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 쓰리지만 행복한 영국 운전
집에서 30분 거리를 운전해 다녀오며 진땀을 흘렸다.
여기는. 한국이다.
영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운전면허를 20년 가까이 소지했으며 걷는 걸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걸어 15분 거리도 차를 갖고 다니고, 서울 한 복판 운전도 문제없는 한국 드라이버였는데! 겨우 영국 운전 2년을 했다고 한국 운전에서 그만 손 떼고 싶다니, 이게 실화인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운전을 해야 적응이 되지"라며 타박을 주는 남편에게는 귀국 1년이 넘도록 운전을 안 하는 것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려는 걸로 보이는 것이 당연할 법도 하다. 과연 언제 다시 한국 운전을 할 수 있게 될지 나도 궁금하다. 영국 운전은 히드로 공항에 내리는 즉시 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말이다.
그렇다면 영국 운전은 어떻다는 걸까? 널리 알려져 있듯 영국은 핸들이 우리와 반대편인 우측에 있고 주행도 반대여서 정말 그렇게 어려운 걸까? 사실, 운전 자체에 미숙한 운전자가 아니라면 그 두 가지는 하루 이틀이면 적응이 된다. 다만 아직 익숙하지 않은 초반에는 우회전을 할 때 무심코 한국 방식으로 코너의 오른쪽으로 붙어서 회전하는 실수를 한다면 역주행을 하는 결과가 오게 된다. 반대편에서 오는 차와 꽝! 필자도 우회전을 한다는 생각만 하다가 중앙선이 잘 없는 영국 도로이기에 반대편 차량 도로를 살짝 점유한 채로 우회전을 시작하던 중 좌회전을 해서 들어오려던 차와 마주했던 적이 있다. 그때 그 운전자의 커진 눈을 잊을 수가 없다.
다만, 반대 주행의 문제는 오히려 보행자일 때 일어난다. 귀국하는 날까지도 횡단보도를 건널 때 무심코 왼쪽을 먼저 쳐다보는 것이었다. 차는 오른쪽에서 오건만. 오래도록 몸이 익힌 건 숨길 수가 없다.
영국 운전의 진짜 난관은, 맞은편 차와 어깨가 닿을 듯한 좁은 도로이다. 운전대를 잡고 직선거리를 달리는데도 심장은 쪼그라들고 맞은편 차가 달려와 지나갈 때는 그 아슬아슬함에 어깨가 쓸린 듯 오른쪽 어깨에 아픔이 느껴질 지경이다. '좌-도로경계석, 우-맞은편 차량' 양단간에 어디에 긁을 지를 선택을 해야 하는 기분이다. 그런데도 익숙한 영국인들은 속도를 줄일 마음 하나없이 쉥~하고 지나가는데, 이상한 운전부심인건지 눈을 질끔 감는 심정일 지언정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Tip. 한적한 도로에서 차를 세워두고 본넷의 어디쯤에 좌측 도로선이 걸리면 안전한 위치인지 확인해두고 운전할 때 참고하거나, 운전 시 조수석에 앉은 사람에게 도로 경계석까지 얼마나 갭이 있는지 한 번씩 확인하면 감각을 빨리 키울 수 있다.
