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살이병은 되물림이었다. 평생 유럽살이 앓이를 하였던 엄마의 애환은 마치 나의 DNA에 새겨지기라도 한 듯 모태 앓이가 되었다. 인생의 미결 숙제처럼 늘.
그 본격적인 영국행의 시작은,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던 날로부터 2년 전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연히 읽게 된 '일곱 살 여행'이라는 책을 덮으며, '아이 초등학교를 입학 전에 나도 저런 멋진 인생 경험을 아이에게 줄 수 있을까...'라는 콩알만 한 희망을 가슴에 묻었다.
유럽에 살고 싶다.
그런데, 할 줄 아는 외국어가 20년 전에 그만둔 수험 영어뿐이네?
영문권=영국
그런 아메바 같은 단순 로직이 그 시작이었다. 가진 게 없는 집에서 할 수 있는 건 뼈를 갈아 넣는 노력으로 공부해서 대학 가는 게 내 학창 시절의 전부였다. 그러니 제2 외국어는커녕 영어조차 백색 소음일 뿐이니 유럽에 가서 살아보고 싶다면 그나마 선택지는 영국 딱 하나였던 것이다.
히드로 공항의 낯선 냄새.. 낯선 빛깔.. 낯선 브랜드 상점들... 이국적이기 그지없던 히드로... 지금도 그 강렬한 대비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지금처럼 자동입국 심사가 되기 전이었던지라, 2시간은 우습도록 기다리는 게 유명한 히드로 입국심사를 기다리며 EU 입국심사에서 쑥쑥 지나가는 유럽인들이 부러울 뿐이었다. 타국 살이 하다 보면, 근거도 없이 뻑하면 '인종차별 의심병'이 훅 올라오는데 바로 입국심사가 그 1번이었다.
몇 안되는 자동입국 국가에
우리나라도 포함된다는 뉴스를 접하던 날
가슴이 뻐근해졌더랬다.
그런 히드로 공항이, 머지않은 훗날 안도감을 주는 곳이 될 줄, 도착하던 그날은 몰랐다. 유럽을 나갔다 돌아올 때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익숙한 영국 발음과.. 익숙한 냄새.. 익숙하고도 안전한 느림.. 입국 심사 대가 멀리 보일 때부터 그 안도감에 마음과 몸이 풀리는 그런 곳이 되었다. 어디든 내 집이 있는 곳이면 그럴 수도 있지만, 영국은 한번 살았던 사람은 다시 살고 싶어 하는 곳이라는, 그리고 런던 인구의 50%가 이민족이라는 건 단순히 내 거처가 거기 있어서만은 아닌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한인 택시에 올라타고 인종차별 의심병이 차오르던 히드로 공항을 뒤로하고서야 한숨을 돌렸다. 그제야 차 창 밖이 내다 보였다. 그 모습은 유럽 본토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간판에 쓰이는 글자체와 색감이 프랑스와는 달리 볼드하고 원색적이었다. 그 투박한 맛은 존 에프 케네디 공항에서 뉴욕으로 이동할 때 보았던 바로 그 미국맛이었다. '역시 영국은 미국과 가깝구나'생각했다. 나중엔 일본과 우리나라 같은 묘한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30분 남짓 지나니, 파랗게 어둠이 내린 영국의 도시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직관적으로 보스턴을 떠올리게 했다. 미국 여행에서 가장 사랑했던 그 보스턴. 뉴욕에 비해 정적이면서 안정된 느낌, 오래된 타운하우스형 주택들이 낭만적으로 늘어서 있던, 2개의 싸구려 캐리어가 그 고즈넉한 평화를 요란하게 깨뜨렸던 그 마을. 지금도 보스턴을 떠올리면 가슴이 뛴다.
그도 그럴 것이, 보스턴은 17-18세기 영국 청교도가 건너가 영국 식민지를 건설했던 초창기 미국 도시로, 보스턴 차 사건이라던지 영국의 영향 아래 미국과 영국 간 미묘한 힘겨루기의 장이었다. 15세기 튜도시대 건물부터 빅토리안 양식까지, 박물관 같은 건물들에서 진짜 사람들이 흔하게 걸어 나오는 Outer 런던에 들어섰으니 시공간 착각이 일어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는 지도 모른다.
우버를 부를 수도 있었겠지만 한인 택시에 몸을 실었을 때 그 안도감을 생각하면 한인택시를 탄 것이 감사했다. 한인택시에 올라 긴장을 내려놓고 기사님께서 들려주는 자동차 구매, 운전 기본 꿀팁, 살게될 동네 이야기, 학군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조용한 런던 시골 킹스턴 한 구석, 쪼로롱 새가 지저귀는 에어비엔비에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 맞았던 평화로운 풍경 뒤로 닥쳐올 정착 폭풍을 그때는 실감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