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
책으로 읽고, 손으로 쓰고, 생각날 때마다 열어보고, 글 쓰면서 인용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읽었다.
여러번 읽은 것과 다름 없는데 다시 읽어도 거의 매번 새롭다.
복습하는 지루함이 아닌, 반복해 읽어도 파동을 일으키는 감동 덕분이다.
예를 들면 이런 대목이 그렇다.
(좋은 부분이 너무 많아 고를 수 없어, 당장 책을 펼쳐 눈에 보인 대목을 3~4개를 뽑았다.)
언어가 눈에 띄게 거칠어지거나 진부해지면 삶은 눈에 잘 안 띄게 그와 비슷해진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마음들이 계속 시를 쓰고 읽는다. 시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시가 없으면 안 된다고 믿는 바로 그 마음은 없으면 안 된다.
<시는 없으면 안 되는가> 260p
권력자는 대개 유명인이지만, 유명인이 언제나 권력자인 것은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 나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사람이 권력자라면, 직업의 성격상 대중에게 이름이 알려졌을 뿐인 사람은 유명인이다. 유명인을 향한다고 해서 조롱이 풍자로 변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매체 환경 속에서 실명이 노출된 유명인과 익명의 보호를 받는 네티즌 중에서 누가 더 강자인가. 유명인이라면 감수해야 할 고통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은 가학을 합리화하는 궤변이다.
(…) 그러므로 ‘죽은 노무현’을 풍자할 수는 있어도 ‘노무현의 죽음’을 풍자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 무슨 학문의 자유가 아니라 언어로 행하는 시신 훼손일 뿐이다. 비판은 언제나 가능하다. 풍자는 특정한 때 가능하다. 그러나 조롱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타인을 조롱하면서 느끼는 쾌감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저급한 쾌감이며 거기에 굴복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가장 저열한 존재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 해도 되는 조롱은 없다.
<해도 되는 조롱은 없다> 216p
며칠 전 광주트라우마센터의 초대를 받아 강연을 했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감히 수락한 것은, 내가 부족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물러서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상처와 위로’에 대해 요즘 내가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지를 말하기 위해 갔다. 강연 중에 ‘문학은 나태한 정신을 고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내용의 말을 하다가 잠시 주춤했다. 누군가에게는 아직 살아 있는 현실인 ‘고문’을 비유로 사용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그 순간 처음으로 했다. 계속 공부해야 한다.
<터널 앞에서> 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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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상조라는 말은 듣기에 착잡하다. 당위성과 필요성은 인정하되 실행은 나중으로 미루자는 뜻이다. ‘미루고 싶다’라고 느끼는 사람에는 두 종류가 있을 것이다. 그 계획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은 그 일이 정말 실현되기 위해서라도 조건이 무르익는 때를 기다려야지, 섣불리 밀어붙였다가 일을 그르치기라도 하면 그 실패의 충격이 재기의 기회마저 앗아갈 수 있다고 염려한다. 이 말은 옳다. 문제는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 즉 사실은 그 계획이 실현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가끔 전자의 흉내를 내며 우리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는 일종의 ‘시기상조 리스트’가 있어왔고 지금도 있다. 아직 한국 사회에서 서구식 민주주의는 시기상조다, 일본 문화 개방은 시기상조다, 공무원의 노동조합 가입 허용은 시기상조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시기상조다, 노동자의 경영 참여는 시기상조다, 공교육 현장에서의 체벌은 시기상조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시기상조다…. ‘시기상조의 현대사’를 서술해볼 수 있을 정도다. 이 중에는 이제 시행된 것도 있고, 아직도 ‘시기가 상조하여’ 여전히 제자리인 것들도 있다. 그런데 이런 정책들을 이미 시행하고 있는 나라들은 수도 없이 많으며 놀랍게도 그 나라들은 망하지 않았다.
(…)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인 대한민국은 왜 이같은 관용과 성숙의 지표에서는 44위 안에도 들지 못하는 나라여야 할까. 안타깝게도 이 나라는 물질적 진보 말고 정신적 진보의 수준을 보여주는 거의 모든 지표에서 세계 순위 하위권에 속한다. 그 처지를 벗어나는 일도 아직은 시기상조인가.