영국은 도시계획 이론의 원론지이다. 1898년 하워드의 전원도시개념에서 시작한다. 그 전에는 마차가 다니는 길이었을 것이고, 400~500년 된 건물이 지금까지도 주택으로 쓰이고 있는 영국에서 도로의 확장이란 없다. 그렇기에 도로 사정은 매우 열악하고 좁아서 차가 밀리기라도 하면 차선을 양방향에서 일방향으로 바꿔 버리는 뜨악한 방법을 쓴다. 존 루이스 백화점으로 가는 길은 주말에 늘 끔찍하게 밀렸다. 어느 주말도 마찬가지였다. 버스 타고 나올 걸 그랬다며 후회를 하며 그럴 때마다 돌아다니던 뒷골목으로 들어갔는데, 분명 양방향이었는데 일방향으로 바뀌어 있었다. "밀리면 넓혀줄게"라는 한국 방식과 달리, "밀리면 다니지 마"인 것이다. 게다 속도도 낼 수 없게 양쪽에 차가 긁힐 듯 볼라드도 빠듯하게 설치해둬서 간신히 지나갈 때는 심장에 스크레치가 나는 줄 알았다. 아마 그 길 주택가 사람들이 민원을 낸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영국에서 차를 소유하고 운전하며, 차는 자산이 아니라 소모품이라는 마인드를 갖게 되었다. 주차 상황도 열악해서 대부분 길거리 주차인 데다 차들도 오래되어서 자동으로 사이드미러가 접히지 않는 차가 더 많다. 좁은 도로를 휙 하고 지나간 차량들에 부서진 주차된 차량의 사이드미러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신호를 기다리며 다른 차들을 보면 박스테이프로 사이드미러를 칭칭 감아 고정시켜둔 것을 보고 어떻게 저렇게 타고 다니나 싶었던 적도 있었다. 한국 같았으면, 운전자가 마땅히 차주에게 연락을 하거나 보험처리를 했겠지만, 이곳에서는 휑하니 지나가는 게 보통인가 보다. 아는 언니가 직선 주로를 달리던 중 중앙을 침범해 달리던 차가 사이드미러를 치고 지나갔는데 조금도 멈출 기세 없이 가던 길을 가더란다. 운전자도 몰랐을 리 없을 텐데 말이다. 차에 대한 개념도 관리도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 그래서 가능한 중고차를 살 때는, 기본적으로 부지런히 차를 가꾸는 한국인이 귀국을 위해 처분하는 차를 사라고 하는 것 같다.
법규는 당연히 지켜야 하지만, 운전 에티켓을 모르고 운전을 하면 대한민국을 넘어 동양인을 대표로 욕을 먹이는 공을 세울 수도 있겠지만, 내 마음도 끓기 마련이다. 요즈음같이 동양인 타깃 혐오 이슈가 많은 때에는 더더욱 운전 에티켓을 알고 지켜, 쓸데없는 감정싸움을 만들어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
영국 초보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영국 운전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에 없는 도로와 교통 사정, 운전 안에 담겨있는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주축으로 할 예정이다. 모두들 무용담을 하나쯤 갖고 있는 라운드 어바웃 운전, 구글맵 내비게이션과 영국의 장거리 운전, 영국의 운전 예절과 시그널, 차가 오는데도 가라고 빵빵거리는 내 뒷차, 배려운전일까 자구책일까, 보행 중심 천하무적 호박등, 일상의 행복감을 채워주는 영국 운전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보자.
"라운드 어바웃에 들어섰는데 출구로 못나가고 돌고 돌고 또 돌고만 있었지, 계~~~속 도는 거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재미난 영국 이야기를 기대하는 지인들에게 낯선 문화에 우스개까지 곁들여 들려주기에 제격이라 그런지 라운드어바웃 무용담은 당장이라도 꺼내 쏠 수 있게 장전 한 총처럼 누구나 하나쯤 차고 있는 것 같았다.
영국 운전대를 처음 잡았을 때, 없어도 뭐가 너무 없었다. 한국이었으면 길마다 신호는 물론이고 지켜야 하는 모든 것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야 하는데, 정보가 너무 없으니 이러라는 건지 저러라는 건지, 운전의 관행이 몸에 익기까지는 곤란한 감이 있었다. 없어도 너무 없는 것 중에 하나가 그 유명한 라운드어바웃 이리라.
1909년 Letchworth Garden에 만들어진 최초의 라운드 어바웃 이전에도 Bath 등지에 로터리와 같은 회전 교차로는 18세기부터도 존재했다고 한다.
