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영국학교 초기 정착기
2018년 4월 영국 학교의 첫 등교를 앞두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7살 유치원생일 순간이었고, 영국에서는 이미 아이들이 1학년을 2/3나 지나온 시점이었다. 영국으로 떠나기 전, 아이들의 영국 적응에 대한 검색을 해보면 많은 아이들이 손톱이나 머리를 뜯는 등 적응 앓이를 수개월까지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아이들은 다 괜찮아 어른이 문제지."라는 말은 일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세상을 덜 알기에 덜 예민하게 반응하는 부분도 있기도 하고, 새싹같이 자라는 에너지를 갖고 있는 아이들이고 아직 어리기에 유연하고 하니, 어른들처럼 삐그덕 삐그덕 요란하게 적응 앓이를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한편 그것이 스트레스인지 몰라서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 앓고 증상이 다른 곳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저 아이를 감싸줄 수 있는 작고 따뜻한 학교가 구해지길 기도했다.
작고 따뜻한 학교이기만을 바란다는 말은 말뿐이었을까, 집 앞에 평판이 좋은 학교에 자리가 나길 기다리며 홈스쿨링 계획서를 내고 아이를 2개월 간 학교에 보내지 않았었다. 집에서 20분 거리에 2년 여 전에 새로 생긴 학교에는 자리가 있었는데도 보내지 않고 기다렸던 것이다. 지금은 영국에서 20분 정도 걷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기에 멀어서 보내고 싶지 않았다는 말을 꿀꺽 삼킨다. 그때는 영국 직장의 근무 형태가 얼마큼 유연한 지도 전혀 몰랐고 출퇴근 시간과 아이 픽업 시간을 맞추는 문제도 고민이 되었기에 집에서 3분 거리에 있는 학교에 보내는 것을 고집했었다. 학교를 옮겨야 하는 이유를 정식으로 클레임 할 수 있는 제도가 있어서 그 부분을 카운슬 스쿨링팀에 문의하기도 하였었다. 관련 자료 보내주며 그 담당자는 다소(?) 아니 그냥 냉소적으로 '클레임 요건 중 어디에 근거해서 클레임을 할 건지 모르겠지만 잘해봐라.' 식으로 이메일 답장이 왔었다. 읽어보니, 해당 구 내에 모든 학교에 자리가 없을 때 정원을 초과한 인원이지만 받아달라는 요청을 할 수는 있었지만, 그 외에는 사유가 되지 않아 보였다. 클레임을 해서 출퇴근 문제와 어린아이 둘을 아내가 혼자 등하교시켜야 하는 어려움을 구구절절 설명해서 전학에 성공했다는, 카센터에서 만났던 어느 점잖은 어르신의 말씀은 정말 옛날이야기였나 보다. 세상은 어디나, 여전히 빈틈이 많은 영국조차도, 부모들에게 첨예한 학교 진학과 관련해서는 제도가 촘촘해지나 보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학교에 잊히지 않도록 이메일을 보내곤 했지만 귀국하는 그날까지 부동의 대기 2번으로 마감하였다. 그 이유는 우리보다 집의 더 가까운 거리에 누가 이사를 오거나, 손아래 형제가 신학년으로 새로 입학하면 대기하고 있던 손위 형제의 대기 순번도 당겨지기 때문이다. 그 과정이 얼마나 투명하게 이루어지는지 정말 알 수 없고, 한 번은 리뉴얼을 할 때 우리 아이를 누락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 이메일을 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한국처럼 하나하나 따지는 게 불가능한 게 영국이다. 그저 '에효..'하고 한숨을 크게 한 번 쉬는 수밖에.
아이를 2개월 간 학교를 보내지 않은 것은, 꼭 학교 입맛이 까다로워서만은 아니었다. "애들이 영어가 늘만하면 방학이고 늘만하면 방학인 게 영국 학교야"라며, 길게 3-4년도 아니고 2년 있을 건데 오자마자 학교에 집어넣는 것이 최선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었지만 말이다. 모든 게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아이의 충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익숙한 친구와 정든 유치원, 한국 동네를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버리고 쌩판 낯선 곳에 뚝 떨어졌다. 언어는 당연하고 아직 동네 거리도 낯설고, 모든 것이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위험'이라고 인지하던 예민 7살이었다. ‘낯선 공간에 친숙한 보호자가 없다는 건 안전하지 않아'라는 의식이, 폭발할 것 같던 호기심마저 이겨버려서 문화센터도 못 보냈던 아이였다. 그래서 아이의 부작용을 줄여보고자, 먼저 동네 거리, 마트, 사람들의 소리, 냄새에 먼저 충분히 익숙해질 시간을 주고 싶기도 했다.
