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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ribblie May 04. 2021

영국 운전이 행복했던 이유-양보와 양해 사이

어깨 쓰리지만 행복한 영국운전

 행복했다. 영국 운전 이야기를 마무리 짓자니 영국을 떠나오던 것처럼 서운하다. 잠시나마 영국에서 운전하던 때를 떠올리며 일상의 평안을 충전했던 것 같다. 왜 그렇게 영국 운전은 운전 그 이상으로 행복감을 주었을까?

 믿음이 있었다. 늘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모르는 길을 가도, 실수를 해도 크게 비난받거나 혼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고, 그저 조금 헤매면 된다는 걸 알았다. 초보운전이라고 P를 붙이면 더 많이 이해받고 양보받는다는 걸 알았다. 깜빡이만 켜면 차선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버스는 덩치 큰 착한 친구 같았다. 영국에서의 운전은 잘해야만 혼나지 않던 한국 어린이가 못해도 괜찮다는 말을 듣는 기분이었다.

 영국에서의 운전은 기계를 모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매 상황에서 상대 운전자와 주고받은 눈빛, 손짓은 대화였고, 마음을 전달받았다. 보통은 배려와 양보라 느꼈다. 운전이 익숙해지고 여유가 생겨 반대로 그 친절을 상대에게 줄 수 있었던 날엔, 심부름하고 어른이 된 듯 웃쭐해진 아이처럼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된 것 같았다. 베푼 친절 뒤엔, 늘 잔돈처럼 따라오는 상대의 활짝 웃는 얼굴과 감사 인사가 집으로 운전해 돌아가는 내 마음에 넉넉한 노잣돈이 되었다.


그런데 정말, 영국 사람들이 신사이기만 해서 양보를 잘하는 것일까?



양해의 문화 - 네가 가야 내가 가지


 누구나 영국에서 처음 운전을 할 때면 양보들을 너무 잘해서 “와~ 이런 게 선진국인가?, 선진 문화인가?!” 찬사를 하게 된다. 그 찬사가 참을 수 없이 올라오지만, 그게 무엇이 되었든 ‘제대로 알게 될 때까지는 판단 보류’하자는 결심이 있었기에 찬사가 반복되어 찬양이 되려는 것을 꾹꾹 눌렀었다. 양보하지 않으면 너도 나도 못 갈 열악한 도로 환경이 양보를 만들어 냈다는 걸 운전이 쌓여갈수록 알게 되었다. 그것은 양보가 아니라 양해였다.

 도로 양쪽에 노상주차나 개구리 주차를 합법적인 주차라인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이름만 양방향 1차선이지 실질적으로는 일방통행에 가까운 게 도로 실정이었다. 몇 백 년 된 건물이니 -테라스드 하우스(Terraced House)는 시골에서 런던으로 몰려온 산업 노동자들을 위한 집이었으니 최소 산업혁명 시대인 것이다- 주차공간을 마련해서 지었을 리가 없고, 차를 머리에 이고 살지언정, 있으나 마나 할 정도로 작은 가든을 없앨 리 없는 영국인들이었다. 되려 가끔 정원을 없애고 주차를 하고 있는 테라스드 하우스들을 보면 팍팍하게 느껴지고 저 집에 살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드는 게 영국 환경이다. 한국이었다면 진작에 가든을 없애고 주차공간을 만들었거나, 그마저도 밀어버리고 도로를 확장했겠지만.