다들 영국 운전이 어렵지 않냐고 물으며 예로 드는 그 첫 번째가 신호 없는 로터리 라운드어바웃(Round About)이다. 우리로 치면 교차로인데 신호가 없고 오른쪽에서 차가 오지 않을 때 끼어들어 돌다가 자신이 가야 하는 길로 다시 빠져나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신호가 없고 눈치껏 끼어야 한다는 것이 난감하기 짝이 없고, 대체 왜 신호를 주지 않는 건인지, "정해줘! 신호를 달라고!!"라며 속으로 울부짖었다. 고속도로 진입을 하는 곳이나 아주 큰 라운드어바웃에는 신호가 있기도 하다. 얼마나 감사한지...
다들 한 번쯤, 라운드 어바웃을 돌다 보면 몇 번째 출구에 내가 도달해있는지 위치 감각을 잃고 라운드 어바웃 뺑뺑이를 돌고 있더라는 우스개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실 뺑뺑이를 돌면 차라리 다행이다. 확신을 갖고 내비게이션이 가라는 대로 세 번째 출구로 나갔다고 생각했는데 나간 곳이 두 번째 출구인 경우,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또 다른 여행이 새로이 시작되는 게 가장 슬픈 시나리오인데, 그 가장 슬픈 것을 꽤 겪었다. 이 문제에서 벗어나려면, 라운드어바웃에 진입할 때 네비에서 알려주는 출구 번호만 듣지 말고 길의 이름을 듣고 표지판을 보며 들어가면 좋고, 민첩하게 들어가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 진입 시 눈으로 봐 두는 것이 좋다.
큰 라운드어바웃에서 또 하나 신경 써야 할 것이 진입하면서 몇 번째 차선을 탈 것이냐 하는 것인데, 빨리 빠져야 할수록 왼쪽 차선에 붙어 있는 것이 유리하다. 반대로 늦게 빠져야 하는데 좌측 최전선을 타고 있다면 원치 않아도 첫 번째 출구로 빠져야만 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한국에서 1차선을 타고 가다 보면 직진을 못하고 좌회전 선에 서서 애꿎게 좌회전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듯 말이다.
라운드어바웃에서 또 하나 지켜야 할 것은 "Keep Clear"이다. 영국의 도로에서 지켜주지 않으면 교통 훼방꾼이 되기 쉽고 벌금도 나온다고 하는 것이 "Keep Clear'이다. 양방향 1차선인 좁은 도로가 많은데, 거기서 건물로 들어가기 위한 우회전을 해야 하는 차량이 있다고 가정하면, 그 입구 근처 도로에는 어김없이 Keep Clear가 쓰여 있는데, 그곳을 비워 두지 않으면 반대편 차량이 우회전을 하기 위해 기다려야 하고 그 뒤에 신호를 받고 오던 차량들이 줄줄이 가지 못하고 서 있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만약 그 Keep Clear에 서 있는 게 내 차량이라면 여름날 햇빛에서 3시간 낮잠을 잔 듯 오른쪽 얼굴이 화끈거리고, 옆구리는 결리도록 쑤시고 신호가 바뀌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며 옆은 언감생심 보지도 못하고 정면에 레이저빔을 쏘고 있게 될 것이다. 처음엔 바닥에 다 지워지듯 흐릿하게 써 있기도 해서 잘 안보인다. Keep Clear 숨은 그림 찾기, Clear!
라운드 어바웃에서 Keep Clear가 있는 이유는, 우측에서 차가 오는 한 진입할 수 없는 영국의 규정 상, 꼬리물기 하듯 차가 이어지면 절대 다른 차선의 차들이 진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선 진입부에 Keep Clear가 있는데, 라운드어바웃을 돌던 중이라도 정체되어 서 있어야 하거나 하는 경우 비워두어야 한다.
