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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록 Apr 11. 2023

매일 번역을 하고 어쩌다 보니 보증까지 섭니다

나의 직업, 외국어번역행정사가 필요한 순간에 관하여  


나의 직업은 행정사다. 대한민국 행정사법에 따른 국가전문자격사.

행정사? 그건 뭔가 싶을 것이다.


인지도 없음, 인정.


행정사는 원래 ‘아는 사람끼리 해 먹는’ 그런 직업이었으니까.

경력공무원이 행정사 자격을 독점하는 상황에 대하여 위헌 판결이 난 후에야 (판례 2007헌마910) 일반 시민에게도 행정사 자격을 취득할 기회가 생겼다. 그래서 행정사 시험은 2023년 기준 ‘겨우’ 11회 차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행정사는 다른 자격사와 다르게 일반행정사, 해사행정사, 외국어번역행정사 총 3가지 자격으로 구분된다. 그중 가장 적은 수를 차지하는 ‘외국어번역행정사‘가 나의 직업이다.  


그래서 외국어번역행정사가 하는 일이 대체 뭐냐고?

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말하자면, 외국의 행정서류나 외국에 제출할 한국의 행정서류를 번역하고 여기에 ‘보증’을 서 주는 일이다. (엄마가 보증은 절대 안 된댔는데... 뭐, 채무이행 관련한 법률상의 '보증'은 아니긴 한데)   


역이면 번역이지, 거기에 왜 보증이 필요한 지 궁금할 수도 있겠다.

내 고객 중에도 왜 이런 '보증'이 필요한지 이해가 안 간다며 내게 푸념하는 분이 있다. '나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인데, 내가 직접 서류를 번역해서 내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며. 


서류에 대한 '보증'이 필요한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주요한 이유는 사람이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고등 동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더 나은 기회를 얻을 수 있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있다면 기꺼이 거짓말을 하기도 하는 존재. 그래서 행정기관의 업무에 관한 서류를 번역하고 그 번역문에 ‘보증서’ (번역확인증명서)를 쓰는 일은 법률로 권한을 부여 받은 외국어번역행정사가 한다.  . 


사무소를 운영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내 직업이 왜 필요한 지를 실감한 적이 있다. 캐나다에서 학업을 마친 의뢰인 때문이었는데, 귀국 후 한국 소재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의뢰인이 지원하려는 학교에서는 그녀가 취득했다는 캐나다 학위에 대한 ‘보증’을 요구했다. 학교 측에서는 지원자가 지원 자격을 갖추었는지를 확인해야 하는데, 외국 서류는 이 확인 절차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팁: 국내 대학교의 졸업증명서나 성적증명서 등 많은 행정서류들이 발급번호 또는 위변조 방지 바코드가 삽입되어 있어서 홈페이지나 앱을 이용하면 금세 위변조 사실을 알 수 있다) 


진위여부를 확인하는 부분도 그렇지만, 서류가 외국어로 작성되어 있으니 설령 담당자가 그 외국어를 할 수 있더라도 실수를 한다면 (담당자가 서류를 딱 1부만 볼까?) 그 책임을 학교 측에서 감당해야 하는 등의 위험성도 존재한다. 여기서 외국어번역행정사 (아, 아무리 생각해도 명칭이 너무 길다. 이하 ‘번역행정사’라고 쓰겠다)가 할 역할이 생긴다. 의뢰인은 그런 이유로 내게 업무를 맡기게 되었고, 여기까지는 평범한 번역행정사의 일상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문제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었다. 

의뢰인에게 전달받은 학위증에 적힌 ‘Associate Degree'가 문제였다고 해야 할까?

이 학위는 4년제 이하의 전문대학에서 학업을 마쳤거나, 4년제 대학이더라도 4년 전체의 학업이 아닌 단기 과정을 마친 경우에 부여되는 학위이다. 일반적인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에게 수여되는 학사학위는 ‘Bachelor’라고 적는다. 당연히 학사학위와 구분이 필요했고, Associate Degree를 한글로 표기할 때 ’ 준학사‘와 ’ 전문학사‘ 중 어떤 표기가 더 적합할지를 고려한 후에 번역문을 작성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의뢰인에게 전화가 왔다.

“아니, 이거 지금 뭐예요?”

매우 격양된 목소리였다. 

나는 의아해서 물었다. 

“어떤 부분 때문에 그러시는지요?”  

학위증은 간단한 편에 속하는 서류라 고객이 달리 궁금해 할 부분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러나, 그건 생각일 뿐이다. 

“저 학사 학위인데, 한글번역을 잘못하셨잖아요!"


예?


머릿속에 물음표가 한가득이었지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상식에 가까운 상황을 가정하고 물었다.  

“고객님, 저희 사무소에 보내주신 학위는 Associate Degree이거든요. 그건 학사학위가 아닙니다. Bachelor도 받으신 거예요?"


내 말에 의뢰인은 한층 더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거 학사학위예요!"

“Associate Degree는 학사학위가 아닙니다. 4년제 대학에서 전 과정을 마쳐야 Bachelor가 나오는데, 고객님이 졸업한 학교는 4년제 대학도 아니고요. 학사학위로 표기해서 처리해 드리면 불법이 됩니다.”

“나는 학사학위로 알고 거기서 공부한 거예요! 당장 수정해 주세요.”

“고객님이 설령 그렇게 알고 현지에서 공부를 하셨더라도, 학사라는 표기로 수정을 해 드릴 순 없습니다. 학위증에는 학사라고 적혀있지가 않으니까요.”


의뢰인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로 계속 자신의 주장을 이어갔다.

말도 안 되는 요구가 장장 20분간 계속되었다. 나도 앵무새가 되어 계속 설명했다. 안된다고. 

이어지는 통화에 더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의뢰인은 일단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전화가 왔다. 

"학교에서 번역문이 반드시 첨부될 필요는 없다고 하거든요! 그냥 다른 데 가서 공증할 거니까 번역본만 이메일로 보내주세요."

지원할 학교에서는 입학 요건으로 학사 학위를 요구하는 것 같았는데, 어찌 되었든 그 의뢰인은 자격요건이 되든 안되든 간에 일단 서류는 들이밀겠단 뜻으로 들렸다. (이런 열정은 본받아야 하는 건가?)

그 말에 원래의 기준대로 표기한 번역본 PDF 파일만을 이메일로 보내주었다. 그 의뢰인과 앞으로 더 연락할 일이 없을 테니 일단은 후련했다. 다만, 의뢰인의 속셈을 알게 되고 나서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덕분에 번역행정사가 필요한 이유와 직업윤리에 관해 생각할 수 있었던 계기였지만 말이다.



부디, 

지원한다는 그 학교 입학처에서 서류를 꼼꼼하게 확인했기를, 

진짜 자격을 갖춘 사람이 선발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Note 

거의 한 달 만에 글을 올리네요. 

여러 가지 일도 있었고,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3월에는 물리적인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기억이에요.

4월에는 좀 더 자주 쓰도록 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23.04.11 

김서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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