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에서 2013년으로 넘어갈 무렵
“애증의 튜토리얼 수업 3”
튜토리얼 수업에 대한 기억은 하면 할수록 선명하게 떠오른다. 사학과 전공 이수 중에 수강했던 튜토리얼 수업들이 특히 많이 생각나는데, 아마 그 이유는 다른 전공들보다 유독 사학과에 애정 - 혹은 애증 - 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강학생의 숫자가 애매해서 튜토리얼 수업이 없었던 3년차 사학과 과목을 제외한다면 사학과 수업들은 하나같이 튜토리얼 수업이 끼어 있었다. ‘서양사 개론’을 마쳐갈 즈음에는 서양사의 궤적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비록 수박 겉핥기 식이었지만. 그 궤적에서 나는 근/현대 유럽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2학년으로 올라갈 무렵에 ‘근대 유럽사’와 ‘현대 유럽사 I’을 수강신청했다.
이 수업들에서 마주친 사람들을 이야기하기 전에, “수강신청 암시장”에 대해 잠시 설명을 해야겠다. 이것은 튜토리얼 수업과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다. 괴상한 수강신청 시스템의 영향으로 학생들의 고통이 배가 되고는 했기 때문이다. 이 학교의 수강신청 시스템은 ‘뽑기’류의 도박이었다. 수강신청 웹페이지는 같은 날에 열리긴 했는데, 문제가 되는 점은 학생들이 동등한 시간에 수강신청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누구는 아침 6시에 수강신청을 시작할 수 있는 1등에 당첨되는 것에 반해 누군가는 오후 3-4시가 되서야 시작할 수 있는 꼴등에 당첨되었다. 꼴등표라도 받는 학기에는, 그것도 본인이 저학년이라면 (학년별로 수강신청 날짜가 달랐고, 1학년이 가장 늦은 날에 했다) 누구도 듣고 싶지 않은 기피수업을 등록해야만 했다. 그런 수업들은 대개 강의부터 튜토리얼 수업까지 모두 재미없었고, 성적은 받기 어려웠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과장을 조금 하자면) “모든” 전공의 인기 과목들의 수강자리가 암암리에 거래되고는 했다. 어떻게 거래되는지, 얼마인지 등은 알 수 없었다. 가격이라면 아마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정해졌을 것이다. 학기가 시작될 때면 언제나 “수강신청 암시장”이 활기를 띠었다. 학교에서는 반드시 단속한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는 잘 보지 못했다.
여하튼 나는 1등 순번은 아니었지만, 적당한 순번을 받아서 ‘근대 유럽사’와 ‘현대 유럽사 I’ 모두 등록할 수 있었다. 당연히 튜토리얼 수업이 진행되었는데, 이 수업에서도 여러 사람들을 마주치게 되었다.
‘근대 유럽사’ 튜토리얼 수업
르네상스 시대부터 나폴레옹이 등장하던 시대를 다루는 과목이었다. 유럽의 왕들의 이름이 아주 헷갈려서 고역이었다 – 이름 뒤에 붙는 1, 2, 3세는 그 순서에 맞지 않게 등장했고, 게다가 비슷한 철자의 이름인데도 나라에 따라서 각기 다르게 불렸기 때문에 이들을 구별하는 것은 무척 헷갈렸다. 이런 점은 내가 근대 유럽사에 대한 관심을 잃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였는데, 근대 유럽사의 튜토리얼 수업이 결정타였던 것 같다. 수업조교가 아주 깐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표에 기입하기를 좋아하는 수업조교였다. 튜토리얼 수업 첫 날부터 “매주마다 있을 수업에서 어떠한 퀄리티로 그리고 몇 회를 말해야 참여점수 영역에서 만점을 받을 수 있는지” 설명하는 것만 10분이 걸렸다. 그 설명이 끝나자마자 수업이 시작됐는데, 자신의 노트에 모두의 이름을 적어 두고 수업에서 몇 회를 말하는지 매기기 시작했다. 수업이 마칠 즈음하여 우연히 수업조교의 노트를 곁눈질로 볼 때면 알 수 없는 표시들이 이름 옆에 가득했다. 의사들이 빠른 속도로 써서 알아 볼 수 없는 메모 같아 보였다. 숫자로 표기하기 시작하니 나도 어쩔 수 없이 아무 말이나 해댔다.
