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크립씨 Nov 14. 2023

발표에서 살아남기

2012년 봄

“애증의 튜토리얼 수업 2”


사학과에 진학하는 것까지도, 사학과 전공으로 졸업하는 것도, 그 이후 대학원에서 석사를 3개나 하는 것 등의 과정은 ‘기다림’을 버티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튜토리얼 수업을 버텨내는 것에도 기다림이 있었는데, 정말이지 이상한 종류의 기다림이었다. 거의 매주 참석해야만 했던 튜토리얼 수업이었기 때문에, 매주 주말이 끝나갈 즈음이 되면 나는 공포에 휩싸였다. 어릴 적부터 발표과제는 내게 어려운 과제 중 하나였고 게다가 그걸 영어로 해야 했기 때문에, 부디 다음 수업이 오지 않기를, 다음 주가 오지 않기만을 바랐다. 예를 들어, 월요일에 튜토리얼 수업을 했다면 화요일이나 수요일까지는 마음이 편했지만, 그 후부터는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하루라도 빨리 한 주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두 학기 연달아 이어지는 강의는 보통 튜토리얼 수업이 20개 정도가 있었는데, 수업들을 하나씩 해치워야 결국 튜토리얼 수업에서 완전히 해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음 주가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이와 동시에 빨리 한 주, 한 달 그리고 한 학기가 흘러가기를 소망하던 아주 이상한 기다림이었다. 아이러니한 기다림이었다.


‘서양사 개론’ 튜토리얼 수업에서도 “수업조교와 눈 마주치지 않기” 게임은 두 개의 학기가 흘러가는 긴 시간 내도록 이어졌다. 그러나 입을 꾹 닫고 있게 되면 튜토리얼 수업 점수는 출석을 하나 마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고는 했다. '서양사 개론'의 튜토리얼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풀기에 앞서, ‘서양사 개론’ 강의에 대한 설명을 조금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건 사학과에서 처음 들었던 수업이었는데, 강의에는 300-400명 정도가 들어갔다. 영화관처럼 생긴 건물이었다. 이후 알고 보니, 여기서 토론토 국제 영화제 (TIFF)가 진행되기도 했다. 아무튼 아래의 사진과 같이, 좌석은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간이 책상 조차 없었던 것 같다. 노트에 필기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수업이 시작되고 어둑어둑한 무대 위로 나이가 든 교수가 올라왔다. 중학교 다닐 적에나 보았던 OHP 필름을 가져오더니 화면에 비췄다 (OHP 필름과 그 기계를 알고 있다면 “옛날사람”).


대학교 사이트에는 아주 멋드리지게도 묘사해 놓았다. 내 기억에는 어둡고 또 어두운 공간이었다. (출처: 빅토리아 칼리지, 토론토대학교 웹사이트)


“오 마이 갓”


팔랑거리는 플라스틱 필름에는 당일 강의에서 다룰 몇 가지 주제어만 적혀 있었다 -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 등의 이름이었다. 그나마 받아쓰기라도 할 수 있는 슬라이드도 없는 상황이고, 그 뜻은 곧 다가올 튜토리얼 수업에서 무엇을 복습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시작도 하지 않은 ‘서양사 개론’ 튜토리얼 수업의 공포가 엄습해왔다.




‘서양사 개론’ 튜토리얼 수업

‘서양사 개론’ 첫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튜토리얼 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수업이 있는 교실까지 서둘렀다. 회색 콘크리트로 덮인 아주 삭막해 보이는 건물이었는데, 교실로 들어서니 (아마도 중국계로 보이는) 아시아인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백인계 학생들이었다 – 사학과(특히 유럽사 과목)에서 아시아인 학생을 찾는 것은 참 어려웠다. 다문화/다인종을 표방하는 토론토였지만, ‘서양사 개론’ 수업을 포함해서 대체로 사학과 수업에는 백인계 학생들이 유독 많았다. ‘내가 들었던 튜토리얼 수업만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수업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튜토리얼 수업이었다. 우선 분주함은 기본으로 깔려 있었다. 수업조교는 거의 매 수업마다 샐러드나 차가운 파스타 같은 음식을 먹으며 수업을 진행했는데, 과일이나 야채가 씹히는 소리를 계속 들어야만 했고, 그 음식들에 섞인 소스들이 풍기는 냄새가 교실을 가득 채웠다. 그런 분위기에서 학생들도 먹을 것을 싸와서, 사탕이나 초콜릿 등의 군것질 거리를 먹어댔는데, 결국 교실은 온갖가지의 냄새로 가득찼다. 뿐만 아니라,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원어민이었던지라, 그 분위기에 합류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원어민 학생들의 바다에서 외딴 섬처럼 있던 나로서는 분주함에 합류하지 못하고 오히려 압도되는 느낌도 들었다.


