 식민지는 언어를 빼앗기는가

현재 표준어가 영어인 국가들의 공통점은 영국인 조상이 이민해온 지역이거나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는 점이다. 식민 통치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 중 하나가 언어를 빼앗는 것인데 한국만은 예외적이었다. 조선어를 지켜내려는 수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인해 일본어 사용을 강제당하고 일본어 교육을 받아야 했던 세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표준어는 한국어이지 일본어가 아니다. 한국어에 일부 일본어의 잔재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말 그대로 잔재일 뿐 한국어의 메인스트림은 조선어다. 영화 <말모이>에서 밝혀졌듯 심지어 한국은 국어사전이 있는 몇 안되는 국가 중 하나일 정도다. 한국인이 일본인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한국인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독립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조선어에 뿌리깊게 새겨진 정체성이었을 것이다.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는지, 사고가 언어를 결정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논쟁이 있지만 언어와 사고가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인지하는 사실이다. 무성영화 시기를 지난 영화는 언어라는 것을 훌륭한 무기로 사용해 영화의 힘을 극대화해왔다. 유행어가 영화에 반영되기도 하지만 영화가 유행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영화와 언어는 이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으며 영화는 언어의 힘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최신작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샤크파는 제트파의 스페인어를 두려워했고 그렇기에 자신들이 있는 공간에서는 스페인어를 금지시키다시피 했다. 용감하게 샤크파 한가운데서 발렌티나를 호명하며 스페인어를 사용하려 했던 아니타가 샤크파의 남성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할 뻔하는 장면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에 대한 이들의 공포를 잘 보여준다. 영화 <안테벨룸>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영화 중반까지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헷갈리게 만드는 <안테벨룸>은 목화솜을 수확하는 흑인 노예 시기를 재현하며 흑인 노예들에게서 언어 그 자체를 빼앗는다. 흑인들은 백인들의 허락 없이는 한 마디도 할 수 없다. 힘들게 목화솜을 수확하면서 노동요도 부를 수 없고 말대꾸는커녕 비명조차 마음대로 지르지 못하는 이들을 통제하는 많은 수단 중 하나는 목을 조르는 밧줄이다. 총과 도끼가 등장하긴 하지만 가장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밧줄은 백인이 흑인을 억압하며 군림했던 수단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목을 원천 차단시키는 수단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목은 언어를 통과시키는 동시에 공기를 통과시켜 사람의 목숨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신체 부위다. 사람에게 있어 언어를 빼앗긴다는 것은 곧 목숨을 빼앗기는 것과도 같다고 영화는 은연중에 암시한다.



핸드폰 알람 소리로 화면이 전환되며 누가 봐도 현재 시점인 주택에서 베로니카(자넬 모네이 분)는 깨어난다. 강연을 다니고 토론에 나가 연사로 활동하는 베로니카의 주 무기는 언어다. 엘리자베스(제나 멀론 분)로부터 의문의 전화를 받은 베로니카가 엘리자베스의 대화에서 가장 꺼림칙해하는 부분은 립스틱에 관한 이야기다. 엘리자베스는 베로니카의 립스틱을 보고 자신이라면 어울리지 않을 색상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피부색에 대한 간접적인 은유이기도 하지만 입술 또한 언어가 통과하는 신체 부위라는 점에서 억압을 두 번째로 은유하기도 한다. 엘리자베스는 결국 그 립스틱이 자신에게도 어울린다며 베로니카에게서 언어를 빼앗아올 것을 암시하지만 결국 엘리자베스의 목에 밧줄을 감는 것은 베로니카 쪽이다. 엘리자베스는 베로니카의 언어가 가진 힘을 알았기에 베로니카를 탐탁지 않아한다. 그리고 이를 예상하기라도 했듯이 베로니카가 언어를 되찾았을 때 엘리자베스는 베로니카에게 확실하게 역전당한다.


목화솜을 재배하는 공간 뿐만 아니라 가해자 백인의 언어에 대한 제재는 흑인이 존재하는 모든 공간을 향한다. 이든과 줄리아는 목화솜을 수확할 때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오두막에 있을 때도 언어 사용을 극도로 제한당한다. 자신의 오두막에서 다른 흑인과 담소를 나눌 때도 이든은 목소리를 낮추고 대화량을 통제한다. 이든이 언어를 되찾기로 마음먹는 시점은 발화 통제로 줄리아가 자살했을 때다. 목화밭에서 유산한 것을 알게 된 줄리아는 소리내어 비명을 지르려 하지만 이마저도 이든에게 차단당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줄리아가 목을 맨 채 오두막에서 발견되었을 때 이든은 계획해왔던 탈주를 감행한다. 이든의 탈주를 백인들이 막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든의 발화 제한을 깜박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성폭행한 백인을 화장장으로 몰아넣을 때 이든은 다른 백인에게 이를 들키지만 순간의 기지로 상황을 모면한다. 이든의 발화는 이든을 구하는 동시에 가해자 백인들을 위험으로 몰아넣는데 가해자 백인들은 이 순간에 이든이 발화의 자유를 되찾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리고 언어를 빼앗았던 가해자 백인들은 마지막 순간에 화염에 휩싸여 단말마의 비명을 남기고 이든을 더 이상 협박하지 못한다.



가해자 백인들이 흑인에게서 착취한 것은 노동력과 언어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들은 흑인에게서 이름마저 빼앗고 새로운 이름을 지어준다. 줄리아의 본명은 끝내 밝혀지지 않는데 이는 줄리아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과도 같다. 영화 초반 오두막에서 언어를 빼앗긴 채 이름을 묻는 질문에 답변을 거부했던 이든은 폭행의 결과로 이든이라는 가명을 토해낸다. 언어를 되찾은 이든이 가장 먼저 외치는 발언은 자신의 본명을 가해자 백인에게 되새기는 것이다. 이름은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인 동시에 주로 부모로부터 물려받는다는 데서 뿌리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름을 새로 지어준다는 것은 누군가의 과거를 무시하고 새롭게 규정짓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것이지만 자신보다 타인이 더 많이 사용하며, 그러면서도 자신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이름은 타인에게 불리면서 비로소 정체성의 근간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든은 본명을 잃고 노예로서의 정체성을 부여받았지만 자신의 이름을 되찾으면서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의 현재를 향해 달려나간다. 이름을 되찾지 못한 흑인들이 맞이한 운명을 생각해 보면 이든이 이름을 되찾는 장면은 서사에서 중요한 국면인 셈이다.


애초에 아프리카에서 자신들만의 언어와 문화를 갖고 살고 있던 흑인들이 신대륙으로 끌려오며 과거를 잃었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이들에게서 영어마저 빼앗으려 든다는 것은 가공할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다. <블랙 팬서>의 와칸다는 비브라늄을 바탕으로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와중에 미국으로 이주한 모계 조상을 둔 킬몽거는 완전한 흑인영어를 구사하며 와칸다의 왕자였던 부계 조상 대신 모계 조상을 자신의 핏줄로 인정한다. 와칸다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음에도 주된 언어가 흑인 영어인 까닭에 킬몽거의 문화적 배경은 조상을 잃은 미국으로 그려진다. 이처럼 언어라는 것은 한 민족을 이루는 근간이자 개개인에게는 정체성의 근본인 것이다. <안테벨룸>을 보고 나오는 길, 한복과 김치를 빼앗으려는 중국이 언젠가는 한글마저도 빼앗으려 들지 않을까 불현듯 걱정이 들었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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