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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록 Feb 12. 2023

사직서 말고 변호사

번역행정사 김서록 흑역사 - 외국계 중소기업 B사 재직 에피소드(2)


몇 초 간 정적이 흘렀다. 얼굴이 달아오른 채로, 최대한 침착하려 애썼다.  


“다음 주 월요일이 지정된 출근일이고, 오늘이 금요일이에요. 말씀드렸듯이 이사를 마친 상태고요. 저 출근하려면 이사해야 한다고 한 두 번 말씀드린 거 아니잖아요. 이제 와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맞나요?”


지사장은 반박하지 못하고 피곤하다는 듯 말했다. 


“경영지원업무는 아웃소싱을 하거나 아르바이트로 채용하라는 게 본사의 방침입니다.”


나는 본사의 방침이 무엇이든 본인의 언행에 책임질 것을 요구했다. 지사장은 다시 연락을 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이사 후에 먹어야지 했던 짜장면도 치맥도 전혀 당기지 않는 금요일이었다. 무릎을 껴안고 울었다. 




월요일. 원래는 출근하는 날이었는데. 오전 9시가 넘었지만 여전히 새로 이사한 원룸에 앉은 채였다. 같은 건물에 거주하는 이들은 죄다 나갔는지 조용했고, 고요함 속에 진동이 울렸다. 지사장이었다. 


“본사에서는 연봉으로 1,200만원 정도만 집행할 수 있다고 하네요.”


당시 중소기업의 대졸 평균 연봉은 2,400만원 정도였고, 대기업이 3,900만원 정도였다. 어떤 방식으로든 조치를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잡포지션이 없어졌다는 뜬금포 이후에 아무 기대를 안 해서 인지, 이번 통화가 나의 하늘을 온전히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다만, 나무 쪼가리 하나에 겨우 의지해 바다 한가운데서 표류하는 기분일 뿐. 


어떻게 하지, 누가 날 도와줄까? 

부모님에게 말할 순 없어….


전화를 끊고는 잔열이 채 가시지 않은 휴대폰을 들고 저장된 번호를 떠들러 보았다.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누구한테 전화를 걸어야 할지 몰랐다. 이 친구는 서류 합격조차 되지 않아서 힘들어하는 상황이고, 이 친구는 지금 해외에 있고……. 손가락으로 스크롤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전화번호 목록 보기를 몇 차례 반복한 끝에,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중국어 프레젠테이션 준비로 진땀 흘리는 나를 보며 “서록씨는 나의 꿈!”이라고 북돋우던, 선생님에서 친구가 되어 준 사람. 


늘어진 테이프처럼 들리던 통화 연결음의 끝에 목소리가 들렸다. 통화를 망설이던 사람 같지 않게, 방언이 터지듯 나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녀는 가만히 들어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얼마나 속상할까.” 


그 한 마디가 어찌나 따뜻하던지 들어주는 그 자체로 고마웠다. 해결책은 결국 내가 찾아야 할 문제였다. 그러나 친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잠시 생각을 하더니 내게 물었다.  


“요즘 가는 스터디 모임에서 알게 된 분이 생각났어. 그분, 변호사거든. 혹시 도움이 될 수 있으니 그분에게 네 얘기를 해봐도 될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해도 된다고 말했다. 곧 다시 연락이 왔다. 


"변호사님에게 네 얘기했어. 마침 그분이 근로분쟁 전문 변호사이더라고. 사회초년생이 안 됐다며 선뜻 도와주겠다더라. 내용 증명이라도 보내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시던데, 어때?"


뭐라도 하길 원했던 나는 변호사 연락처를 받아 전화를 걸었다. 직원이 받을 줄 알았는데 변호사가 직접 전화를 받았다. 상상했던 딱딱하고 상투적인 말투가 아니라, 따뜻하되 힘이 느껴지는 어투였다. 


 "OO씨한테 들었습니다. 초년생한테 참……. 힘들지요? 우리 사무소 이름으로 통고서를 작성해서 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비용은 걱정 마시고요. 원래 변호사가 작성하는 통고서나 내용증명은 비용을 다 받는데, 괜찮아요. 통고서 작성할 수 있게 증거 자료 모아서 전달해 주시고, 시간대 별로 사건 정리해서 이메일 보내주세요."


사건을 시간 순으로 정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너무나 생생했으니까. 반면, 증거 자료 수집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내가 봐도 증거로 제출할 만한 자료가 빈약했기 때문이다. 증거가 되어줄 이메일에서 지사장은 계속 ‘시험’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다른 사람이 그 자료만 본다면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울 듯했다. 중요한 내용이 주로 통화로 안내 되었는데 녹음된 통화도 겨우 1건뿐이었다. 


