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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ribblie Mar 18. 2021

정신만 붙잡은 채 돌아와 다오.

아이의 영국학교 초기 정착기

학교 안간다고 드러눕지만 말자.


 2017년 8월 1일. 친구에게서 전화가 오기 전까지 영국에 오는 건 포기하고 있었다. "너 됐다"며 다 포기하고 휴가를 가 있던 내게 전화가 왔다. 믿기 어려움에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선발되어 영국에 가는 것을 마음에서 포기하고 있었기에, 자력으로라도 아이와 인생 여행을 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때에 서울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였던 책이 '아이가 말했다 잘 왔다 아프리카'였다.

 이 책에는 두 아이를 케냐의 영국식 초등학교에 진학시키고 케냐의 자연 속에서 아이들을 강하게 하고 돌아온 1년 간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마음속에는 몽실몽실 미지의 야생과 모험에 대한 철없는 희망이 들어찼었다. “안되면 케냐에 1년 아이랑 다녀올까?”라고 말했을 때 남편의 얼굴을 봤어야 한다. 그 책에서는 '아이들의 손톱을 깎아줄 일이 없었다.'고 회상하며 아이들의 적응 앓이를 작가는 참 담담하게도 그렸다. 아이들은 손톱을 물어뜯는 것으로 적응 앓이를 표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참 현명한 엄마였다.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것과 해 줄 수 없는 것의 경계를 나누고 엄마의 자리에서 기다릴 수 있는 엄마였다. 몇 달이 지나자 아이들의 손톱은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영국으로 떠날 때 이 책을 기억하며 낯선 장소에 대한 경계가 아주 심한 내 아이의 적응 앓이를 각오했었다. 그맘때쯤 아이는 틱이 심하기도 했다. 의사 선생님에게 이런 상황에서 영국에 가는 것이 틱을 더 심하게 하지 않을지 물었었다. 지금 틱을 유발하고 있는 자극 요인은, 같은 유치원의 친구일 수도 있고 주변에 있을 수 있는데, 오히려 그 요인이 없는 환경으로 가면 나아질 수도 있는 것이라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었다. 어차피 가야 하는 입장이었으니, 의사 선생님이 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아이의 틱이 영국이라는 낯선 환경에 갔다고 해서 더 나빠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한국처럼 부모와 주변인들이 틱에 그렇게 유난하게 반응하고 후벼 파는 눈길로 발견하는 곳이 아니라서 나와 아이 스스로도 잊고 지냈다. 실상, 내 아이의 틱은 눈에 띄기 어려울 만큼 영국에서는 평범 이하였다. 어른들의 관리가 훨씬 더 필요한 상태의 아이들을 학교와 놀이터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알게 된 건 다 지난 지금인 거고,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하던 때에는 아이의 성향을 아는 이상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는 학교 탐색을 위해 학교 방문을 할 때마다, 어른들이 하는 영어 대화에 대한 스트레스로 10분 만에 체력이 방전되었었다.  

 학교 탐색 후 집에 오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를 몇 번쯤 했었다. 사실 당연한 일인데, 아이가 못 알아듣는 것에 왜 그리 민감했는지 생각해보면, 7살이었던 당시 한국어 언어 발전 단계는 이랬다. '이런 것도 몰랐어?' 싶도록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국어 어휘를 일일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추측해보건대, 예전에는 대충 눈치로 문맥으로 알아듣고 모르는 게 하도 많으니까 넘어가던 것을, 대체로 알게 되니까, 모르는 게 나오면 정확하게 알고 싶어서 일일이 물어봤던 것 같다. 언어적으로 그런 단계였고, 사회적으로도 '이제 내가 좀 살아봐서(여섯 살 말엽에 "내가 좀 살아봤잖아"라고 한 일이 있었다.) 웬만한 건 알고 세상이 좀 만만해졌다 싶었는데, '이게 웬일이냐, 하나도 모르겠다, 내가 안전한지 아니 안전한지 파악할 수가 없다.' 그런 감정 기제가 발동한 게 아닌가 싶었다. 녀석을 보니 정신 무장 말고, "멘탈 해제"가 시급해 보였다.

