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가을
“외국어영역 4등급 in 캐-내다”
“토론토 시(市)에서 차로 가면 30분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북쪽, 어느 한적한 마을에서 비바(Viva)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토론토라는 미지의 도시에 도착한 지도 어느 덧 서너 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고작 몇 개월이었지만 이미 ‘hello’와 ‘how are you?’ 외에도 할 줄 아는 말이 생기기 시작했다. 수능을 다시 쳐서, 무너져버린 자존감을 회복해야 하는 강박감도 내 몸에서 서서히 떨어져 나가고 있다. 생각 정리를 끝낼 무렵, 저 멀리 버스가 보인다. 내가 타던 노선의 버스는 거의 항상 만원이라 앉을 자리가 없었지만, 다행히 오늘은 자리에 앉을 수 있다. 버스 창 밖으로 띄엄띄엄 보이는 광역토론토의 나지막한 건물들이 스쳐 지나간다. 선선한 가을이 다가오고 있지만, 길을 걷는 사람은 거의 없다.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물든 나무들은 도시를 알록달록하게 채우고 있다. 30분 정도 바깥 풍경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어학연수 학원에 도착이다. 아무쪼록 이번 레벨도 무사히 마치고, 얼른 대학에 들어가기를 오늘도 기원한다. 수업에 들어간다. 꼼짝 없이 4시간동안 붙잡혀 있는 시간이 시작됐다.”
1년 남짓한 어학연수 시절은 위와 비슷하게 흘러갔다. 특히 첫 몇 개월 동안이 더욱 그랬다.
내가 토론토에 도착했을 때는 2010년 6월 중순이었다. 캐나다로 거처를 옮길 기회는 재수를 그만두고서도, 몇 개월이 지나서 현실화되었다. 토론토에 도착한 후에도 대학교에 바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모국어로 한국어를 쓰는 나로서는 대학진학을 위해 일정 수준의 영어 성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 토플이나 IELTS 같은 것 말이다. 혹은 대학에서 어학연수를 하는 것으로도 그러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 때도 성격이 급했던 나는 머릿속에서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영어 성적 조건이 맞춰지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것들이 순탄하게 흘러간다고 해도 사학과와의 만남은 1년하고도 3개월 정도가 남았었다. 나의 고질적인 조바심이 도졌다. 이 글을 시작하며 첫 편에 얘기했던 ‘기다림이 가득한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2010년 당시만 하더라도 이것은 단발적인 ‘기다림’일 것 같았는데, 불행히도 수많은 기다림이 이후에 나를 맞이했다.
여하튼 조바심은 나를 옥죄기 시작했다. ‘어학연수 코스를 얼른 등록해서 순식간에 해치우겠다’라는 생각만 가득했다. 이것은 수능의 기억이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무맹랑하고 현실성 없는” 나의 대학 진학 계획을 수능 성적표가 무참히 깨부수었다. 이따금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수능을 칠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도심에 가득히 내려앉은 푸른 잔디들과 잘 어우러진 단풍들을 볼 때면 ‘수험생의 삶’이라는 빡빡한 생활로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게다가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수능을 내 기대만큼 잘 치러낼 자신은 없었다. 스스로에게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어학연수를 얼른 해치우고, 떠나온 이 곳 캐나다에서 사학과와 만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결국 캐나다에 남기로 했다.
어학연수를 시작하자마자 ‘캐나다’라는 나라는 곧 ‘캐-내다’가 되었다. 외국어 4등급의 학생은 영어를 읽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듣기’과 ‘말하기’ 영역은 어찌나 어렵던지. ‘진짜’(?) 영어는 쉽지 않았다. 겨우 머릿속에서 만들어 놓은 문장들은 목구멍까지 도달했지만, 입 안에서만 맴돌고 도무지 나오지 않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미리 내뱉을 말을 머릿속에 만들어 놓고 녹음기를 틀 듯 이야기할 때도 많았다. 그러다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갈 때면 목이 턱턱 막히곤 했다. 게다가 원어민들이 말할 때 어찌나 빠르게 이야기하던지… 꼭 미국드라마를 볼 때 자막을 켜 놓는 것처럼, 그들이 이야기를 할 때 ‘자막이 함께 있었으면…’하는 생각도 종종 들었다. 아, 작문은 어떻냐고? 그 영역 이야말로 어휘, 문법, 문장 구사력, 글의 구조 등을 죄다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어려웠다. 영어를 배울 수 있었던 감사한 기회였음에도 그 당시에는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같은 말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었다.
어느 한 언어에 익숙해는 것은 약간의 차이는 있겠으나, 어느 정도의 시간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진득한 기다림이 필요한 것인데, 그것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어학연수 코스를 ‘월반’ 해서라도 빨리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인터넷에서 영어를 빨리 배우는 방법을 모조리 찾기 시작했다. 미국드라마를 보다가 자막을 켜두고 그 말들을 따라하기도 했다. 대책 없이 책 한 권을 빌려서 필사를 해보기도 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뉴스를 멍하니 보고 있을 때도 있었다. 한 개의 레벨이라도 월반을 한 적이 있냐고?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자연스레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음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시간을 ‘빨리감기’하려고만 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지도, 수능을 친 지도 꽤 긴 시간이 지났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심지어 대학을 마무리한 지도 어느새 7년이 지나고 있으니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고 할 수 있겠다. 30살이 훌쩍 넘은 요즘, 조금씩 알 것 같기도 하다. 대부분 일들은 절대적인 양의 시간이 걸린다는 것, 무언가를 빨리 해결할 수 있는 왕도는 없다는 것, 그저 차분히 기다리다 보면 끝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캐-내다에서 영어를 접한지 4개월이 넘어가고 있을 때였으니, 새하얀 겨울이 펼쳐졌을 즈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캐-내다의 국민 브랜드 ‘팀홀튼’에서 큰 어려움없이 주문을 할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 실은, 내가 돈을 지불하는 입장에서는 내 영어가 서툴더라도 나의 영어를 다 이해해주었으며, 게다가 카페에서 쓰는 영어는 한정적이었지만 그 즈음의 나는 영어에 무척 자신이 있었다. 아무래도 영어 정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이것은 사막의 오아시스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 영어는 아직도 어렵다).
대학진학에 필요했던 영어성적/실력에 조금씩 도달하고 있었고, 대학원서를 낼 시기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음 속 깊숙이 들어있던 ‘수능’을 못친 것에 대한 아쉬움이 가슴 속에서 방방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이름있는” 대학에 가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결국 또다른 조바심이 시작됐다. 그 때는 2011년을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추신: 팀홀튼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곧 팀홀튼이 한국에도 상륙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캐나다에서 이곳에 출근도장을 찍다시피 갔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더블더블’과 ‘아이스캡’을 즐겨마셨던 기억이 난다. 팀홀튼이 한국에 상륙하면 꼭 가보시라. 두 음료 모두 많이 달달한지라 기분이 좋아지는 맛일 것이다. 팀홀튼의 먼치킨 도넛이라 할 수 있는 ‘팀빗’도 함께 먹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