‘토론수업’답게 발표는 매주 해야만 했다. 사학과는 읽을 것이 많은 편인데, 1학년 때는 그것을 모두 해치우지 못해서 튜토리얼 수업은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았다. 영어가 서툰 판에, 단 하나의 주도 예외 없이 수업조교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는데, 보통 쉬운 질문으로 시작하여 어려운 질문으로 이어졌다. 쉬운 질문에 얼른 대답이라도 했었다면 참여점수라도 받았을텐데, 그 말들은 끝내 입술을 비집고 나오지 못하고 입 안에서만 맴맴 돌았다. 그럴 때면 그 기회는 다른 학생들이 채 가기 일쑤였다. 대답하는 것 외에도 다른 학생들의 발언에 (이 발언들은 그럴듯하긴 했지만, 대체로 속 알맹이는 없었다) 반박을 해야만 하곤 했는데, 말을 지어내고 그것을 영어로 산출하는 것은 대학을 막 들어간 나로서는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수업조교와 눈 마주치지 않기” 게임은 이 수업에서도 여지없이 시작됐다. 그러다가 어려운 질문을 할 즈음에 다다랐을 때, 이따금 내게 질문이 던져졌고 진땀을 흘려가며 대답을 했다. 첫 주 이후부터는 매주 돌아가며 1명씩 발표를 해야하는 과제도 있었는데, 이 과제의 존재를 알고 난 후, 내 발표를 마무리 짓는 수업이 될 사이의 몇 주 동안은 ‘이 발표를 어떻게 해치워야 할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앞서 말한 “아이러니한 기다림”이 계속됐다. 결국 그 날이 됐고, 발표 직전의 남는 시간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맥주를 한 잔 마셨던 기억이 난다 (두 잔이었나?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맥주 한두 잔으로도 긴장한 몸은 충분히 풀렸고, 심지어는 나른해졌다. 발표가 시작됐고, “아무말 대잔치”를 펼치며 어찌저찌하여 발표가 끝났다. 별 것 없는 10-15분여의 발표였는데, 어찌나 긴장되던지. 발표를 끝내고 집에 가는 길은 무척이나 발걸음이 가벼웠다. 온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 후 10번 정도의 튜토리얼 수업을 끝내니, 1학년도 끝나가고 있었다.




12년도 지나버린 오래된 기억이지만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 튜토리얼 수업이다. 막상 한참을 쓰고 보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기껏해야 자그마한 발표에 몇 주를 떨었던지. 세월이 흘러가며 숱하게 많은 발표를 하게 되었고, 또 다른 이들의 발표도 셀 수 없이 들었다. 나의 생각보다 타인들은 나의 발표에 그리 집중하지 않았다 (양심고백하자면 나도 타인들의 발표에 100% 귀담은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타인들은 내가 발표 중에 실수를 해도 무관심하게 넘겨 버리는 것이 보통이었고, 어떤 실수를 했는지 알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니, 학교에서 발표를 해야하는데 혹시 그대가 발표울렁증(?)이 있다면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대의 생각보다 타인들은 본인의 말에 크게 집중하지 않는다. 나처럼 조마조마해 하지 말고, 어떤 생각이든 두려움을 참아내고 조금만 용기를 내서 입 밖으로 뱉아 내보길.



영원한 골칫거리, 튜토리얼 수업과 발표 과제.


매거진의 이전글 고생하는 수업조교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