<시기상조의 나라> 205p
그리고 특히 요즘 같이 혼란한 때 더 눈에 들어온 글
어떤 사람을 존경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깊이 있는 사람’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게는 한 인간의 깊이 역시 인간 이해의 깊이다. 인간의 무엇을 깊이 이해한다는 것인가. 나는 ‘타인의 고통’이라는 평범한 답을 말할 것이다. 물론 이 대답 역시 진부하게 들린다. 그러나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은 진부해지기는 커녕 날마다 새롭다. 세상에 진부한 고통이란 없으니 저 대답도 진부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투표할 것이다. 깊은 사람에게, 즉 타인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느끼는 사람에게 말이다. 국민과 함께 슬퍼할 줄 몰랐던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보면서 그런 각오를 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다. 어떤 사람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줄 아는 깊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내게는 분명한 기준이 있다. 고통의 공감은 일종의 능력인데, 그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늘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고통에 가까이 있어본 사람, 많은 고통을 함께 느껴본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대선 후보들이 낸 책을 통독했다. 그들이 생의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 살폈다. 청년 시절의 그들은 누구 하나 못난 사람이 없었다. 모두 수재였고 좋은 대학에 갔으며 탄탄대로가 열려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 대로를 곧장 걸어갔는데 어떤 이들은 엉뚱한 길로 접어든 것이었다. 그 후로 그들은 수십 년을 다른 방식으로 살아왔다. 음식점에서 메뉴를 고르는 일 따위가 아닌 것이다.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선택 앞에서 대다수는 자신에게 편안한 길을 택하며 그것은 비난받을 일이 못 된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주 드물게도 고통이 더 많은 쪽으로 가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
물론 다른 이들도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살아서 입신출세한 사람을 선망할 수는 있어도 존경까지 할 필요는 없다. 나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그 고통을 함께 하기로 결심한 사람,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자신의 안락을 포기한 사람들만을 존경한다. 나는 우리의 대통령이 부디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혹자는 성품이 아니라 능력을 봐야 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성품이냐 능력이냐’라는 물음은 잘못된 양자택일이다. 대통령에게 필요한 능력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성품이 곧 능력이다. 이 판단이 정치적으로는 매우 순진한 것일 수 있음을 안다. 그러나 고집을 부리고만 싶다.
환상을 품고 있지는 않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고 구세주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삶이 오늘의 그를 믿게 한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능력과 그것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능력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치명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귀 기울일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말을, 반값 임금에 혹사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말을, 차별당하는 소수자의 말을. 그 고통을 알겠어서, 차마 도망칠 수 없어서,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다. 대통령(大統領)이 대통령(大痛靈)이면, 우리 중에 가장 크게 아파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깊이 있는 사람> 202p
타인의 슬픔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제목을 좀 더 자세히 풀어쓰면 '타인의 슬픔을 공부 해야 하는 슬픔'이겠구나, 싶었다.
공부하지 않고는 타인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슬픔만큼만 알 수 있어서, 슬픔에 대해서는 인간 자체가 그 한계이므로
우리는 공부해야 한다는 것.
타인의 슬픔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
경험하지 않은 슬픔은 알 수 없으니 공부해야 한다. 그건 알겠는데
우리는 무슨 이유로, 타인의 슬픔을 이해해야 한다는 걸까?
나의 슬픔만으로도 버거운데, 어째서 타인의 슬픔까지 포용해야 한단 말인가.
이는 돈을 벌어다주는 일도, 자기계발도, 지식을 얻는 일도 아닌.. 무용한 일이 아닌가?
책은 '폭력에 무감해지지 않기 위해',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자신의 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규정되는 모든 존재들은 억울하다. 이 억울함이 벌써 폭력의 결과다. ‘폭력’의 외연은 가급적 넓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런 정의를 시도해본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단편적인 정보로 즉각적인 판단을 내리면서 즐거워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어떤 인터넷 뉴스의 댓글에, 트위터에, 각종 소문 속에 그들은 있다. 문학이 귀한 것은 가장 끝까지 듣고 나중에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문학은 4.3과 5.18의 반복을 겨우 저지한다.
<5.18과 4.3 사이> 92p
인간은 무엇에서건 배운다. 그러니 문학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다. (...) 피 흘리지 않으면 진정으로 바뀌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거꾸로 말하면, 피 흘리지 않고 인생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을 나대로 시도해보았으나 결과는 이렇게 변변찮다. 수없이 다시 물어야 하리라.
