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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K Oct 21. 2023

바쁜 일상에 대한 망각이 우리를 지속시킨다


최근에 정말 하루 종일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일하는 날이 반복되었다. 심한 날은 이브닝 출근해서 양방 순회간호사로 시작해 기구가 엄청 많이 나온 방을 오가며 동시에 수술 마무리를 하거나, 수술이 끝나자마자 다음 응급 수술을 준비하고 오버 타임까지 했다. 나이트 선생님들께 인계 드리고 퇴근하며 옷 다 갈아입고 나서던 길에, 급히 찾는 전화를 받고 다시 수술복 입고 뛰어갔던 날이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진행된 응급 수술로 인해 의사들의 피곤하지만 긴장이 서렸던 눈빛을 기억한다. 진료과가 해당 과의 수술실 간호사를 요청할 만큼 환자 케이스도 예상을 벗어난 정도였고 통증과 위급성이 심했다. 국소 수술인데 통증 호소가 너무 심하고 미리 준비된 약제는 다 투여되어, 마취과 선생님들께 전화로 도움을 청해 마약성 진통제를 투약하고 수술 지원을 하며 무사히 수술을 끝냈다. 


응급실 환자라 코로나 검사 결과가 안 나와 N95마스크를 끼느라 체력적으로 더욱 힘들고, 기구와 장비와 멀리 떨어진 방에서 수술을 하게 되어 뛰어다녀야 했다. 보통은 퇴근길에 일 생각을 애써 안 하는 편인데, 그날은 너무 힘이 들어 '뭐가 문제지?'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이것은 악의적인 업무 로딩인가, 시스템적인 혹은 인력 교육과 관련된 문제인가' 원인을 잡아 탓하고 싶을만큼 억울했다.


오후 근무 때는 이브닝 차지 선생님에 의해 각 과의 남은 수술과 수술실 간호사 인력이 분석되고 최근 오버 타임 시간, 저녁 식사 교대 등을 고려하여 인력을 배정받는다. 전체적으로는 대체로 비슷한 인력으로 돌아가지만 누군가의 청가, 나이트 근무와 주말 근무 및 온콜로 인한 오프, 병가 등의 각 과의 간호사 별 변수가 있는데다가 매일의 수술 난이도와 건수가 다르다. 어느 정도 수술 스케쥴로 하루의 고단함을 예상할 수는 있지만, 각양각색으로 살아있는 환자의 몸을 대하다보니 일정이 길게 지연되는 일도 잦다. 이브닝 차지 선생님도 계속해서 수술실 운영 현황을 확인하고 실제로 라운딩을 돌며 도움이 필요한 방과 마무리가 되어가는 방을 파악하며 인력을 배정해 주시지만 일이라는 게 정량화하기가 어려우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과의 수술에 인력이 없고, 정말 운이 꼬인 날에는 계속해서 고난이도 수술에 참여하느라 체력도 집중력도 탈탈 털리는 날이 생기게 된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생각했다. 


'출근부터도 일이 많은데 이브닝 때 응급, 인력 부족으로 인한 업무 로딩이 너무 심하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정말 일 하기가 힘든 것 같아. 뭔가 구조적인 조치나 고충 처리와 관련해 선임 선생님들의 도움이 필요해...' 


선임 선생님도 당장 명확한 해결책을 내놓아주시기는 힘들겠지만 함께 힘든 부분을 나누며 적어도 문제 의식 공유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일 출근해서 어떻게든 화두를 던져보리라’ 다짐하고, 어떻게 말을 시작할지 고민하며 출근길을 나섰다. 다음 날, 웬일로 아주 안정적이고 젠틀한 수술방에 순회 간호사로 배정받았다. 평온한 근무의 시작에 어제의 고민이 싹 사라지고 할 말이 없어졌다. 삐죽 나왔던 입을 살며시 집어 넣는다.


그리고 다음 날도, 생각보다 인력 배정이 괜찮다. 너무 고된 나날을 보내서일까. 상황이 겹쳐 내게 부담이 되었던 걸까. 내가 지쳐있어서 힘들게 생각했던 건가 한번 더 되돌아본다. 미워할 수 있는 일도 사람도 다른 측면이 보이고 마음이 다시 잠잠해진다. 그리고는 이 고민을 친한 선생님과 나누며 웃는다. 


"요즘 너도 그렇게 생각했지? 아니야. 기다리고 말 안 하길 잘했어~." 


고된 일상이 또 반복되더라도, 소소한 만족감과 동지애에 잊어버리겠지. 푸념하고 애써 웃고 기다리다 털어내겠지. 잊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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