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상실, 인간성 -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2024.11

by 김서니

삼십 넘게 살면서 이렇다 할 큰 굴곡이 없었다. 상처가 될 만한 큰 상실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런저런 이별들은 많았지만, 지나간 일에 미련을 두지 않는 성격 덕에

손가락 사이로 무언가 빠져나가도 그냥 보내주자, 하는 주의 덕에 붙잡고 있는 건 없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놓지 못한 기억이 있다.


사회 초년생 때 만나 동료에서 친구가 된 이와의 관계.

관계가 끊어진 것에 대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보고 싶고

만약 그때 그랬다면, 가정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관계지향적이지도 않은 내가 대체 왜?

그 관계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특히 요즘 그런 생각을 한다.

인간은 오롯이 혼자 존재할 수 없고, 주변과 맺은 관계와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것을.

살면서 만나온 수많은 사람으로 내가 구성되어있다는 것을.


언젠가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법’에 관해 신형철 평론가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 <나란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진정한 나를 찾느라 번민하는 이들, 혹은 너무 많은 나 앞에서 자신을 위선자라 자학하는 이들에게, 이 일본 소설가는 그냥 우리에게 여러 개의 나가 있음을 인정하는 편이 낫다고 조언한다. ‘나'란 나눌 수 없는 ‘개인'이 아니라 여러 개의 나, 즉 ‘분인'들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러 사람을 언제나 똑같은 ‘나'로서 만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누군가와 반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다보면 그 앞에서만 작동하는 나의 어떤 패턴(즉, 분인)이 생긴다는 것. ‘나'란 바로 그런 분인들의 집합이라는 것.

(…)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죽을 때 나 중에 가장 중요한 나도 죽는다. 너의 장례식은 언제나 나의 장례식이다. (…)

이런 말을 덧붙이자.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는 말했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 이 말과 비슷한 충격을 안긴 것이 히라노 게이치로의 다음 말이었다.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끼리의 연결을 파괴하는 짓이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가. 누구도 단 한 사람만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살인은 언제나 연쇄살인이기 때문이다. 저 말들 덕분에 나는 비로소 ‘죽음을 세는 법'을 알게 됐다. 죽음을 셀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도의 출발이라는 것도.

- <인생의 역사> 中


그러므로 죽은 사람과 관계 맺은 이들이 살아있다면, 그 죽음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중에서도 유독 그 죽음이 오래 진행 중인 경우가 있다.

슬프지 않은 죽음, 사연없는 죽음이 어디 있겠냐만

유독 가슴에 사무치고 한이 맺혀 남은 사람의 가슴을 파내어버리는, 그런 종류의 죽음이 있다.


사고, 우연, 사건과는 다른 거대 세력에 짓밟힌 폭력적인 죽음.

누군의 잇속을 위해 죽어야 하는, 소위 개죽음이라 불리는 그런 것.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대표적 학살 세 가지를 꼽자면 (내 기준) 광주민주화운동이 있고, 여순 사건이 있으며, 제주 4.3사건이 있다.

(사실 세 개만 꼽아서 그렇지, 그외에도 수없는 죽음이 너무도 많다.)


그런 죽음의 과정이 순탄했을 리 없다. 그 고통은 살아남은 유족에게까지 이어져, 현재 진행형이다.






제주 4.3사건을 다루고 있는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인선이 그렇고 그의 엄마가 그렇다. 더 나아가 인선과 관계 맺은 경하에게까지도 뜨거운 불길이, 차가운 눈보라가 미친다.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사람이 엄마라고 생각했어.
허깨비.
살아서 이미 유령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 삼 년 동안 대구 실종 재소자 제주 유족회가 정기적으로 그 광산을 방문했다는 걸 나는 몰랐어.
엄마가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그때 엄마 나이가 일흔들에서 일흔넷, 무릎 관절염이 악화되던 때야.
(...)
유족회에서 가장 열정적인 멤버가 엄마였다고, 제주에선 아무도 생각 못했던 1960년에 이미 경산에 다녀온 사람이었다고 말했어.
진주 이송자 명부 사본을 대구형무소에 요청하자는 의견도 엄마가 낸 거였다고. 승합차를 대절해 다 같이 항의방문을 하고서야 명부가 나왔다고, 회원들이 찾는 가족들의 이름을 엄마가 일일이 찾아내 유해가 묻혀 있을 장소를 추정해줬다고 했어.
p. 288-289

이상하지. 엄마가 사라지면 마침내 내 삶으로 돌아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돌아갈 다리가 끊어지고 없었어. 더이상 내 방으로 기어오는 엄마가 없는데 잠을 잘 수 없었어. 더이상 죽어서 벗어 날 필요가 없는데 계속해서 죽고 싶었어.
p. 314

자료가 쌓여가며 윤곽이 선명해지던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가 변형되는 걸 느꼈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이상 놀 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
p.316


지독한 상실감에 시달리는 이들의 고통은 진행 중일 수밖에 없다.

그 아픔과 헤어질 수 없고

그 기억과 작별할 수 없다.


책에서는 두 가지 상실이 나온다. 하나는, 소중한 이를 잃은 상실.

또 하나는, 사람이길 포기한 이들의 인간성 상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다.

국가, 이념, 이해관계 따위가 어떻게 사람보다 우선할 수 있는지.

그것들이 대체 무엇이길래, 이제 갓 태어난 아이에게 총알을 박아넣게 만드는 건지.

어떻게 그게 가능한 것인지. 사람이, 사람이 아니게 되어야만 그런 짓을 할 수 있게 되는 건지.

‘왜’와 ‘어떻게’와 ‘무엇’에 대해 계속 물었다.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 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었으니까.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때는 순간 적의 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골짜기와 광산과 활주로 아래에서 구슬 무더기와 구멍 뚫린 조그만 두개골들이 발굴될 때까지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고, 아직도 뼈와 뼈들이 뒤섞인 채 묻혀 있어.
그 아이들.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
p.317-318


다 지나간 일이라고, 언제적 일을 갖고 그러냐고, 이제 그만 좀 하라고, 지겹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특히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지나간 일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 중인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니까. 그러니까 최소한, 저런 말은 뱉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리고 번외로 들었던 생각과 감상들.


+) 자매처럼 표현된 인선과 경하. 미완의 그 일을 이모와 엄마에게 넘겨 받은 것처럼 보였다.


+) 책은 검은 나무로 시작해, 검은 나무로 끝난다.


+) 눈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읽는 재미가 있었다. 표현만으로 실감했다 해야 하나

소금, 설탕, 쌀알, 레이스 커튼 등


+) 4.3 사건이라는 주 소재를 표면에 앞세우지 않은 전개 방식으로 느꼈는데.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싶었고, 굉장히 세련되다 느껴졌다


+) 인선의 다큐 영상이 머릿속으로 재생된다. 글로만 읽어도 화면 구도나 씬 구성이 멋질 것 같았다. 그의 다큐를 보고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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