교차로 역할에, U-turn, P-arurn기능까지 할 수 있는 라운드 어바웃은, 처음에는 난감하게 느껴졌지만 우리나라처럼 교통량과 차량이 많지 않은 영국에서는 효율적인 교통 방식이었다.
도로로 내밀려 현실을 알면 알수록 무서운(?) 한국 운전과 다르게, 영국운전은 몇 가지 원칙만 지키면 알고 나면 쉽다 못해 행복해지기까지 한다. 일단 이 다섯 가지를 외치고 나서 P에서 D로 기어를 바꾸자. “오른쪽 차가 먼저!”, “차 머리를 디밀어라”, “깜빡이 잘 키면 만사 오케이”, “버스가 지켜줄 거야”, “보행자 최우선”
고민될 때는 내가 상대적으로 오른쪽에 있는지 아닌지를 생각해보자. 라운드 어바웃이나 작은 사거리에서는, 이 차선 저 차선에서 차는 계속 쏟아지지~ 신호가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당황스러울 수가 없다. 이럴 때 기억해야 할 것이 “오른쪽 차가 먼저!”라는 사실이다. 내가 오른쪽 차라면 눈치 볼 것 없이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듯, 한편으론 내 목숨을 왼쪽 차에 맡겨둔 듯 달려들면 된다. 반대로 내가 왼쪽 차량이라면 오른쪽 차 우선을 지키지 않았을 때 모든 사고의 책임을 질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지, 그 규칙이 어긋났다고 생각되면 오른쪽 차량은 ‘내 목숨 너에게 맡겨 뒀더니 무슨 짓이냐’는 듯 대놓고 왼쪽 차량에 화를 내기도 한다.
때때로 라운드 어바웃을 중심에 두고 오른쪽에 차 없이 마주 보는 차량만 있을 때는 서로가 서로에게 오른쪽이 되기 때문에 두 차량 모두 멈칫거리는 경우가 있다. 그 차가 직진이라면 서로 문제가 없지만 그 차가 우회전이라도 하는 중이라면 약간 난감해질 수도 있다. 이미 들어선 상황이라면 그 차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빠르게 능력껏 빠져주지 않으면 상대로부터 ‘무슨 이런 경우가 있냐’는 표정을 먹게 될 수도 있다. 그만큼 오른쪽 차는 당당하다. 오른쪽 차 우선도 라운드 어바웃에서 신호등 역할을 하는데 내 우측 차량의 우측 차량(나에겐 왼쪽 차량이 될 수도 있다.)이 들어서게 되면 나의 바로 우측 차량은 꼼짝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찰나에 나는 들어설 기회를 갖게 되는 재미난 구조이다. 이래서 영국 운전은 처음엔 당황스럽다가 할수록 재밌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설명할 수 없지만 묘하게 착착 맞아 들어가는 질서들!
신호가 없어서 괴로운 건 라운드어바웃만이 아니라 도처에 깔린 작은 사거리들도 그러하다. 한국이었다면 신호가 있었을 법한 사거리에도 신호가 없다. 우측에서 차가 오고 있지 않다면 머리를 디밀고 봐야 한다. 한국이었다면 가로질러야 하는 양방향 차선에 모두 차가 없거나 멀찍이 있어야 엑셀을 밟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러고 있노라면 가는 건 세월 서 있는 것은 나와 내 차일 것이다. 그리고 뒤에서 (웬만하면 잘 울리지 않는) 짜증스러운 경적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이것은 양해의 문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일단 내가 가로질러야 하는 차선에 차가 멀찌기 오고 있다면 일단 차 머리를 디밀어야 예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애매하게 사거리 허리에 차와 목숨을 같이 걸치고 있으면, 그 건너 차선에서 오던 차들이 마치 규율이라도 있는 듯 헤드라이트를 깜빡이며 가라는 신호를 주어 오른쪽에서 달려오는 차에 허리춤을 받히지 않도록 적절한 때에 보내준다.
