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오랜턴 호박 깎기 in 런던 내셔널 트러스트 모던홀파

시시소소한 영국인들의 Outing 따라잡기(1)

by Scribblie

2년도 습관이라고, 할로윈이 다가왔는데 호박을 깎지 않고 가만있자니 손끝이 심심하여 늙은 호박을 샀다.

호박을 깎을 허접한 미니톱을 사는 게 그렇게 어려울 줄이야. 대부분 중국에서 오는 해외직구라 이제사 사자니 11월이 훌쩍 지나서야 도착한다고 했다. 어렵사리 뜻하지 않게 고가의 조각도를 사서 햇빛 따숩게 받았던 호박을 여니 콩나물이 자라고 있었다.


영국에서 보통 할로윈이 있는 10월의 마지막 주는 하프텀(짧은 방학)이다. 날씨가 예쁜 때이니 바다 건너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주변 한국 사람들도 꽤 있었다. 우리는 아이와 단 둘이 하는 타지 생활이었기에 더 쉬이 지쳤고 임계에 다다르고 있다 싶을 때쯤 늘 하프텀이 우리를 구제했기에 단 2-3일이라도 집에 박혀 치유의 시간을 가지곤 했다. 그렇기에 가을 하프텀에 하루 호박을 깎으러 가는 게 큰 이벤트였다. 소소한 것을 크게 기뻐하는 영국인들처럼.


영국에서는 할로윈이 되면 여기저기에서 호박 깎기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 잭오랜턴(Jack-O-Lantern)이라 부르는 호박등이다. 근처 농장에서 여러 개 사다 집에서 깎아 대문 앞과 담장에 주렁주렁 전시한다면 멋지겠지만, 플랏(아파트 개념의 주거 형태)에 살았던 우리는 매해 호박 깎기(Pumpkin Carving) 행사가 열리는 Morden Hall Park에 가서 소박하게 하나 깎아다 집안에서 불을 밝혔다.

살짝쿵 바보같이 사랑스러운 잭오랜턴 @2019, Morden Hall Park


첫 해에는 무슨 행사든 재료가 떨어진다는 걸 경험할 수 없는 차질 없이 빵빵하게 준비하는 한국만 생각하고 느긋한 오후에 갔는데 다행스럽게도 마지막 호박을 거머쥐었고, 우리 뒤로 오는 사람들은 맨 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그다음 해에는 서둘러 가서 잔뜩 쌓인 호박 중에 탐탁한 녀석을 골라 깎고 간단한 점심도 먹었더랬다.


잭오랜턴 만드는 행사장 입구 @2019, Morden Hall Park


도착해서 National Trust에 가입하라는 회유를 살짝쿵 지나치고 행사장 입구에서 4파운드를 내고 호박을 고르면 친절한 직원이 호들갑을 떨며 좋은 호박을 골랐다고 너스레를 떨어준다. 몇개의 도안 중 하나를 고르면 깎는 도구를 준다. 도안을 대고 먼저 호박에 돌기가 있는 룰러로 밑그림을 그리고, 장난감 같은 미니톱으로 뚜껑을 따낸 후 호박죽을 끓일 때처럼 속을 싹싹 긁어낸다. 이제 본격적으로 도안을 따라 싹싹 싹싹, 눈, 코, 입을 파는 건 아이의 몫이다.

호박깎는 행사장 내부 전경(좌), 미니톱으로 호박깎기(우)


호박 깎는 것이 끝나면 아이들을 위해 마련된 소소한 활동을 즐겨볼 수 있는데, 그중에도 지푸라기 미로는 추수의 계절을 물씬 느낄 수 있다. 참 사소한 것에도 한껏 행복한 영국 아이들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보너스다.


지푸라기 미로 @2019, Morden Hall Park


호박을 깎는 건 꼭 모던홀파크 같은 공원이 아니라도 아이 학교에서 보내주는 동네 소식지 같은 걸 잘 살펴보거나 대형 마트의 깜짝 이벤트 같은 것에서도 소소하게 행사를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프텀 기간 중 모던홀파크 행사 소식지




모던역(Morden Station)에서 도보 8분 거리에 있는, Modern Hall Park는 18세기에 완들강(River Wandle)의 수력을 이용한 방앗간에서 시작된다. 지금도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이후 19세기 유행했던 담배 공장이 되기도 했고, 웨스터민스터 사원의 소유로 옮겨갔다가 20세기에 문을 닫았지만 1941년 National Trust의 기부로 지역 커뮤니티 공간으로 재탄생한다. 현재는 이스터,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등 때마다 각양각색의 가든 용품과 모종을 파는 가든센터, 티하우스, 스낵바, 북샵, 작은 갤러리가 모던홀의 타고난 아름다움 위에 살포시 얹혀 있고 철마다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An autumn view of the snuff mill on the river Wandle @Modern Hall Park Website

타고난 아름다움 위에 얹혀있다고 콕 짚어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다. 기본적으로 모던홀 부지가 갖고 있는 자연 지형이 다채롭고 작은 강을 끼고 있어 자연 그대로의 조경적 구성이 영국의 보통 공원들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호박을 깎으러 갔던 모덜홀의 노오란 가을 풍경은, 어릴 적 주말의 영화에서 보고 잊지 못했던 1972년 스웨덴 영화 「엘비라 마디간」의 나비처럼 가벼운 노오란 미장센을 떠오르게 한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아롱아롱 마음을 밝게 물들인다.

엘비라 마디간을 떠올리게 하는, 부서지는 노오란 가을 풍경
와들강을 끼고 있는 모던홀파크(좌), 작은 개울을 지나는 귀여운 다리에 걸터앉아도 보아요(우)

연인끼리, 아이와 함께, 혼자이면 혼자라서 더 좋은 곳, 모던홀파크, 꼭 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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