나는 더 기다려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석 달의 시간 중 두 달을 흘려보내고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한 달 남았던 남편은 더는 안된다고 생각했던가보다. 자리가 있다는 학교에 보내자고 했다. "알았다. 그러자." 입학을 하기로 하고 찾아갔다. 그 전에도 이 학교에 대한 리포트를 직장 매니저였던 리사가 보내줘서 읽어봤었다. 아직 신설학교였기에 Ofsted 등급을 매긴 평가 리포트는 없었지만, Ofsted에서 조사한 학교 평가는 있었다. 학군이 좋다던 그 지역의 평균보다도 학업 성취도가 좋은 편이었기에 보내보는 걸로 결정을 했다.
시기는, 1년이 봄, 여름, 가을 3학기로 나눠지는데, 봄학기가 끝나기 일주일 전이었다. 아이가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가정하에 일주일 정도 다니고 2주간의 방학을 맞이하면 무리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일주일의 등교 후, 학교의 영향력은 가히 폭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학이 되고 스타벅스에서 자리를 찾던 중 아이가 갑자기 (엉망진창이지만) 영어 방언이 터졌던 것이다.
그렇게 학교에 등록하러 걱정스러운 마음을 안고 학교의 교감쯤 되는 선생님을 만났다. 우리는 한 3일쯤, 아니면 일주일쯤은 반일만 하고 왔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아직 겨우 한국 나이 7살, 한국 초등학교는 오전이면 수업이 끝나는데, 영어도 되지 않고 학교 입학이라는 것도 해본 적 없는 아이가 아침 8시 40분부터 오후 3시 20분까지 학교에 있는다고 생각하니 내가 다 정신병이 날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아이가 여름 출생이니 1학년이 아닌 리셉션으로 진학하면 안 되겠냐고 재차 물었지만 가차 없었다. 그렇게 아이가 적응을 위해 얻은 시간은 딱 하루였다. 딱 하루만 오전에만 있는 것을 허락했다.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나까지 가르치는 기새로 "We are adults!"였다. 영국은 생각보다, 그리고 한국보다도 아이들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다. 옛날의 우리나라처럼, 아이들은 어른의 판단과 명령을 따라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로 보는 느낌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도 하나의 소우주로 보고 아이의 의사를 존중하며 아이의 속도에 맞춰 키워왔던 것이 와사삭 부서지는 느낌이었고, '이게 영국인가?' 하는 충격을 받았었다. 선진국에 대한 환상 범벅은, '선진국 영국은 얼마나 아이를 인격체로 다룰까'기대했던 선진국 환상 범벅이 금가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영국 생활을 하며 수없이 그 환상에는 금이가다 이윽고 돌아올 즈음에는 적응도 거의 됐겠다 눈에 영국의 티만 보이는 지 ‘이 야만적인 영국놈들’이라고 역정을 내는 일이 잦아졌었다.
그런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결과적으로 그녀가 맞았다, 내가 틀렸고.
We were adults. 어른이 판단하지 아이가 판단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이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강했다.
한국은 유치원 등원만 해도, 식판이나 수저 등 준비할 게 많으니 각오를 하고 있었다. 어떤 가방을 사야 하는지도 인터넷 카페에 물어보고 분주한 마음을 가졌지만, 사실 상 그럴 필요가 거의 없었다. 교과서도 없는 영국이기에 가방은 다니는 2년 내내 거의 텅텅 비어있었고, 물병 하나만 들고 다니다시피 했다.
처음 입학하며 학교에서 사야 하는 것은, 학교 가방, 학교 로고가 새겨진 카디건이나 점퍼뿐이다. 여자 아이들은 주로 카디건을 남자아이들은 주로 점퍼를 입었다. 단정하게 입을 수 있는 점퍼를 입히고 싶었지만, 아이들 사이에도 이건 주로 남자, 이건 주로 여자라는 코드가 있기에 따라주기로 했다. 영국에서는 우리가 맨투맨티셔츠이라고 부르는 풀오버부터 스웨터까지 통칭하여 점퍼라고 부른다. 집업 후드만 점퍼라고 생각했던 나에겐 생소한 일이었다. 이 모든 문화의 차이는 늘 언어의 장벽이 되곤 했다.