 차량이 많지 않은 킹스턴도 출근과 등교 시간에는 그 좁디좁은 도로로 차가 다 쏟아져 나와 불통이 된다. 지각하겠다 싶은 마음으로 라운드 어바웃에 멈춰 서서는,  길 건너 차량이 빠지기만을 기대하며 뚫어져라 차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면 놀라운 움직임이 포착된다. 분명 앞에 차가 빠졌는데도 꼬리 물기는커녕, 빈자리가 생겼는데도 라운드 어바웃을 건너지 않고 맞은편 차가 오도록 기다리고 있다. 두 세대 빠지고 나면 그다음 차는 주차 공간 사이 틈으로 들어가 반대편 차량이 갈 수 있도록 양보를 한다. 만약, 그 마지막 차가 멈춰 서지 않고 앞차에 꼬릴 물었다면 반대편 차가 빠지지 못했을 것이고, 뒤차가 실정을 모르고 따라 들어오게 되면 양방향 차량 모두 꼼짝도 못 하고 발이 묶이게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래서 영국 사람들은 전방위적으로 교통 사정을 살피며 운전하지 않을 수가 없고 파악이 안 되더라도 무리하게 욕심내어 빨리 가려하지 않아야 순리대로 나도 갈 수 있는 상황이 온다는 것을 몸으로 알고 있다.

차 한대에 딱맞아 보이는 이 길이 양방향 1차선이다. 주차된 차량 사이사이 간간이 보이는 공백에서 맞은 편 차량과 교차해서 지나가냐 한다.

 때때로 마주 오던 두 차량이 순간적으로 서로 망설이며 양보를 하고 있는 상황이 심심찮게 생긴다. 그럴 때면 한쪽 차량이 헤드라이트를 반짝이며 여기 공간이 있으니 네가 먼저 오라는 신호를 해준다. 상대방 차량은 고맙다고 헤트라이트를 두 번 반짝이며 예의 상 쏜살같이 달려가 빠져나가 준다. 그렇게 도로 위의 운전자들은 열악한 도로사정을 함께 해결해나가는 동지가 된다. 이미 양해에 대한 답례로 하이빔을 두번 쏘았지만, 가까워지면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인사하는 것이 영국인들의 마음이자 매너이다.


 운전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거리를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충족되는 곳이었다. 물론, 런던 시내는 좀 다르다. 런던 서남부 유난히 평화로운 주거지인 킹스턴은 긴장감을 갖고 걸어야 하는 런던 시내와는 달리 몇십 미터 안 되는 도보거리에서도 몇 번쯤 미소 머금은 "Thank you"를 들을 수 있다. 도로만 좁은 것이 아니라 보행로도 좁아서 양방향으로 지나가기 어렵고 유모차가 지나가기는 더 어렵다. 그래서 누군가가 지나가려면 누군가는 비켜서야 하는 일이 다반사다. 그렇게 먼저 비켜주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것이 영국인 특유의 평화롭고 커다란 미소와 Thank you이다. 이것이 런던 외곽에 사는 행복감이랄까.

 영국이 살만하다면, 그건 부자나라라서, 개인이 부자라서가 아니다. 서민 개개인은 오히려 한국보다 소박하고 가난한 것에 익숙하다. 하지만, 거리거리에서 만나는 그런 사소한 행동들로 마음 각박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살만한 이유이다.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모습은 그다지 흔하지 않기에 서양인들도 영국인들을 젠틀하다고 하나보다. 그래서 영국에서 유럽으로 해외여행을 하고 히드로 공항에 들어서면 긴장감이 풀리고 이제 이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매너로 행동할 것인지 알기 때문에 마음이 보들보들 노곤노곤해지곤 했다.


 한국에 돌아와 가장 아쉬운 점이, 하루 동안 길거리를 걷고 운전을 하며 서로 주고받던 배려만큼 어깨에 소복이 내려앉았던 행복 먼지를 고스란히 집안으로 함께 가져와 소파에 몸을 기대었던, 그 사소한 행복을 조금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길거리를 걸을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고 규칙과 규율은 분명하지만 공격적인 상호관계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에 언제쯤 적응이 될까 싶다. 영국에 물들며 한국적 일상의 기본적인 매운맛마저 잃어버려 일상의 피로도가 높고 기초 생존력이 급감하고 말다니.


 언젠간, 지하철 몇 번째 칸에서 내리면 바로 계단으로 연결되어 최단 시간 내에 회사에 도착할 수 있는지 아는 누구보다 효율적이었던 한국인이 다시 되겠지. 괜찮다면 사양하고 싶은 효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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