합격을 축하한다며 내내 챙겨주던 과장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여전히 그 회사에 근무하는 과장에게 그러한 요구를 한다는 건 그를 아주 난처하게 하는 일이니까. 대신, 과장과 업무 관련하여 주고받은 카카오톡 내역이 있어서 메일에 첨부하여 변호사에게 보냈다. 


“아……. 이런 식이었군요. 서면 자료를 최대한 안 남기려고 한 게 참…….”

 

이메일을 확인한 후 내게 전화한 변호사의 목소리에 탄식이 배어있었다. 내가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는 나를 달래듯 말했다. 


“음, 괜찮아요. 녹음 자료도 증거가 되니까. 다만, 서면 증거의 효력이 제일 강력하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상황이든, 어떤 일을 하든 서면 자료를 먼저 남기는 습관을 들이는 게 좋겠어요. 휴대폰 통화 시에는 녹음도 하고요.”  


그렇게 얼마 후 통고서가 완성되었다. 법률사무소에서는 지사장에게 발송하기 전에  내가 다시 한번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나는 특이사항이 없다고 답변을 했고, 이윽고 법률사무소 명의의 통고서가 지사장에게 발송되었다. 며칠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다가, 한 차례 반송되어 다시 발송했다는 소식을 법률사무소 직원을 통해 들었다. 두 번째 발송을 하자 지사장이 받았고 법률사무소를 통해 그 이메일 답변을 전달받았다. 


‘원하는 걸 말씀해 주시면 ‘저희 변호사’와 상의 후 답변 드리겠습니다.’



소송의 문턱에서 소모되는 것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20대가 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모르겠다. 

20대 초반의 나는 그 답신을 보고 혼자 앞서갔다. 결국 소송을 해야 할 상황이라고 판단해 버렸다. 지사장이 ‘저희 변호사’ 운운하는 걸 보니 제대로 배상할 생각이 없구나, 소송을 해도 배상금이라고 해봐야 이사비용, 약간의 면접비 수준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배상금 여부를 떠나, 소송을 하면 일이 지나치게 커질 거란 부담감이 일었다. 부모님이 알게 되거나, 알려야 할 상황이 생길 거란 점도 싫었다. 좋은 마음으로 도와주신 변호사님에게 계속 무보수 봉사를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연히 보수를 드려야 할 텐데, 숨만 쉬어도 월세와 생활비가 계속 나갔다. 


또, 서면이 오가고 절차를 하나씩 밟아갈 때마다 지사장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커졌다. 그 감정이 집 채만 한 파도 같아서 곧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소송을 하기 전에도 이런데, 본격적으로 소송을 하게 되었을 때 그 감정을 조절할 자신이 없었다. 결론적으로 소송은 돈과 시간을 모두 써야 했고, 내 감정까지 크게 소모하는 일이었다. 결국, 도움을 준 변호사님과 변호사님을 소개를 해 준 친구에게 말했다.


"저,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그만하고 싶어요……. "


지사장은 이런 상황을 기대하고 이메일을 썼을지 모른다. 사실 그가 말한 ‘저희 변호사’가 실제로 있었다면 그 변호사가 지사장을 대신해 답변을 했을 것 같다. 내 쪽에서 조금 더 강력하게 대처했다면 오히려 그쪽에서 부담을 느껴 보상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남는 것 

지금은 이 에피소드를 적으며 썩소를 띄우고 말 정도로 괜찮아졌지만 (어찌 되었든 썩소도 미소의 하나 아닌가) 가끔 그때를 떠올릴 때면, ‘내가 멘탈이 더 좋았더라면’, ‘돈이야 어떻게든 벌 텐데……소송해 볼 걸 그랬나’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당시의 나에게 그게 최선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마음에 걸릴 때가 있다. 아무 배상도 하지 않고 처벌도 받지 않은 그 자가 또다시 누군가의 절박함을 이용하고 있을 까봐.


사건을 흐지부지 끝내고 몇 개월이 지났을 때가 떠오른다. 입에 풀칠하려고 지원했던 다른 중소기업에 합격하고 제법 적응을 한 시점이었다.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음을 알리는 진동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B사 과장이었다. 그 문장에 울분이 가득했다. 그리고 내게 묻고 있었다. 



“서록씨, 지사장 때문에요. 그 변호사님 연락처 좀 알려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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