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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니 Sep 01. 2024

이렇게나 삶에 가까울 수 있나

박완서 <그 남자네 집>

박완서 작가의 소설을 꼭 읽어보고 싶었다. 여기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박완서 작가의 문장은 그녀의 책이 아닌 다른 글에서 인용의 형태로 만났는데, 그때마다 박완서 작가의 문장처럼 소설도 맑을 것만 같았다. 그게 끌린 이유라면 이유겠다. 이 막연한 느낌은, 환하게 웃고 있는 작가의 말간 얼굴을 통해 짙어졌다. 




이상과 현실


실제와 예상은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다. 티끌 한 톨 없는 맑음이라기보다는 삶을 투명하게 내보이는 맑음이랄까. 아마 자전소설이라는 점도 이 감상에 한몫했을 것이다. 어디까지 사실인지 알 수 없으나 그럼에도 글이 무척 솔직하다는 것을 느꼈다. 주인공의 내면은 꾸밈이 없었다. 이는 <모순>의 주인공 안진진을 떠오르게 했다. 권태와 무의미를 못 견뎌 하는 모습이, 마음 가는 사람 대신 내 한 몸 책임져줄 수 있는 남자를 선택한 모습이. 이상이 아닌 현실을 택함으로써, 인생은 모순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은근히 드러낸다. 


그렇다면 모순적 선택을 하게 만든 그것, 이상과 현실은 어째서 양립할 수 없는가. 어째서 함께 갈 수 없는가. 함께할 수 없기에 ‘이상’이고 ‘현실’인 것인가. ‘이상’은 ‘현실적이지 않아야’ 성립되기 때문인가. 이상의 사전적 의미는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장 완전하다고 여겨지는 상태’인데, 현실은 불완전하기에 둘은 대립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불완전한 현실이, 완전한 이상을 만들어낸 것이라면 모로 보나 공존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의미와 무의미 


우리 삶은 의미와 무의미, 이 두 가지가 전부다. 의미가 있거나, 없거나. 


인간은 

(존재하나 발견되지 않은) 의미를 찾기도 하고,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의미의 존재에 대한 전제만 다를 뿐, 의미를 구한다는 행위는 동일하다.

구하려는 의미는, 외부 환경과 맞닥뜨릴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티브이로 내셔널지오그래픽을 보다가 오랫동안 궁금했던 것의 해답을 얻은 것처럼 느낀 적이 있는데 그것도 거기 정말 정답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줄곧 답을 구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서 보여준 건 새들이 짝을 구하는 방법이었다. (…) 수컷은 청청한 잎이 달린 단단한 가지를 물어다가 견고하고 네모난 집을 짓고, 드나들 수 있는 홍예문도 내고.
빨갛고 노란 꽃가지를 물어다가 실내 장식까지 하는 것이었다. 암놈은 요기조기 집 구경을 하고 나서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집을 골라잡기만 하면 짝짓기가 이루어진다.
그래, 그때 난 새대가리였구나.
그게 내가 벼락 치듯 깨달은 정답이었다. 나는 작아도 좋으니 하자 없이 탄탄하고 안전한 집에서 알콩달콩 새끼 까고 살고 싶었다. 그 남자네 집도, 우리 집도 사방이 비 새고 금가 조만간 무너져 내릴 집이었다. 도저히 새끼를 깔 수 없는 만신창이의 집,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 새끼를 위해 그런 집은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p.101



(*스포주의)



그 남자 현보는 뇌 수술을 받고 실명한다. 그의 뇌에서 나온 벌레를 보며 주인공은 몸서리친다. 


그것이 다 벌레의 짓이었을까. 내 젊음을 황홀하게 빛낸 그 기쁨의 시간은 다 벌레의 선물이었을까. 설마 처음부터 끝까지 다는 아니겠지. 그렇다면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우리들의 시간이고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벌레들의 시간이었을까. 오직 그 생각만 하면서 집까지 왔다. 나에겐 전쟁터가 중요한 것보다 그게 중요했다. 
- p.200


내가 사랑이라고 믿은 건 도덕적인 사랑이는 부도덕한 사랑이든 죄다 벌레들의 짓이었구나 생각하며.
- p. 223


인간의 세상은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아니, 인간에게는 의미가 전부인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랑에 빠진 여인이 새대가리가 되고, 아름답던 시간이 벌레의 선물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의미가 자라지 않는 곳은, 무의미가 파고들어 좀먹는다.