처음엔 쌍방향 차선 모두 차가 없길 기다리며 뒤에서 빵빵거리는 차에 "네가 가봐라 차가 줄지어 달려오는데"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고, 차 허리를 사거리에 걸고 민폐(한국 운전 문화에서 그렇게 느껴질 뿐 영국에서는 전혀 민폐가 아니다. 운전의 방법일 뿐)를 끼치는 얼굴 붉어진 동양인에게 헤드라이트로 쌍욕을 하나 싶지만 미소 띠며 서 있는 차를 보며 '저것은 욕일까, 배려일까' 마음이 어지러워질 수 있다. 많은 것을 보기에 아직 너무 정신이 없다면 먼저 오른쪽을 열심히 챙기자. 양쪽 차선에 다 차가 없을 때 교차로를 질러가야지 생각한다면 영원히 못 갈 것이다.
머리를 디밀며 갈 것이라는 의사를 보여줘야 하고, 물러설 상황이 아니라서 가기로 했으면 가차 없이 가줘야 한다. 한국은 욕을 욕을 하면서도 일단 차가 들어선 걸 보면 속도를 줄여주지만, 영국은 ‘응 그래? 네가 갈 수 있으니 들어온 거지? 가봐!’라는 듯 일말의 자비 없이 오던 속도 그대로 달려온다. 그러니 보통은 늘 양보하고 웃고 점잖게 운전을 하지만, 결단이 내려진 한 “붕~”하고 엑셀을 밟아서 난폭 운전 마냥 우회전하는 차량을 자주 볼 수 있고, 어느새 똑같이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한국 운전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차선 바꾸기라는 것에 이의가 있는 운전자는 없을 것이다. 여유 있게 오던 옆 차량도 깜빡이만 켜면 잡아먹을 듯 달려오는 것이 한국 운전 아니던가. 그래서 영국에서도 가장 걱정되었던 것이 차선 바꾸기였다. 그런데 이게 웬걸, 깜빡이만 켜면 바로 비켜주는 것이었다. 깜빡이만 켜면 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주는 영국 운전 문화가 영국 운전을 쉽게 해주는 가장 큰 요소였다. 깜빡이 켜고 차선을 바꾸지 못하고 서 있다고 해도 욕할 뒤차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뒤차가 내 뒤에 기다리고 있다면 그 운전자는 비켜주지 않고 들이대는 옆 차선 운전자를 욕할지도 모른다. 웬만해선 그런 일이 생기지도 않겠지만.
한국 운전의 정글에서 하이에나 같은 것이 택시라면, 정글의 왕은 버스일 것이다. 택시는 더러워서 피하고 덩치로 밀고 들어오는 버스는 무서워서 피한다. 그런데 영국에서 택시는 흔히 볼 수도 없지만, 버스는 교통의 수호자 같은 존재이다. 혹여라도 차선을 바꿔야 하는데 곤란한 상황이면 버스를 노려야 한다. 못 가고 주춤주춤 하고 있으면, 운전기사의 웃는 얼굴과 함께 창밖으로 가라는 손짓이 나의 사이드 미러를 행복하게 했다. 처음엔 당황스럽기 그지없었지만, 영국 운전을 하면 할수록 버스를 볼 때마다 반갑고 마음이 놓였었다. 그래서 그런지, 영국 버스는 한국처럼 시간을 칼같이 못 지킨다. 여유는 친절과 직결되고, 여유는 정확성에 반비례하는 게 철칙인가 보다. 한국의 버스 기사들이 옹색한 것은 칼같이 도착하는 버스 간격과 맞바꾼 것이리라.