 그저 내가 한 것은, 등교 수일 전부터, "자 엄마 봐, 엄마도 회사에서 뭐라는 지 몰라서 그냥 사람들이 모이길래 가서 나도 모여본다, 그리고 뭐라는 지 모르겠는데 웃으니까 (크게 웃을 순 없고) 미소를 띠고 있어! 알아들으려고 애쓰지 마라, 눈치로 살아남는 거야! 하지만 알지? 엄만 지금 회사가 한국말 다 알아듣던 회사보다 더 행복하고 재밌어 죽겠고, 다시 돌아가기도 싫고, 사람들도 너무 좋고, 회사가 그런데 학교는 얼마나 더 좋겠냐. 자, 너의 첫날 미션이 있어! 거기서 꼴찌를 하는 게 너의 목표야! 잘하지 마, 그중에 가장 느리면 되는 거야." 개그도 좀 곁들였다. 당시 우리 집에서 내 별명은 나무늘보였는데, 한 날 도서관에서 좋다고 부녀가 빌려온 책이 있었다.'slowly slowly the sloth'라는 책이었고 그 나무늘보처럼 해 보였다. 그리고 둘째 날은 I don't know를 많이 할수록 너의 score는 올라가는 거야, 가장 모르고 가장 못 알아듣고 가장 느리게 하면 그게 너에겐 1등이야." 진짜 싫어하는 1등, 그 1 등병을 보육시설에서 아이들을 쉽게 다루려고 뇌리에 심어줬다. 모시고 살던 엄마에게 아이한텐 ‘잘하라’는 말도 하지 말라고 다그쳐가며 가정환경을 만들었건만 아이를 세상에 내놓는 한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 1등병이 머리에 있는 이상 써먹어야지 어떡해.'라며 그때 꼴찌가 1등이라며 써먹었다.

 못할 수 있다는 것에 매우 익숙해지는 것, 못할 수 있다는 멘탈이 주는 어마어마한 저력, 실패가 두려워 시도하지 않음이 주는 무한 무능의 위험을 아는 나로서는, 아이와 나 둘 다 그걸 깨야하고 우리에게 이번에 그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 생각했다. 녀석이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못해도 된다고 즐거우면 되는 거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DNA에 새겨져 있는지 녀석은 꼭 나 같았기 때문이다.


 퇴근 후, 첫 등교 후기를 들어보니 그 부담을 덜어내는 데 성공을 한 것 같았다.

 살 수는 있었어.

 못 견디게 죽을 것 같으면 집에 오겠다(go home)고 아빠에게 전화해달라(call daddy)고 이야기를 하라고 했더니, 죽을 지경은 아니었다는 뜻인가 보다. 대학교 1학년 때, 학교에 가는 버스 안에서 들려오던 라디오에서, '정말 너무너무하기 싫은 건 안 해도 돼요 그게 심지어 학교 가는 일이라 하더라도'라는 말이 내겐 너무 쇼크라 늘 뇌리에 남아 있다. 죽을 것 같이 아파도 학교에 갔는데... 그래서 아이에게 무조건 버텨라, 잘하고 오라고 하지 않았었다. 그날에 나의 아이는 나에겐 최고로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다.

 더 멋진 건, 할 말은 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화장실 간다고(아마도, Toilet please)도 이야기하고, 물 달라(Water please)고도 했다고 하고, 영어 못한다고도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는데, 들어보니 "I am not English."라고 이야기한 거지만 대충들 알아들었을 것이다.

 

녀석, 꽤 과감했는 걸?


멋쟁이 녀석!


아이들은 늘 부모의 걱정과 기대 이상이다. 한 달이 지났을 때쯤 학교에서는 ‘잘 적응했다.’는 상을 주었다. 이건 새로 오는 모든 아이들이 일정 시간이 지나면 받게 된다. 이렇게 작은 것조차 상으로 응원해주는 영국이 고마웠다.

잘 적응했다는 상

 

