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서니 Aug 03. 2024

인생의 양감을 키우는 도구

어찌 이리 부피감이 작을 수 있는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우울해하는 것은 내 인생에 양감이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
- 양귀자 <모순> 13p


유명한 문장입니다.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저 문장을 읽자마자 알았습니다. 이 책은 나의 인생책이 되겠구나.

네 장 정도 넘기면 나오는 문장이므로, 거의 펼치자마자 인생책이 된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저의 인생을 아주 정확하게 함의한 문장이었기 때문이지요.


왜 저 문장에 공감했을까요?

조금만 과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0대 시절엔 대학을 잘 가는 일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아, 공부를 열심히 한 건 아니었습니다.

‘대학에 모든 걸 걸었다’ 할 만큼 공부에 매진했다기보다는 입시 준비 말고는 행동의 당위가 없었다는 것이 맞겠지요.

학교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유일한 이유가 ‘대학’이었다는 뜻입니다.


20대가 되어서는 ‘연봉 높은 기업’을 목적지로 삼고 행동합니다.

인맥관리 스펙 쌓기 등이 그 일환이었지요.

1분 1초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자기 계발서와 토익책이 항상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는 시절이었습니다.

그게 맞다고 따랐습니다. 의심하지 않았어요.



그 값을 지금 치르고 있는 걸까요.


인생의 깊이는 좋은 대학, 대기업, 높은 연봉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로 다져가야 하는 것인데 그 어디에도 저는 없었지요.



이십 대란 나이는 무언가에게 사로잡히기 위해 존재하는 시간대다.
(…) 사로잡힐 수 있어야 인생의 부피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이다.
- 양귀자 <모순> 15p


무언가에 사로잡힌 적이 있던가? 곰곰이 떠올려 봅니다.

스쳐가는 한두 가지가 있으나, 그리 강력하진 않습니다.

사로잡히기 위해서는 내가 매료될 ‘무언가’를 알아야 하는데, 나에 대해 깊게 사색한 적 없으니 그것이 가능했을 리 없습니다.


누군가 '그렇다더라' 하는 말에 인생을 맡긴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지요.

생의 빈곤함은, 성찰과 고민 없이 인생을 편히 외주화 한 대가였습니다.


뒤늦게나마 그 빈곤함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펜을 들었습니다.

정확히는 키보드지요.

타이핑할 때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타닥타닥 ... 타닥타닥 ... 다시 타닥타닥


글 사이, 공백 사이에 무언가 촘촘히 지어지는 소리입니다.

손끝으로 누른 자음과 모음이 결합해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고, 생각을 담은 화분이 되는 것이지요.


그 화분에 담는 건 주로 이런 겁니다.


내가 무엇에 관해 자주 쓰는지, 무엇을 힘들어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작년 이맘때의 기쁨은 무엇이었는지

고된 일은 어떻게 이겨냈는지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어떤 것인지, 무엇이 변하는 것인지

어떤 결을 가진 사람인지

계절의 변화를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갓 구운 빵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새롭게 알게 된 감정은 무엇이고

추상적이었던 개념에서 구체적인 개념이 된 건 무엇인지, 그 계기는 무엇인지 등


두서없이 나열했지만, 나름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의식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생각들이라는 것.

관성적으로 살아가는, 권태로운 시간에는 떠올릴 수 없는 생각들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뇌는,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가장 빠르게 도착하는 고속도로 같은 길만 갑니다.

그에 반해 글쓰기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가는 행위이지요.

덕분에 평소에 접할 수 없는 것을 보고, 듣고, 감상하는 경험을 합니다.

감각, 감정, 생각 모든 것이 활성화됨으로써 순간이 풍요로워지는 것이지요.


실제 연구에서도 ‘풍요로운 삶’에 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미국 버지니아대 연구진이 최근 미국심리학회가 발행하는 ‘심리학 리뷰’(Psychological Review)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마음이 풍요로운 삶이란 ‘관점의 변화를 동반하는 참신하고 다채로운 경험’으로 가득 찬 삶을 말한다. 예컨대 해외유학은 대학생들이 흔히 자신의 삶에서 심리적 풍요를 경험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유학을 통해 낯선 나라의 관습과 역사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서, 유학생들은 모국 사회와 문화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새로운 경력을 시작하고 도전적인 예술에 몰입하는 것, 학습, 창작, 돌봄 등도 심리적 풍요를 더해주는 경험들이다.
새로운 경험들이 꼭 재밌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업, 자연재해처럼 견디기 힘들고 불편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험들조차도 자신과 주변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연구진은 주장했다. (...) 불편한 경험이라도 경험을 하는 것 자체에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관점의 변화, 참신, 다채로움‘풍요로운 삶’의 요소인 겁니다.

관성, 권태와 정반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글을 쓰다 보면

질문을 던지며 이전에 하지 않았던 생각을 하게 되고, 주제를 다각도로 보게 되고, 관점을 달리할 수 있게 됩니다.

평면적이던 삶에 입체감이 생기고, 부피감이 더해지지요.




글쓰기는, 2D그림책이 팝업북이 되는 것


앞에서 소개한 <모순> 속 문장에 밑줄을 그은 사람이라면,

인생의 빈곤함을 채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펜을 드세요. 그리고 뭐라도 쓰는 겁니다.


부피감 빈약한 내 인생,

하루이틀 쓰다 보면 미세하더라도 분명 부풀어 오르겠지요.

그러다 보면 겨자씨는 물론이고, 복숭아 씨도 심을 수 있을 만큼 두툼한 토양이 되어있을 겁니다.





[글쓰기 단상, 또 다른 글]










매거진의 이전글 일상에서 복리의 마법 경험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