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인천공항의 햇살은 낯설었다. 공기는 깨질 듯 차가웠다.
사흘 연속 영하 15도를 찍던, 추워서 떨리는 지 두려워서 떨리는 지 헷갈리던 어느 겨울 새벽 6시.
사십년 째 인생초보인 직장맘이 '내가 좀 살아봤잖아'를 시전하는 인생 7년차와 단둘이.
영국에 대한 무지가 가득 실린 4개의 캐리어를 끌고 떠났던 영국 생활은
그렇게 2년이라는 동그라미를 그리곤, 다시 그 겨울에 도착했다.
영국에서 돌아와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유럽 여행 많이 다니셨어요?"였다. 어떤 무용담이라도 늘어놓아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생긴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의 한국인 주재원들은 숨겨놓은 희귀 포켓몬을 잡듯, 구글 지도에 새빨간 공이 다닥다닥 붙도록 여행을 다니기도 한다.
한국 주재원들은 영국에서도 부르주아급이다. 영국 서민들도 바다 건너 값비싼 유럽 여행을 가는 것은, 서울에서 강화도 가듯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직장맘이 아이와 둘이 살며 여행을 다닌다는 것은 여행보다는 고행에 가까운 게 틀림없고, 살림하기에 빠듯한 런던 서민일 뿐이었다. 그저 영국인들이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을 위해 주로 찾는 곳들을 바지런히 다녔다.
영국에서 살아봤다고
다 아는 척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돌아오는 날까지 물음표를 확인하며 살아왔다.
그 물음표는 그곳에 정착해야 할지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기에 매우 절실한 일이었다. 누구나처럼 ‘영국 이민 가면 교육 헬조선 드디어 탈출!!’인 건지 가장 궁금했고, ‘내 아이만큼은 영국 원어민처럼!되려면 대체 뭘 시키면 되는 건지’, ‘행정 교본같이 여겨지는 영국에서는 내 집 마련 걱정 제로!?’인 건지, ‘공공의료 성공신화 영국의 의료는 판타스틱한 지??’, ‘젠틀한 영국 영어, 1-2년만 살면 늙은 나도 장착할 수 있는지?’, ‘영국에 장단기 머무르면 뭘 꼭 해야, 금 같은 시간도, 진짜 금도 안 아까운 건지?’ 나도 이 모든 게 궁금했다.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만났던 분들을 통해 알게 된 건, 유학생활을 해도, 주재원으로 그곳에서 4-5년씩 일하며 살아도, 어쩌면 이민을 가서 몇십 년을 살아도 온전히 그곳 사람들처럼 살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유학생은 학교 생활, 학생으로 서바이벌하는 노하우, 그들의 향유 문화만큼은 빠삭하겠고, 주재원들은 여행부터, 주재원 전업맘 사회의 생활과 그들만의 자녀 교육 노하우까지 영국인들보다 전문가 수준이겠다. 제각기 각자의 조건에서 최대한의 경험을 하는 것일뿐,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도 살아보고서야 알았다.
하지만
겉돌다 오고 싶지는 않았다.
가장 보통의 영국인처럼 살아보고 싶었다.
Outer 런던의 어느 평화로운 마을에서
영국인처럼 일하고
열심히 아이를 키우는 그런 것.
그들이 하는 것은 편견 없이 바라보고, 어색해서 그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증발해버렸으면 싶더라도 웬만하면 다 따라 해 보는 것. 그다음에 해석하는 것. 그래서 마지막엔 머리보다 몸이 먼저 이해하는 것.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 순간 아무것도 모르던 영린이를 벗어나, 반항기 가득한 사춘기 청소년처럼 울분을 터뜨리며 속으로 진창 욕을 하기도 했던 때도 있었다. 30분 만에 갈 길을 2시간 동안 돌아가며 "이런 개인의 기본권 씹어먹는 부르주아 중심의 멍텅구리 시스템 같으니라고"하면서 말이다.
아마, 주영한국대사관말의 말처럼 '유일하게 영국 구청에서 일해본 한국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들어가 보지 않았던, 보통의 사회 틀을 운영하는 런던의 구청 깊숙이 섞여 들어가 영국 사회를 보고, 가장 보통의 영국 삶을 살며 썼던 글들에 대해 2년 만에 도착한 편지처럼 답해본다.
그 멍텅구리 같음에도, 아니 그 멍텅구리 같음이 그리운 영국에 대해...
- 영국 정착을 위해 두려움과 설렘을 안고 버둥거리는 모든 이들을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