 이것이 3년 전 이야기이다. 한국에 돌아와 보니, 쭉 한국에서 살았더라도 친구 사귀는 것이나 새 학년, 새 학교에 적응하는 것이 아슬아슬한 아이들이 생각보다 더러 있었다. 2학년쯤 되면, 친구 사귀는 것, 어울리는 것의 사회성은 어느 정도 정착되어 부모가 아이의 그런 점을 걱정하지 않게 될 줄 알았었다. 지금의 우린? 어떠하냐고? 아이가 낯선 곳에 가서 친구 사귀는 걱정은 하지 않는다. 어디서든 친구를 갑분 잘 만들어온다. 요란스럽게 친구를 몰고 다니진 않아도, 친구가 있다 없다로 자기 마음에 상처입지 않고, 등교 첫날부터 한둘 이상 편하게 어울렸다 때 되면 쿨하게 굿바이하고 올 수 있는 아이가 되었다. 귀국 직후인 2학년에는 어떻게든 친구를 만들어주려고 코로나 상황에도 영국에서처럼 한번 다가온 친구들에겐 편지를 써가며 엄마 친구를 만들려 노력했지만, 이제 아이들의 인간관계는 아이의 것인가 보다 싶다. 3학년을 진학하고 첫날부터 친구랑 하교하고 놀이터에서 놀다 온다고 연락도 오니, '이제 난 너의 인간관계에서는 손을 떼마.'


 그렇다고 영국 학교에서 아이의 적응이 꽃길만 같았다는 것은 아니다. 조용히 고군분투한 아이와 나의 학교 적응 일화들을 떠올려보려 한다. ‘이것을 Bulling이라고 봐야 할까 이 시절 미숙한 아이들에게서 일어나는 평범한 일이라고 봐야 할까' 아이에게 티도 못 내고 혼자 고민한 일, 사실 꼭 그렇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 아이가 인종차별적인 Bulling을 한 것이냐?’고 되려 학교에 겁준 일, 아이가 체육시간에 참여하지 않고 한 달을 지냈던 일, 친구를 만들어 주려고 레이시 엄마에게 과잉 밝은 얼굴로 말을 걸었던 일, 학부모회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있었던 일, ‘이게 아닌데, 어쩌다 교장선생님 면담’ 같은 것 말이다.



나나 잘하자, 아이의 학교 적응기


 정착하는 여러 한국인들을 보면, 아이의 사회생활에 어른의 시각과 마음을 투영하게 되면 아이도 부모도 힘들어졌다. 마음은 아이에게 물어보고 아무리 내 마음이 쓰려도 아이의 마음 그대로 인정하고 넘어가야 한다. 어른의 시선으로 아이에겐 없던 틀을 아이의 마음에 씌우거나 관념을 심어주면 트러블의 시작이 된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같은 학교도, 누군가에겐 따뜻하고 많이 배운 더 없이 좋은 학교가 되고, 누군가에겐 차별이 심하고 아이를 돌봐주지 않는 최악의 학교가 되는 것을 목격했다. 돌이켜봤을 때 아이와 학교를 믿고 한 발짝 물러나 기다려보는 것이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싶다.



-3일차-

 학교의 첫인상은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일주일 정도 점진적인 학교 적응을 꿈꿨으나 아무리 학교를 설득해도 통하지 않았고 무섭도록 단호한 말투로 몇 번이나 등교 3일째부터 풀타임으로 있으라고 했다. 3일째에는 아이가 스트레스받아할 만한 일이 있었다. 영어 못한다고 했는데도, 어떤 할머니 선생님이 조금 틀리게 썼다고 "no nO NO NO!"라고 해서 아이는 주눅이 들었고 아마 성격상 혼자 눈물을 그렁거렸었을 테다. 선생님이 꽥하며 Quite라고 했다고도 했는데 아마 영어도 못하는 녀석이 떠들었을 리 없고 반 전체를 보고 그랬던 것 같은데, 한국에서 곱디 고운 유치원 선생님들만 보다가 그런 장면을 목격했으니 충격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영국 선생님들이 얼마나 쉽게 꽥꽥대는지, 좋은 학교일수록 더 권위적이면 권위적이지 덜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기에 킥킥거리며 웃길뿐이지만 -이젠 그 투박함 안에 따뜻함이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때는 '여기 와서 처음으로 눈물이 나려 한다. 영국 사회도 아니 영국 사회가 더 아이를 하나의 사람으로 존중하는 문화는 없구나.'라고 못난 엄마 일기를 썼더랬다.

아침에 학교 놀이터가 열리면 해당 학년 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놀이터에서 놀다 들어간다.