<우리는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176p
정확하게 말하고 정확하게 사랑받는 일이 가능하다면 사람은 정확하게 죽을 수도 있는 모양이다. 정확한 죽음이란 또 무엇일까. 시인이 보여주는 것은 정확하지 못한 죽어감의 풍경이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채 “잘못했어 잘못했어”라며 빌고 있는 사람, 그런데 도대체 누구에게 빌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 그럼 정확한 죽음이란 그 반대의 것, 그러니까 그 누구에게도 잘못을 빌 필요가 없는 죽음, 그렇게 회한과 미련도 없이 죽는 일일까.
<정확한 칭찬> 326p
이렇게 생각한다.
타인의 슬픔에 대한 포용성 혹은 민감성이 낮은 사회일수록
폭력, 혐오, 조롱, 위협, 국가적 살인, 국민의 죽음을 방치하는 국가, 타인의 죽음에 무감해지는 세태 등
3부(그래도 우리의 나날)와 같은 글이 쓰일 일이 많아진다고.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고유명사를 줄여 ‘이명박근혜’라고 부르지만 이를 다시 세 글자로 줄이면 ‘박정희’가 된다. (...) 이명박 정부의 물신 정치를 상징하는 사건은 용산참사와 4대강사업이다. 이 물신 정치는 ‘인간’과 ‘생태’라는 최상위 가치에 대한 몰이해와 거부감에 기초한 폭력적 성과주의다. (...) 박근혜의 공작 정치를 상징하는 것은 물론 세월호참사와 블랙리스트다. 세월호참사는 사실상 ‘죽게 내버려둔’ 결과를 낳았고 블랙리스트의 본질은 ‘내버려두지 않고 죽이는’ 데 있었다.
<3부 총론 - 굿바이, 박정희>
세상이 악화일로 되지 않도록
이것이, 이 바쁜 시대에 하필이면 '슬픔'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하나 더 있다.
5부(넙치의 온전함에 대하여)에 관한 것으로,
슬픔을 공부함으로써, 비로소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우리가 이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망가진 사회, 혐오의 사회를
바로잡을 치료제는 이 방법뿐이다.
슬픔에 대한 공부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왜 학교에서 슬픔학을 가르치지 않냐며 안타까워하는 신형철 평론가는
약 400페이지에 걸쳐 여러 작품을 소개함으로써, 슬픔에 대한 공부는 '문학'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변한다.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변하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 간접 체험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 흘릴 필요가 없는 배움은, 이 배움 덕분에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꾸지는 못한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 피 흘리지 않으면 진정으로 바뀌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거꾸로 말하면, 피 흘리지 않고 인생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는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176p
다음과 같은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다. ‘문학은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일이다. 아니, 단순한 것이 실은 복잡한 것임을 끈질기게 지켜보는 일이다. 진실은 단순한 것이라는 말이 있지만, 진실은 복잡한 것이라는 말도 맞다.’ 세상은 점점 빨라지고 있고, 글과 말은 점점 섞이고 있다. 빠른 속도로 깊게 생각하는 법을 나는 모른다. 요즘 나는 어쩌면 이제 이 세계 자체가 문학에 적대적인 곳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비관적인 생각과 싸우고 있다.
<문학에 적대적인 세계> 387p
문학평론가 김인환 선생의 글인데 나는 이 글을 통째로 외우고 싶다. (…)
- 작가는 누구에게서나 상처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원효나 퇴계, 아리스토텔레스나 하이데거의 책을 읽으면서도 거기서 그들의 상처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 그러나 아무리 상처가 영혼의 본질이라 하더라도 문학이 상처의 기록에 그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 작품에는 상처를 달래는 지혜의 소중함과 어려움이 암시되어 있어야 한다. (...) 생명을 죽이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남을 다치게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길도 인간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나와 남의 다친 영혼을 달래는 길뿐이다.
<한 번 보고는 알 수 없다> 391p
문학은 슬픔에 대한 공부다.
느리지만,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약도 듣지 않는 사회에 가장 효과있을 치료제가 이것이라고.
무용함의 소중함과
쓸모없는 일의 쓸모를 믿는 사람으로서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읽는 사람이, 공감하는 사람이, 곱씹는 사람이, 가슴에 담아두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혐오, 조롱, 이기심, 부자유, 차별, 배제가 넘쳐나는 시대.
이런 사회에 무엇보다 필요한 건 슬픔에 대한 공부일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