먹는 일에만 신경을 쓰고 사는 집안에 대한 이질감은 점점 혐오감으로 변했다. 
- p. 124


내가 정말 이상해하는 건 시어머니가 아니라 삶의 즐거움이 오로지 먹는 일에 달린 것 같은 이들 가족인지도 몰랐다. 나를 빼놓은 가족은 두 식구밖에 안 되었지만 그들에 대한 이질감을 느낄 때마다 이 집 식구들은 참 이상해, 라고 나는 쏙 빠지곤 했다. 그러나 동네 구멍가게에서 외상장부를 긋는 동안 사는 것이 재미없어지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 p. 126


눈을 감아도 눈꺼풀을 뚫고 봄의 화사함이 느껴지는 날이었다. 완전한 암흑이란 어떤 것일까. 가장귀를 거의 남기지 않고 전지해 놓은 가로수는 가지 끝이 너무 뭉툭해서 움틀 것 같지 않은데도 빛은 그 끄트머리를 열심히 간질이고 있는 것까지 내 눈에는 보인다. 발밑 양회바닥의 균열에 고인 흙을 밀고 올라오는 초록빛 풀끝도.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보고도 그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본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앞으로 보긴 보아도 아무것도 못 느낄 것 같았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고 생각했지만 그 무의미는 또 어찌 견딜 것인가 
- p. 194


 무지나 호기심의 결여를 경멸해왔다. 
- p. 236


작년의 세시기와 금년의 세시기는 정확하게 일치했다. 계속되는 반복은 지루하면서도 십 년이 일 년처럼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도대체 난 뭐하고 그 수많은 날을 보냈나. 그런 생각은 문득문득 나를 사무치게 했다. 
- p. 274


이 무의미에 관한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주인공의 관점으로 뿜어낸 혐오는 나 자신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극 중에 언급된 혐오의 상태가 나의 상태가 되었을 때. 


20대 초반까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지. 사실 무의미한 시간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꿈도, 목표도, 야망도, 독기도, 의욕도 없던 시절.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살았다. 아무에게도 말은 안 했지만 지독하게 무료하고, 미친 듯이 따분했다. 이렇게 지루할 수 있을까. 그때 처음 삶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 의미도 없는 왜 살아 있는 거지? 살아 있다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길래? 왜 죽지 않는 거지? 


막연한 끌림으로 아무 책이나 집어 들어, 잡식하듯 읽었다. 이 지독한 무의미를 의미로 바꿔준 건 문학이었다. 나의 고통이 무의미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내 나름의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것, 그것을 찾아가게 도와준 것은 문학이었다. 인생이 꼭 이치에 맞게 흘러가는 건 아니라 말해주고(<모순>), 사람은 의미로 시간을 기워가며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그 남자네 집>) 방식으로 말이다.



인생을 쏙 빼닮은 글


거장답게 허투루 볼 문장과 단어가 없었다.


선생은 정확히 네 문장을 더 적는다.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첫사랑이었던 ‘그 남자’가 이 네 문장과 더불어, 언젠가는 졸업해야 하는 ‘학교’가 되면서, 소설에서 퇴장하고 만다. 대가의 문장이다. 이별을 고하는 자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불가피한 자기합리화의 양상을 세 개의 단문과 잔인하리만큼 정확한 비유 하나로 장악한다. 비유란 이런 것이다.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p.131


신형철 평론가의 말처럼, 정확했다. 책 곳곳에 있는 양상을 장악하는 비유는, 무심코 읽다가 그 정확함에 흠칫하게 한다. 


책을 읽을 때, 모르는 단어나 수집하고 싶은 단어가 생기면 사전을 이용하는 편인데

사전 예문에서 박완서 작가의 문장을 적지 않게 만났다. 그만큼 좋은 문장과 단어를 쓰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박완서 작가의 문장은 실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단어는 가까이 두고 싶은 것들이다. 

왠지 모르게 글도 삶에 되게 가깝다. 판타스틱한 SF보다, 기상천외한 서사가 없더라도 현실에 가까운 문학에 더 끌리는 타입이라 그런지, 이런 글에 마음이 간다. 아마 나 같은 사람이 많아서, 박완서 작가의 책이 많이 읽히는 게 아닐까. 



+) 그 시절의 밈


다림질할 필요도, 풀을 먹일 필요도 없는 이 환상적인 섬유는 어쩌나 인기가 좋은지 먹을 것도 때깔 좋고 맛 좋으면 다 나일론 자를 붙였다. 나일론 수박, 나일론 참외, 나일론 감자, 하는 식이었다.
- p.164


ㅋㅋㅋㅋ재미있었던 대목.

요즘 ‘개’ ‘핵’ 같은 그 시절의 밈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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