-4일차-

 4일 차에는 참 급작스럽게 느껴졌던 햄튼코트 팰리스로 스쿨트립(소풍)도 갔었다. 지금 물어보니 아이는 기억조차 못하지만, 급하게 소풍 가방을 사고 도시락과 걱정스러운 마음도 함께 싸보냈었다. 스치는 바람에도 멀미를 하는 아이가 학교에 가자마자 4일 만에 버스를 타고 소풍을 간다니, 토하거나 해서 민폐를 끼치거나 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할 수 있는 걸 하자며, '아이가 멀미를 잘한다는 사실과 어떻게 하면 좀 멀미를 덜 하는지, 멀미에 대비해서 비밀 봉투를 보냈다는 것'을 써서 학교에 미리 이메일을 보냈었다. 한국 유치원에서도 버스를 타고 가다 토해서 옷을 싹 갈아입고 온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영국 선생님들은 아이가 집을 떠나 학교에 온 이상 한국에 비해 학교의 책임 하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준비 없이 토했다 하더라도 의연하게 대응했을 것 같다. 깔끔하게 대응했을 거라는 것과는 좀 거리가 있고, 아이가 토해서 불쾌 하달 지 부모가 좀 잘 챙겼어야 한달지 하는 눈치를 주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나중에 걸어서 가는 스쿨 트립을 가보아도 토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선생님들이 봉지를 준비해 다녀서 큰 문제가 없었다. 아이는 현장 학습 내내 너무 힘들어서 허리를 반쯤 구부리고 선생님 손을 잡고 다녔다고 하길래 '그래도 나름 잘 챙김 받았구나, ' 생각했는데, 선생님이 손을 잡고 다니는 애들은 요주의(?) 아이들이라는 걸 나중에 학교 스쿨 트립 봉사를 다니며 알게 되었다.

 게다 한국의 체육시간에 해당되는 PE시간에는 자기는 안 한다고 배짱부리며 통나무에 앉아있었다던데, 그 이후로 한 달간 내내 똥 배짱을 부렸다. 아마도 남자 어른을 매우 부담스러워하고 충분히 파악될 때까지 관찰자로 지내는 녀석 입장에서, 남자 체육선생은 위험한 인물이었을 거고 잘 못 알아듣는데 속도감 있게 지시를 따라 활동을 할 자신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녀석의 그런 상태를 학교에서 용인해주니 다행이라 생각했었고 옆에서 보조 교사가 함께 있어주며 한 번씩 참여하지 않으려냐고 물어본다고 했다. 부모로서 아이가 수업시간에 참여하지 않고 앉아 있는다는 것은 조바심이 나지 않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 달은 두고 보기로 했었는데, 학교와 마음이 맞았던 것인지 한 달이 되던 때에는 학교도 아이에게 이제는 참여해야 한다고 하여 아이는 PE를 시작했다.

나중엔 근처 필드로 원정 체육을 갔지만, 한동안은 PE 수업을 하던 조촐한 운동장(?) 방과후 활동인 After school 테니스도 여기서!

 아이의 말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 우리에게 첫번째 최악을 만들어주었던 "Mrs. no nO NO에게 Good Girl"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이제 더 이상 그 선생님이 무섭지 않고 좋아졌다고도 했다. 학교 오피스에 있는 Mrs.Bain에게 지나가는 말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아이가 좀 센서티브한 아이라 별일 아닌데 꾸중 들었다고 느꼈던가 보다'고 흘렸던 것이 도움이 되었던 것인지는 지금까지 알 수는 없다. 노노노 선생님의 이름은 Mrs. Zap이었다. 이후에 한국에서 온 남자아이도 그 선생님에게 불편을 느낀 일이 있었으니 그 선생님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엔가는 아이에게 "Petal"이라고 호칭해주며 서로를 알고 난 뒤에는 그렇게 스위트 한 호칭으로 불러주는 선생님이 되었다. 나중에 지인에게 들으니, Petal이라는 호칭은 곱고 착한 여자아이들을 사랑스럽게 부르는 영국의 연세 있으신 분들이 쓰는 호칭이라고 했다. 아이의 적응에는 조급증을 내지 말고, '모든 걸 문제로 바라보면 정말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아이와 가족 그리고 학교, 모두를 위해!

 아이는 그날 놀라운 일을 해냈더랬다. 점심은 모두가 1층에서 모여서 먹는데, 옆에 앉은 한 살 어린 리셉션 아이가 요거트 껍질을 뜯는데 잘 못해서, "I am help"라고 하고 도와주다가 얼굴에 요거트가 좀 튀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동사는 모두 Be동사만 있던 시절이었다. 하하. 그러던 녀석이 2년도 안되어서 Should have p.p.완료형까지 문법에 틀리지 않게 적재적소에 맞게 쓰게 되는 걸 보면 아이들의 언어 능력은 신의 영역이 아닌가 싶다.- 아니 도움을 받을 입장에 어떻게 도움을 줄 용기를 냈냐고 했더니, "동생이니까, 잘 못하니까 도와줘야지~"하는 말에 육성으로 웃고 말았던 달콤한 밤이었다.