영국은 모든 학교에서 교복을 입는다. 흔히 우리가 중학교부터 입었던 딱딱한 교복을 떠올리겠지만, 영국의 공립학교들은 그렇지 않다. 학교에서 판매하는 스쿨 점퍼를 빼고는 모두 학교의 기준에만 맞춰서 마트에서 사면된다. 안내를 받으러 갔던 날 겨울과 여름 각각 어떤 드레스 코드가 있는지 안내문을 받을 때까지는 그 사실을 몰랐기에 ‘엥? 교복을 마트에서 아무거나 사라고?”라고 재차 확인을 했었다. 그래서 아이들마다 입고 있는 셔츠의 칼라 모양새도 조금씩 다르고, 치마도 어떤 친구는 주름 스커트, 어떤 친구는 원피스, 어떤 친구는 저지 원단, 어떤 친구는 울 원단 제각기 다르다. 그렇게 학교에서는 카디건과 가방, PE(체육) 시간에 입을 체육복 상의만 샀다. 그 외에 셔츠나 치마, 스타킹, 체육복 바지는 마트에서 사면되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카디건을 사면서도, ’어떻게 겨울용, 여름용 따로 없이 하나로 입는다는 거지? 이런 섬세함이라고는 떨어지는 바이킹 같으니라고’라고 속으로 궁시렁 거리며 마트에 교복을 사러 갔다. 한국에서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때, 아이들 내의마저도 두께와 길이가 3종류씩 있는 우리와 비교하며 말이다. 딱딱한 셔츠형은 아이가 불편할 것 같고 폴로티형을 셔츠를 사려고 했다. 4월까지도 종종 추운 영국이었다. 긴팔 폴로티를 찾고 있었지만, 점원은 “긴팔은 없어요. 긴팔을 찾는 경우도 잘 없죠.”라고 황당한 답을 들었다. 결국 경험으로 알게 된 건, 보통 짧은 소매에 그냥 여름 겨울 구별 없는 그 카디건을 입고 겨울을 나는 것이었다. ‘아니 무슨 이렇게 무식한 의복문화라니’라고 생각했지만, 그 모든 것은 영국의 날씨를 겪어보지 못한, 사계절 드라마틱하고 혹독한 날씨만 아는 한국인의 시선과 오해였다는 것을 살아보고서야 알게 되었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한국은 생활유지비가 많이 드는 나라였던 것이다. 사시사철, 심지어 같은 계절에서도 극한과 극서기에는 다른 두께의 옷을 갖추고 살아야하니 말이다.
마트에서 편해 보이는 저지 원단의 원피스와 회색 스타킹, 발가락이 보이지 않는(이건 학교에서 중시 여긴다.) 스쿨슈즈, 원했던 건 아니지만 반팔 폴로셔츠를 샀다. 결국 집에 있던 긴팔 블라우스를 입혀 보냈지만 말이다. 아이와 나도 영국 생활에 적응할 때쯤엔, 짧은 팔 폴로셔츠에 카디건을 덮쳐 입힌 채 겨울을 나게 되었다.
교복 안내문과 함께 받았던 것 중 가장 난해했던 것이 식단표였다. 원하는 메인 요리와 디저트를 골라 동그라미 쳐서 갖고 가야 했는데, 이름만 보고는 무슨 음식인지 감이 오지 않는 것들이 수두룩했다. 그래서 일일이 구글에서 이름으로 검색해보며 아이와 의논해서 동그라미를 치는데 1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가뜩이나 “엄마, 영국에서는 왜 점심에 식사를 안 주고 간식을 줘?”라며 날 빵 터지게 했던 7세에게 점심 메뉴를 잘 고르는 건 아주 중요했다. 안 그러면 8시 40분부터 3시 반(방과후가 없는 경우)까지 학교에 머물며, 에너지가 바닥날 것이 분명했다. 낯선 환경,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에서 정신력이 텅텅 비도록 고갈될 텐데 식사마저도 거의 못한다면 버틸 수는 없을 테니까. 그래서 영국에 있는 동안 아침은 꼭 한국인답게 밥과 국으로 속을 데워줬더랬다. 특히 으슬으슬 추운 겨울에는 더.
식단표에서 보이는 다양한 문화의 존중은 다민족 국가인 영국의 전체를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채식주의자를 위한 메뉴만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슬람교도를 위한 Halal 메뉴도 별도로 있다는 사실은 참 신선했다. 이슬람교도의 영향력을 일견에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식단표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주매뉴를 제일 위에 쓰지도 않고 Alternative라고 겸허히 표현하고 있는 것도 말이다.
알러지가 있는 경우는 알러지 음식이 있는 날만 집에서 도시락을 싸갈 수도 있다. 점심이 간식이라던 아이는 점차 학교 음식을 식사라 생각하게 되었고, 체험학습을 가던 날엔 김밥으로 도시락을 싸가기도 했던 아이는 점차 영국 아이가 되어갔다. 머지 않아 저 모든 메뉴를 잘 알게 되었고, 다다음 학기엔 혼자서 척척 10분만에 호불호를 가려가며 체크해서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