깐깐한 수업조교의 수업에서는 아무 말이나 하면 참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틀린 것이 있을 때마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서 꾸짖듯 말을 빠르게 쏘았는데, 꼭 그럴 때는 기관총을 입에 달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수업에서는 다니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는 고마운 친구였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내가 튜토리얼 수업 중에 곤경에 처할 때면 나를 대신하여 수업조교와 언쟁을 벌여 주기도 했고, 내가 긴장한 나머지 영어가 엉망진창이 되면 나의 말을 ‘통역’(?) 해주었다. 그 친구 덕분에 수업을 버틸 힘을 얻곤 했을 뿐더러, 곤경에 처한 누군가를 대가 없이 도우는 미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발표과제를 필두로 전방위에서 압박해오는 것 같은 튜토리얼 수업을 버티기에는 나의 영어실력이나 나의 멘탈, 모두가 역부족이었다. 결국 마무리하지 못하고, 근대 유럽사와는 이별을 고했다. 그 친구는 괜찮다고 했지만, 여전히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현대 유럽사 I’ 튜토리얼 수업
‘현대 유럽사 I’ 튜토리얼 수업을 맡았던 수업조교도 생각난다. 그는 베트남계 미국인이었는데, 박사과정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의 수업방식은 아주 수월한 편이었다. 위에서 말한 수업조교와는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수업에서 대답을 하는 것을 일일이 세지도 않았고, 어떤 말을 하든 친절한 표정으로 세심하게 가르쳐 주었다. 느슨한 분위기의 수업에서 나는 오히려 더욱 큰 흥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수업조교는 할로윈이 다가왔을 적에는 사탕, 초콜릿 등 군것질 거리도 사왔었는데. 달달한 것이 들어가서인지, 그의 배려가 느껴졌던건인지 무척 기분이 좋았던 수업이었다. ‘음식 끝에 정난다’라는 말처럼, 별 것 아닌 과자 몇 개였지만 참으로 고마웠다. 언젠가 나도 조교가 되는 날이 온다면, 이 수업조교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느긋한 성격의 수업조교는 성적을 주는 것에도 후한 편이었다. 기말고사를 치고, 시험지를 수령하고 내 성적을 확인하러 펍에 들렀다 (마지막 주에만 펍에서 간이 오피스가 열렸지만, 그럼에도 ‘펍이 간이 오피스라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한 보너스 퀴즈를 통해 그 자리에서 추가 성적을 주곤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보너스 퀴즈 찬스는 평균점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그가 베풀었던 친절이었을 것이고, 자신의 학생들을 무안하게 하지 않기 위해 베풀었던 그의 배려였을 것이다.
현대 유럽사 I의 친절한 수업조교와 함께 했던 한 학기동안 나는 현대 유럽사에 많은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한다지만, 만약에 깐깐한 수업조교가 현대 유럽사 I을 가르치고 이 느긋한 수업조교가 근대 유럽사를 가르쳤더라면 지금의 내 전공이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몇 화 전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내가 중학교 때 사회과목 교과우수상을 타는 것에 실패라도 해서, 아예 서양사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지도 않았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중학교 시절처럼, 대학교 시절에도 우연의 순간들은 계속해서 나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튜토리얼 수업에 대한 이야기는 끝도 없이 풀 수 있지만, 이만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여하튼 이런 수업은 대학을 다니던 시절 내도록 이어졌다 – 3학년때는 사학과 강의에는 없었지만, 또다른 수업들에서 튜토리얼은 빠지지 않고 내 시간표의 자리를 차지 했다. 4학년 때는 Seminar라는 형태의 수업으로 튜토리얼 수업의 형태는 유지되었다. 수업조교의 자리를 교수가 대신했을 뿐이었다. 물론, 대학원 수업을 들을 때도 Seminar 수업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애증의 튜토리얼 수업은 2023년 여름까지 내 곁에 머물렀다.
튜토리얼 수업에서 덕을 본 것도 있다. 발표울렁증(?)이 차차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필수참여였던 튜토리얼 수업을 꾸역꾸역 다닌 후에, 무언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있음도 알게 되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무언가를 떠들어야 했기 때문에 영어실력이 비약적으로 늘었던 것도 감사할 일이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 조금 더 애정을 갖고 열심히 해 볼 걸이라는 생각도 스친다. ‘튜토리얼 수업’ 주제의 글을 마치려니 괜스레 감상에 젖는다.
그래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고?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