그런 한국식 사고를 하면 큰 일 난다. 한국에서는 신호가 없는 건널목에서는 보행자가 1차선쯤에 건너고 있어도 2,3차선으로 쇵~하고 지나가는 차량을 보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지만, 안된다 안된다. 영국 보행 건널목에는 가로등처럼 생긴 깜박거리는 등이 있는데 한국인들은 노란 늙은 호박처럼 생겼다고 호박등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본래 이름이 Belisha Beacon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흔치 않다. 이 등이 있는 건널목에는 보행자가 건너려고 대기하고 있다면 보행자가 진입을 했건 하지 않았건 무조건 멈춰 서야 한다. 보행자 최우선인 것이다. 만약 이를 무시하고 지나치면 벌금을 낸다고 한다. 운전자가 보행자를 발견하고 급하게 서면 보행자도 양보받았다는 것을 알기에 영국인 특유의 밝은 얼굴로 고맙다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보인다. 때론 이런 건널목이 라운드 어바웃을 돌자마자 있다든지, 아주 못된 위치에 있는 경우도 더러 있어 실수로 지나칠 때가 한두번 있었는데, 그때는 보행자에게 ‘못 봤다 실수다,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과 손짓을 해 보였다. 운전자일 때나 보행자일 때나 여유 있는 교양인이 되어 상대와 소통해보자.
보행자와 호박등은 영국 교통에서 살아 움직이는 교통 프로그램과 같다. 오른쪽에서 차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연이어 달려와 언제쯤 갈 수 있을까, 뒤차의 눈치가 보여서 뒤통수가 따끔따끔할 때 바로 기회를 주는 것이 호박등 앞으로 다가오는 보행자이다. 보행자가 그 오른쪽 차를 가로막아주는 순간 나는 그 길을 지나갈 수 있게 된다. 기본적으로 서울에 비해 차량이 적기 때문에 가능한 방식일 수도 있으나 그렇게 신호가 없는데도 이렇게 조화롭게 흘러간다는 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게다 영국은 교통사고 발생률 적은 나라 1위이다. 영국 운전을 하는 동안 친절한 운전자 보행자를 만나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한국인인지라 이렇게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좌우를 살피고 기회를 보는 게 타국 생활이 고단한 날엔 더 고단하게 느껴졌고, 그냥 신호가 있어서 띵~ 파란불이 눈에 켜지면 가고 빨간 불이 들어오면 멈추면 되는 정해진 게 분명한 한국 운전이 그립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도로 공사로 인해서 임시 신호등이 생겼는데, 오는 차도 없는데 그 신호를 기다리고 있자니 그렇게 답답하고 성질이 날 수가 없었다. 어느 나라나, 그 사정에 맞게 질서도, 시스템도, 제도도 만들어지는 게 틀림없나 보다.
이렇게 신호도 잘 없고 정해진 게 적어서,
늘 차량 간 상호 관계를 살피며 곤두세운 채 운전을 하기때문에, 영국이 교통사고 발생률이 최저인 것일까?
한국에 와서도 보행자 최우선의 그 운전습관이 쉬이 버려지지 않았다. 한 번은 운전을 하며 보행자가 신호가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하길래 3차선에 있던 내가 속도를 줄이고 서니, 당연히 먼저 지나쳐갈 줄 알았던 차가 서니까 그 보행자도 당황하며 이걸 건너야 하나 말아야 하나 혼선이 일었다. 차라리 사람이 건너던 말던 휭 지나갔으면 내 지나간 뒤로 길을 건넜을 텐데, 되려 혼선을 주어 미안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로마에서는 로마 법을 따라야 하는데... 하지만 습관이 된 것을 어쩌겠는가. 영국에서는 횡단보도에서 서지 않으면 큰 일 나는 것을.
덤으로, 센스있는 운전자가 되기 위한 하나의 팁!
종종 직진 신호만 있고 우회전 신호가 없는 사거리가 있다. 이럴 땐 반대편에서 오는 직진 차량때문에 우회전을 할 수가 없다. 교차로 중간 쯤까지 많이 빠져있다가 언제든 반대편 직진 차량 사이에 틈이 나면 우회전을 위해 붕~소리가 나도록 밟아줘야 한다. 길이 넓을 경우, 우측으로 비켜서면 뒷차들이 비켜가지만 영국에 그런 넉넉한 도로는 만나기 어렵다. 그러니 처치 곤란하게 뒷차들의 직진을 가로막고 서 있게 된다.