-6일차-

 아이들은 빨라도 참 빠르다. 6일 차에 학교가 재밌다는 이야기를 들을 줄은 정말 몰랐었으니까. 아이들은 역시 친구가 생기면 재밌는 것이었다. 같은 반에 한국 남자아이가 있었지만, 아이가 한국말로 이야기를 하면 "나 이제 한국말 못 해."라고 한국말 못 한다는 말을 한국말로 했다고 해서 웃었었다. 실제로 그 한국 아이보다는 완전 토종 영국인인 레이시 덕에 아이는 학교에서 잘 적응할 수 있었다. 그 나이에는 언어나 국적보다는 성별로 친구가 되는 것 같다. 이제 와서 알았지만 학교에서는 새로운 아이가 오면 Helper를 붙여준다. 레이시가 헬퍼였던 것인데 그때는 그걸 몰랐기에 마냥 저냥 그 친절한 아이가 고마웠다. 헬퍼라고 해서 늘 잘 도와주는 건 아니고 상대가 관심 있고 잘 맞아야 그리되는 것이기도 했다. 나중에 새로 온 한국 친구에게도 레이시를 헬퍼로 붙여줬지만 오히려 그 아이는 레이시가 심술궂게 한단다는 이야기를 그 아이 엄마에게 들었었으니 말이다. 레이시는 사실 그 또래 아이가 그렇듯 마냥 착하기만 한 아이는 아니었다. 나중에 친해지고 나서 알았지만, 레이시는 학교에서 인기가 있는 아이였고 Bossy 한 아이였다.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듯 Bossy 하기에 잘 챙겨줄 수도 있었던 것 같다. 첫날부터 옆에 첫날부터 옆에 앉아서 Good girl, Good girl 하면서 등을 쓰다듬어주고 잘 모르는 게 있으면 간단한 말로 다시 설명해줬다고 했다. 아마 동생이 있어서 간단한 언어로 다시 설명해주고 챙겨주는 데에 능숙했던 걸까? 반면, 노는 시간에 남자아이의 엉덩이를 꽉 잡고 도망쳐서 그 남자아이가 "레이시~~" 하면서 쫒아가니, 아이도 한번 장난을 쳐보고 싶었지만, 엉덩이를 잡는 건 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고, 그냥 똑같이 "레이시~~" 하면서 잡으러 쫓아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매너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어울려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꽃이 피던 때였다. 하굣길에 우연히 레이시를 마주쳤는데, 레이시는 "Hi, Dxxx"하며 지나갔고, 덕분에 그 아이가 레이시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우리도 그 엄마와 아이에게 "Hi" 할 수 있었다. '내 언젠간 저 친구 엄마에게 꼭 말을 걸어서 친구가 되어보리다!' 결심했던 순간이었다.

1년 뒤, 차에서 먼저 훌쩍 내려 친구에게 가 붙어 수다를 떨고 있다. 엄마를 버려두고 혼자 친구를 찾아가버리다니. 그간의 성장이 가슴 속으로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노는 시간에, 친구가 헤매고 있길래 그 친구의 풀어진 운동화 끈을 묶어주었다고도 했다. 손재주 좋은 한국 아이들은 그 또래면 다들 척척 리본을 묶을 수 있는데 한국인의 재주를 십분 활용하였던 것. 말이 안 되면 행동으로! 호감을 위해서는 호의로! 아이는 그렇게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도움을 주면서 낯선 세상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채로운 일이 있었던 그날엔 웬일로 하교 시간에 늦게 나왔었는데, 선생님이 친구 이름을 불렀는데 그 아이가 없어서 자기가 이름을 부르며 찾으러 갔었다나? 그런데 못 찾아서 총총총 엄마 아빠 만나러 얼른 왔다면서...  정신없을텐데 벌써 친구 이름을 외우고 학교 지리나 똑바로 아는가 싶었는데 6일만에 그런 오지랖을 떨었구나. 그렇게 일주일 만에 하프 텀 방학을 맞이하였다.


- 적응은 나나 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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