결국 신호가 다 끝나도록 우회전을 하지 못하고 뒷차들을 줄줄이 막고 서 있었다면, 이제 마지막 면죄부 찬스가 온다. 직진 신호 마지막에 주황색 신호가 되었을 때 슝~하고 우회전을 해주면 뒷차를 위한 배려가 된다. 다음 신호에도 내가 직진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뒷차들은 직진 신호임에도 또 다시 줄줄이 가지 못하고 있을 것이고 똥줄뿐만 아니라 얼굴도 까맣게 타들어갈 지경이 될 수 있다. 만약 그때마저도 놓쳤다면, 직진 신호가 새로 떨어졌을 때 빠르게 우회전을 하는 게 정말 마지막 찬스다.
아니면, 영원히 갈 수 없다는 사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어떻게 이렇게 헤드라이트의 사용법이 동서양 극적으로 반대일까? 우리나라에서 면전에다 대고 헤드라이트를 껌뻑였다고 생각해보면, 그다음 일은 상상하고 싶지가 않다. 하지만 영국에서 헤드라이트 환하게 받으면 행복해진다. 상대가 한번 헤드라이트 쏴주면, 고맙다고 두 번 쏴주면서 커다란 미소를 띠며 지나가면 젠틀한 운전자가 될 수 있다.
하이빔 한 번의 의미는 '내 양보할 테니, 너 먼저 가라'는 의미이고, 그 응대로 하이빔 두 번은 '고맙다'는 인사가 된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나라마다 헤드라이트를 깜빡이는 것의 의미가 조금씩 다른데, 영국에서는 교통법규 상 “여기 내가 있다.”는 알림의 표시로만 쓸 수 있고 다른 운전자를 위협하려는 의도로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되어 있다고 한다. 법규적 신호는 아니지만, “먼저 가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는 것이 관례인 것도 사실이라 나와 있다.
하이빔이 아니어도 90도 각도에서 차를 만났을 때, 가슴에 팍 와서 꼿힐 듯한 삿대질로 정확하게 방향을 찔러주는 수신호를 만나면 가슴에 총이라도 맞은 듯해진다. 보통 하이빔을 켜서 주의를 집중시킨 뒤 삿대질을 하기 때문에, 이 이중 콤보에 앗찔해진다. 하지만 웃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이 사람이 사이코 거나, 공격인 듯 공격 아닌 신호라는 걸 육감적으로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너 먼저 가라'는 사인이고 참 자주도 만나게 된다. 귀국하는 날까지도 볼 때마다 그 손끝이 거슬렸지만, 가슴 한번 쓸어내리고 손을 들어 고마움의 표시를 했었다. 좀 더 영국인스럽고 싶다면 엄지를 척! 치켜올리며 얼굴에 만면의 미소를 지어주면 된다. 난 도무지 검지 하나로 무례하게 찌를 자신이 없어서 다섯 손가락으로 '저리 가시지요'하는 손 모양을 하곤 했다.
사실, 주변 한국 지인들이 운전할 때 영국의 운전 매너 인사를 실천하는 걸 본 일이 잘 없다.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인지, 한국인 특유의 쑥스러움 때문인지, 무언의 룰을 몰라서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외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대표적인 인상이 '화나 보인다.'는 것이라고 한다. 아마, 양보운전에 제스처 인사로 응대하지 않는 한국인들에 대해서도 화나 보이거나 매너가 없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어색하고 쑥스럽더라도 그들의 관행대로 인사를 주고받으면 그 작은 제스처와 소통을 통해 영국 살이가 달콤하게 다가오고 영린이(영국 적응 어린이)를 벗어난 기분에 우쭐해지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